머뭇거림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수요일 아침, 저희는 자리를 잡고 <에세2>를 펼쳤습니다.
아침 낭송이 이제는 완전히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만 내가 소유한 나의 습관이 아니라, 함께 아침을 물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 모두와 공유된(서로 없인 불가능한) 습관입니다.
그렇게 한 주를 잘 읽고 났더니 또 빛나는 문장들이 많이 많이 남겨졌네요.
손글씨로 또 타이핑으로, 2권에서 본격적으로 몽테뉴가 뿜어내는 멋진 문장들이 전해졌습니다.
좋은 건 나누는 게 '국룰'이죠. 이번 시즌에도 필사 나눔은 계속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몽테뉴가 인간의 변덕과 몸의 유한성을 왠지 모를 다정함으로 묘사하며 철학자들의 올곧음 찬미를 탐탁찮게 보는 구절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수많은 가면을 가지고 있음을 묘사하는 구절도 좋았습니다.
"어느 쪽으로 돌려놓느냐에 따라, 나는 내 영혼에게 이 얼굴을 주기도 하고 저 얼굴을 주기도 한다. (...) 약간 돌려 보거나 조금만 다르게 봐도 온갖 모순이 내게서 발견된다. 수줍고 건방지고, 정숙하고 음탕하고, 수다스럽고 뚱하고, 통 크고 까다롭고, 영리하고 둔하고, 시무룩하고 상냥하고, 거짓되고 진실되고, 유식하고 무식하고, 기분파에, 인색하고, 허랑방탕하고, (...)"
이 글을 보시는 누구든, 아래의 나름대로 채택된 이 주의 몽테뉴 구절 모음집에서 맘을 스치는 한 구절을 득템해가시죠!
1장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
나는 인간에게 확고부동만큼 어려운 것은 없고, 변덕만큼 쉬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세부적인 일들을 통해, 그리고 하나하나 따로따로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자가 진실을 말할 공산이 클 것이다.
고대 전체를 통틀어 명백하고 확고한 지조를 지키며 산 사람은 열두엇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그것이 지혜의 주된 목적이다. 한 고대인[세네카]은 “지혜를 한마디로 요약하고 우리 삶의 모든 법칙들을 하나로 뭉뚱그리자면, 동일한 일을 변함없이 원하거나 원치 않는 것”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는 말한다 “‘의지가 올바르기만 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달 생각조차 없다. 왜냐하면 의지가 올바르지 않으면, 늘 동일할 수 없는 까닭이다.”
사실 나는 일찍이 악이란 일탈이요 절도의 결여일 따름이며, 따라서 악에 확고부동을 부여할 수는 없다는 걸 터득했다. 모든 덕의 시작은 반성과 숙고이며 그 끝과 완성은 확고부동이라는 것은 데모스테네스의 말이라고 한다. 숙고를 통해 확고한 길을 잡는다면 가장 훌륭한 길을 잡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럴 생각을 하지 않았다.(12~13쪽)
어제 그렇게 용감해 보였던 자가 다음 날 겁쟁이가 된 것을 봐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어제는 부아가 났거나 어쩔 수 없어서, 또는 동반자가, 또는 술이, 또는 트럼펫 소리가 그의 심장을 배꼽에 갖다 놓았던 것이니까. 그의 용기는 이성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상황이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니 반대 상황에 의해 그가 딴판이 되었다고 해서 하등 놀라울 게 없다.(17쪽)
외적 사건들의 바람만 제멋대로 나를 흔들어 놓는 게 아니라 나 자신까지 내 자세의 불안정성에 따라 나를 휘젓고 흔든다. 자기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본 사람은 자기가 같은 상태에 두 번 있는 법이 거의 없음을 보게 된다. 어느 쪽으로 돌려놓느냐에 따라, 나는 내 영혼에게 이 얼굴을 주기도 하고 저 얼굴을 주기도 한다. 내가 나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한다면 그것은 내가 나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약간 돌려 보거나 조금만 다르게 봐도 온갖 모순이 내게서 발견된다. 수줍고 건방지고, 정숙하고 음탕하고, 수다스럽고 뚱하고, 통 크고 까다롭고, 영리하고 둔하고, 시무룩하고 상냥하고, 거짓되고 진실되고, 유식하고 무식하고, 기분파에, 인색하고, 허랑방탕하고, 나 자신을 돌려 보면 나는 내가 이 모든 것을 얼마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기에게, 또 자기의 판단력에조차 그 같은 다변과 불일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나에 대해 절대적으로, 단순하게, 확고하게, 제한 없이, 혼합 없이, 또는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DISTINGO(역분별)가 내 논리학의 가장 보편적인 항목이다.(17~18쪽)
