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후기
안녕하세요. 8월 3,4일(목/금) 열린 규문 생태 영화제 금요일 일정에 참여한 뒤 후기를 쓰게 된 신현주입니다. 온라인으로 글쓰기와 역사 수업 듣고 있고요, 규문 공간에 방문할 기회가 적다 보니 이런 단기 프로그램이 열리면 나름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후기를 맡고 마음이 조금 무거웠는데요.. 요즘 영화나 책을 본 뒤 짧게라도 정리하는 습관을 기르려고 노력 중이라 즐거운(?)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써 보았습니다.
본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생태라는 주된 테마로 관통하는 영화제답게 금요일에 본 세 편의 영화들은 각각 직접적이거나 은유적인 방식으로 환경과 공존, 생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첫 영화로는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두 번째는 디즈니 픽사 앤드류 스탠튼의 <월-E>, 마지막은 샤우낙 센의 <숨 쉬는 모든 것>으로 총 세 편을 보았습니다.
<히로시마 내 사랑>
사실 이 영화는 뒤에 두 편에 비해서 생태나 환경적인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조금 어려웠습니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억’과 ‘망각’, 그리고 ‘앎’과 ‘재현’이라는 테마에 꽂혔기 때문인데요. 영화의 첫 부분에 먼지인지, 땀인지, 방사능 분진인지 모를 반짝이는 가루를 온몸에 덮어쓴 채 사랑을 나누는 남녀가 나옵니다. 둘의 정사씬과 히로시마 원폭으로 폐허가 된 길거리, 끔찍하게 훼손된 사람들을 교차하여 이질감을 주면서도 비슷한 ‘감각적 강렬함’을 안겨줍니다.
여성은 영화에서 망각과 기억을 자주 언급합니다. 여성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도시 느베르에서 전쟁의 폭력성과 부당함을 직접 겪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전체적인 맥락은 잊힌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여성을 괴롭히는 건 잊히지 않는 강렬한 감각과 이미지들의 단면입니다. 총에 맞아 사망한 전 애인의 모습, 적군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잘려나가던 머리카락과, 손톱 끝에서 흐른 피가 엉겨 붙은 감금당한 지하실의 벽면. 전쟁이 끝나고 느베르는 여성의 머리카락이 자라듯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가지만 여성은 느베르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떠나지요. 또한 여성의 과거와 트라우마는 현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를 증명하는 단적인 예가 여성은 관계 후에 침대에 뒤집어진 채 누워있는 남성의 모습에서, 과거 비슷한 자세로 죽은 독일군 애인을 떠올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히로시마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여성에게 당신은 히로시마를 모른다고 답하는 남성. 두 사람의 대화는 어쩐지 불통에 답답합니다. 여성은 전쟁 후 폐허가 된 땅 위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와 개들,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여러 종류의 꽃들, 생존자들의 삶과 그들이 인내와 체념의 방식으로 부당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 그럼에도 그들의 삶은 계속될 거라고, 자신은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실제로 과거 독일군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삭발을 당하고, 지하실에 갇히고, 거대한 폭력에 노출되어 인격을 상실하고 사물화되었던 과거의 비극 위에서 히로시마의 고통을 공감하고 상기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여성의 과거 사정을 몰랐던 남성은 자꾸만 너는 히로시마를 모른다고 되뇝니다. 남성에게 여성은 타지의 외국인, 히로시마에 가족도 연고도 없는 이방인, 신문이나 뉴스로만 상황을 접했을 제3자이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뭔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현재의 차원에서 우리가 과거를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전부 재현의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당장 우리나라의 경우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여러 범죄와 비극적 사건, 재해와 환경 파괴의 현장이 드러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게 추가되는 끔찍한 이미지를 보며 분노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안다고 하는 것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사건의 단면만을 보여주는 아주 일부의 형상일 뿐입니다.
<월-E>
이 영화는 볼 때마다 유독 디즈니라는 이유만으로 DVD를 틀었다가 황폐해진 지구와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를 보고 깜짝 놀란 어린 시절 제 모습이 잔상처럼 떠오릅니다. 영화의 앞부분은 어느 방면에서도 생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황톳빛 쓰레기 산으로 가득합니다. 이 장면은 아득한 미래를 예측하고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칠레와 인도의 쓰레기 산, (마찬가지로 한국 곳곳에도 존재하지요) 태평양에 섬처럼 쌓여있는 거대 쓰레기 지대들을 생각하면 이미 시작되고도 남은 현실의 온상이죠.
월-E는 수습할 수없이 넘치는 쓰레기들을 네모 반듯하게 압축하고, 건물을 짓는 것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립니다. 자칫 보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이 반복적 행동은 월-E의 삶에선 아주 중요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쓰레기 더미에서, 삶이란 부조리의 늪에서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는 것만이 살기 위한 방식입니다. 월-E는 원해서, 혹은 무언가를 바라서 행위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쓰레기를 몸 한편에 쓸어 담고, 압축하며 삽니다. 그저 이것이 월-E가 폐허가 된 지구에서 홀로 (바퀴벌레 친구가 있으니 혼자는 아니네요..)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거창할 게 전혀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이죠.
생태나 환경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어쩐지 ‘무기력함’이 동반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차원으로 뭔가 열심히 재활용하고, 대중교통 이용하고, 에어컨을 최대한 덜 트는 등의 절약을 행해도 그렇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개인의 차원으로 뭔가를 시도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행동과 확신을 약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시도해도 달라지는 게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방법일까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월-E에게도 선택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로봇들과 마찬가지로 쓰레기 더미의 일부가 되어 죽는 방법도 있었겠죠. 그러나 월-E는 스스로의 의지로, 쓰레기들을 모아 반듯하게 정리합니다. 이미 쓰레기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그밖에 달리 손쓸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숨 쉬는 모든 것>
일단 작은 변명을 하나 하자면,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한글 자막이 없어서 앞의 두 영화에 비해 디테일하게 내용을 이해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다른 샘들의 의견과, 채운 샘의 말로 후기를 쓰게 되었는데요….
형제들은 대기와 환경 오염으로 자꾸만 추락하는 솔개를 보살핍니다. 채운 샘은 이들이 솔개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전통성을 언급하셨습니다. 형제에게 솔개는 단순히 먹이사슬 최상층에 있는 육식동물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머니의 어머니부터 전해지던 ‘솔개에게 먹이를 주고 액운을 떨친다’는 신화적이며 전통적인 사상 아래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솔개가 육식을 하는 새라는 이유로 동물 병원 출입을 거부 당하고,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때도 형제들은 묵묵히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해나갑니다. 문득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이후에도 이 지구를 살아갈 다음 세대들에게 어떤 사상과 개념을 남겨야 할지 생각해 볼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유독 인상 깊었던 부분은 (물론 제가 발견한 건 아니고 채운 샘이 말해주셨지만) ‘솔개에게는 인간이 환경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연환경 등에 적응해 살아간다고 하는 것처럼 솔개에게는 인간이 하나의 거대한 환경이라는 것이죠. 영화는 솔개뿐 아니라 돼지, 쥐, 거북이, 두꺼비, 모기 유충과 같은 벌레들이 인간으로 인해 망가지고 