우리의 행동들, 그것은 이어 붙여 놓은 조각들에 불과하니, “쾌락은 경멸해도 고통에는 비굴해지고, 영광은 하찮게 여기나 악평에는 용기가 꺾이며”(키케로) 가짜 깃발을 내걸고 명예를 얻으려 한다. 덕이 원하는 것은 오직 덕 자체를 위한 덕행일 뿐이다.(20쪽)
[메모 : 칭찬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라고 하면서 막상 상대가 그것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서운해진다. 또 그것에 대해 누군가 악평을 할 때 금방 화가 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너를 위한 일에 내가 희생했다는 심리가 그 속에 깔려있지 않을까. 관념으로 '쾌락을 경멸'하는 것이 일상적인 스텐스로 굳어진 사람이 불쾌감을 주는 구체성들 앞에서는 자제력을 잃어버린다. 또 '영광'따위를 바라지도 않는다는 사람이 막상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에 부딪힐 때 의기소침해진다. '가짜 깃발'이라는 뭘까? 무엇을 위한 일인가를 알려주는 푯대가 아닐까. 나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알아주라는 선전 같은 것.]
어떤 확고한 목적에 따라 자기의 전체적인 삶을 구상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구체적인 행동들을 제어할 수 없다. 전체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분들을 정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뭘 그려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물감을 장만한들 무슨 소용인가? 누구도 자기 인생에 대한 확고한 구상을 세우지 않으며, 조각조각 단편적으로만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궁수는 무엇보다 먼저 어디를 겨눌지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에 손, 활, 시위, 화살, 그리고 동작을 거기에 맞춰야 한다. 주소도 목적지도 없으니 우리의 계획은 길을 잃고 헤맨다. 가려는 항구가 없는 자에겐 어떤 바람도 유용하지 않다.(21쪽)
2장 주벽(酒癖)에 관하여
우리의 허황된 자부심은 얼마나 우리를 지각없게 만드는가! 세상에서 가장 절도 있는 영혼이라도 제 허약함으로 인해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두 발로 버티고 서 있기도 벅차다. 일평생 단 한순간이라도 평온한 마음으로 곧게 서 있어 본 자는 천에 하나도 없고, 인간 본연의 조건을 볼 때 그것이 가능하기라도 할지 의심스럽다. 게다가 곧음과 평온에 항상성까지 결합되어야 마지막 완성의 경지에 이른다. 수천 가지 사건이 그 영혼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마당에,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저 위대한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철학도 하고 자제도 했지만, 보라, 최음제 한 잔에 바로 정신이 나가버렸다. 소크라테스는 중풍을 맞아도 짐꾼처럼 넋이 나가진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가? 혹자는 병의 위력에 눌려 자기 이름마저 잊어버렸고, 혹자는 가벼운 부상 때문에 분별력을 잃었다. 아무리 지혜롭다 한들 결국엔 인간이다. 이보다 더 쇠약하고, 가련하고, 허망한 무엇이 있는가? 지혜는 우리 본연의 조건들을 이길 수 없다.
바로 그래서 공포가 몰아치면, 우리가 보듯,
핏기 가신 온몸에 진땀이 배고, 혀는 굳고, 목은 잠기며,
시야가 흐려지며, 귀는 울리고, 사지가 오그라지며,
전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_루크레티우스
주먹이 날아오면 눈을 감지 않을 수 없고, 절벽 끝에 세우면 어린애처럼 떨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은 이성에게 그것의 필멸성과 우리 인간의 취약성을 가르치려고, 이성도 스토아적인 덕성도 무너뜨릴 수 없는 이같이 소소한 증거들을 남겨 자기 권위를 보존하길 원한 것이다. 공포를 느끼면 하얘지고, 수치를 당하면 벌게진다. 예리한 복통이라도 엄습하면 절망적인 고함은 아닐지라도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나마 끙끙 앓는다.
생각하게 하라, 인간적인 것 어느 하나도 저와 무관하지 않음을.
_테렌티우스 (33~35쪽)
안티스테네스의 금언인 “쾌락을 탐하느니 차라리 미치광이가 되리라.” 같은 스토아적인 경구를 접할 때, 쾌락보다는 고통에 찔리는 것이 더 좋다는 섹스티우스의 말을 들을 때, 에피쿠로스가 통풍을 간지럼처럼 여기고, 휴식과 건강을 거부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병에 도전하며, 가벼운 고통은 경멸하여 그런 따위와는 싸우고 투쟁하는 것조차 업신여기면서, 자기에게 걸맞은 강력하고 예리한 고통들을 바랄 때,
양순한 가축들은 팽개쳐 둔 채,
거품 뿜는 멧돼지나 혹은 사자라도 산에서 내려와 주기를 염원한다.
_베르길리우스
누군들 그것이 제 집 밖으로 튕겨 나온 용맹의 분출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인가? 우리의 영혼이 제자리에 앉아서 그토록 높은 경지에 이를 수는 없을 터인즉, 이럴 때는 영혼이 제 집을 떠나 고양되어 재갈을 악물고 제 주인(사람)을 홀려 아주 멀리까지 내끌어 데려가는 것이리라. (...) 시적 열정, 시적 광기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침착한 인간은 시(詩)의 문을 두드려 봤자 소용없다고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탁월한 인간치고 약간의 광기가 없는 자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고유의 판단력과 이성을 뛰어넘는 모든 열광은 그것이 아무리 상찬할 만한 것일지언정 광기(狂氣)라고 불러 마땅하다. 지혜란 우리 영혼을 흐트러짐 없이 관리하는 것이요, 절도 있고 조화롭게 이끌며 주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7~38쪽)
[메모 : 수행을(공부를) 하면 본연의 조건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평생 수행하셨던 노보살님들이 치매에 걸린다든지, 병이 든다든지, 여전히 노욕을 부린다든지... 그런 모습을 볼 때, 평생 수행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수행에 대한 어떤 이미지에 사로잡혀있었던 게지. 수행을 '무슨 소용'과 연결짓는 것. 수행을 한다는 것은 끝까지 자기 업장과 마주한다는 일이지 않을까. 수행을 하면 업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업장의 사이즈가 보인다. 수행을 한다고 해서 자기가 받을 것을 안 받는 것은 아니다.]
3장 케아섬의 관습에 관하여
가장 흔하게는 다른 불행들을 피하겠다고 한 일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때로는 죽음을 피하겠다고 한 일이 죽음으로 치닫게도 하니,
죽는 것이 두려워 죽다니, 미친 짓 아닌가?
_마르시알리스
절벽이 무서워서 제풀에 뛰어내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많은 이로 하여금 크나큰 위험에 몸을 던지게 한 것은 불행에 대한 공포, 그것이었다.
진정한 용자(勇者)는 위험에 맞설 각오를 하되
가능하다면 그것을 피할 줄 아는 자이다.
_루카누스(45쪽)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견해는 가소롭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이 우리의 존재요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고상하고 풍요로운 존재를 지닌 것들은 우리를 비난해도 좋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찮게 여기며 우리를 소홀히 다루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다. 자기를 미워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은 별난 병, 다른 피조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병이다. 이 역시 우리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치한 생각이다. 그런 욕망의 결실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 욕망 자체가 자기모순, 자가당착이니까. 사람에서 천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저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천사가 된 것에서 아무 득도 보지 못한다. 그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누가 자기를 위한 이 변화를 느끼고 즐길 것인가?(45~46쪽)
우리가 죽음을 댓가로 안전, 무통, 평정을 사들이고, 이승의 갖가지 불행에서 벗어나 봤자 우리에겐 득 될 게 없다. 평화를 즐길 수 없다면 전쟁을 피한 것도 다 소용 없는 일이요, 휴식을 맛볼 수 없다면 노고에서 벗어난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46쪽)
때로는 사는 것이 꿋꿋하고 용감한 일이라고. 자기는 자기의 죽음조차 조국에 대한 봉사이기를 바라며, 죽음을 명예와 용덕의 행위로 만들기를 원한다고. 트레이키온은 자기 신조대로 그때 자살했다. 나중에 클레오메네스도 똑같이 했다. 하지만 최후까지 운수를 시험해 보고 나서였다. 모든 불행이 다 죽어서라도 피하고 싶어 할 만한 불행은 아니다. 게다가 인간사에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어느 지점이 우리 희망의 끝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잔인한 투기장 바닥에 뻗어서도, 패배한 검투사는 삶을 희망한다.
위협적인 군중은 엄지를 뒤집어 죽음의 신호를 표하건만.
_유스투스 립시우스
옛말에 이르기를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무엇이든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세네카는 응수한다. “그렇지만 왜 내가, 죽을 줄 아는 자에게는 운수가 아무 짓도 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 산 자에겐 별별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더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국민 전체가 들고 일어나 요세푸스는 너무도 명백하고 위급한 위험에 빠졌다. 논리적으로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 순간 자살하려는 한 친구의 충고를 듣고도 고집스럽게 희망을 품었던 것은 잘한 일이었다. 모든 인간적 추론을 넘어 운수가 이 사건을 역정시켜 아무 해도 입지 않고 거기서 풀려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반대로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시기와 상황이 익기도 전에 성급하고 무모하게 자살함으로써 그들이 수호하던 로마의 자유의 남은 불씨를 꺼트리고 말았다. 나는 사냥개의 이빨로부터 도망치는 토끼를 수없이 보았다. “어떤 자는 자기의 사형 집행인보다 오래 살았다.”(세네카)
자주 시간은 변전하는 흐름 속에 갖은 결과를 낳으며
부서진 운명들을 회복시켰고,
자주 운수는 제가 쓰러뜨린 이들에게 돌아와
그들을 안전한 장소로 되돌려 놓는 장난을 친다.
_베르길리우스(47~48쪽)
알렉산드로스는 인도의 한 도시를 포위했다. 도시 안에 있던 자들은 막다른 지경에 몰리자 알렉산드로스의 아량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승리의 쾌감을 주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그들 자신이 서로를, 그리고 도시까지 불태웠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적은 주민들을 살리려고, 주민들은 죽으려고 엉겨 붙었다. 사람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하는 모든 짓을 그들은 확실하게 죽으려고 행했다.(56쪽)
참을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자살보다 못한 죽음의 위협이 내 보기엔 가장 용납할 만한 자살 동기일 것 같다.(60쪽)
4장 사무는 내일로
사려 깊은 사람은, 루스티쿠스가 동석한 사람들을 무례하게 방해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남을 배려해서, 또는 다른 중요한 일을 중단하지 않으려고 새로 전달된 소식을 나중으로 미루었다가 들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자기의 개인적 관심사나 쾌락 때문에 미룬다는 것은, 특히 그가 동적인 임무를 맡은 사람이라면 식사 중이거나 나아가 취침 중이라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고대에는 총독의 자리라고 부르던 자리가 식탁의 최상석이었는데, 운신하기에도 제일 편하고 불시에 의논하러 오는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기도 가장 편한 자리였다. 식사 중이라도 다른 사무나 돌발 사건을 전달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다 말해 놓고 보니, 인간 행동의 영역에서는 운수가 힘을 못쓸 정도로 딱 맞는 규칙을 이성의 논리로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64쪽)
5장 양심에 관하여
양심의 힘이란 이렇게 놀라운 것이다! 양심은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우리 자신을 고발하며, 우리 자신과 싸우게 만들어 다른 증인이 없이도 우리 자신을 우리의 반대 증인으로 세운다.(66쪽)
고통은 죄와 동시에 그 즉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벌을 예측하는 자는 누구나 이미 그 벌을 받고 있고, 벌받을 짓을 한 자는 누구나 벌을 예측한다. 악행 자체가 스스로를 벌하는 고뇌를 만들어낸다.(66쪽)
가뢰라는 곤충은 자연의 이율배반으로, 제 몸의 한 부분이 자기 독을 푸는 해독제로 쓰인다. 마찬가지로 악에서 쾌감을 얻는 바로 그 순간, 양심에는 고통스럽고 불편한 불쾌감이 생겨나, 자나깨나 갖가지 사념으로 우리를 괴롭힌다.(67쪽)
[메모 : 니체가 선악의 저편으로 넘어가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선악의 기준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라는 뜻이지 선악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을 선이라 하고 무엇을 악이라고 하는가. 본능이 그 둘을 가르는 잣대가 될 것 같다. 이때 본능은 자연이다. 양심이란 이심전심의 그 마음이 아닐까. 본능에 가까운 이 마음은 상대에게 전달된다. 이 장의 마지막에 인상 깊은 양심의 판결이 나온다. 재판관의 양심과 고발하는 여인의 양심이 연결되어 그 여인의 말을 믿게 만들었다. 배고픔에 아이들이 먹이려고 아껴둔 우유죽을 뺏어먹은 그 병사는 공동체의 약속을 짖밟았다. 양심이란 공동체를 지켜내도록 계발된 심성이 아닐까. 그것에 위배 되는 행동을 했을 때 스스로 벌을 받게끔 한 기제가 아닐까.]
양심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채우듯, 우리를 확신과 자신감으로도 채워준다. 그래서 나는 여러 가지 위험에 처했을 때, 나 자신의 의지와 내 의도의 순수함에 대한 내적 확신이 있을 때 훨씬 더 확고한 걸음으로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68쪽)
6장 수련에 관하여
이성적인 사유나 교훈은 마음으로 기꺼이 다짐한들, 그것만으로 우리를 행동에까지 이끌어 갈 만큼 강력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에 순응하도록 실제 경험을 통해 영혼을 단련해서 조형해 놓지 않으면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혼은 행동해야만 할 때 필경 당황하고 말 것이다.(72쪽)
하지만 우리가 치러야 할 가장 큰 일인 죽는 일에서의 수련이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 우리는 습관과 경험을 통해 고통, 수치, 빈곤이나 그 비슷한 사건들에 대해 우리를 단련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으로 말하자면, 한 번밖에는 경험해 볼(essayer) 수 없다. 옛날에는 시간을 기막히게 잘 활용한 사람들이 있어, 죽음에 임해서조차 그것을 잘 맛보고 음미하려 애쓰며 정신을 바짝 차려 그 이행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소식을 전해 주러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73쪽)
“그래 카니우스, 지금 그대 영혼의 상태는 어떠한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는 대답했다. “전력을 다해 바짝 긴장하고 있을 생각이네, 너무도 짧고 신속한 이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옮겨 가는 것을 지각할 수 있는지, 영혼이 빠져나가면서 무슨 섭섭한 감정을 느끼는지 보려 하네. 만일 뭔가 알게 될 시, 할 수만 있다면 나중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알려 주려고 말이야.” 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만 철학자였던 게 아니라 죽으면서도 철학자였다. 그토록 중대한 일에 처해서도 자기 죽음을 공부거리로 삼고 타인들을 생각할 여유까지 갖다니, 얼마나 침착한 태도이며, 얼마나 용감한 긍지인가!
죽는 순간에도 여전히, 그는 자기 영혼에 대한 지배력을 견지하였다.
_루카누스(74쪽)
얼마나 쉽게 우리는 깨어있는 상태에서 잠으로 나아가는가! 얼마나 유감없이 우리는 빛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을 잊어버리는가? 만일 자연이 그것을 통해, 우리를 살게끔 만든 것과 똑같이 죽게끔 만들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우리가 이승에 온 순간부터 미리 우리를 위해 저승에 마련해 둔 영원한 상태를 알려줘 거기에 익숙해지게, 두려움을 갖지 않게 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우리에게서 모든 행동과 감정을 앗아가 버리는 잠의 특성은 무용하고 자연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75쪽)
고통을 느끼려면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죽는 순간이란 너무 짧고 순식간이라 필연적으로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의 언저리이다. 그리고 그 언저리에 발을 디디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75쪽)
내가 매일 체험하는 바로,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따뜻한 옷을 입고 좋은 방에 있노라면 들판에 있을 사람들 생각에 안절부절못하며 속을 끓인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을 때는 다른 곳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계속해서 방 안에만 갇혀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내가 갑자기 불안으로 가득 차고 사람이 영 달라진 채, 약해 빠진 몰골로 일주일, 한 달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알게 되었는데, 정작 나 자신이 앓고 보니 내가 건강했을 때 병자들을 동정했던 것이 지금 앓고 있는 내가 받을 만한 동정보다 지나치게 과했다는 것, 상상의 힘이 사물의 본질과 진실의 거의 반은 더 부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도 그와 같이, 나처럼 만반의 준비를 해 두려고 애쓸 것도, 그 고비를 넘기기 위해 나처럼 오만 가지 도움을 미리 청해둘 필요도 없는 일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에 대비하며 지나치게 준비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75~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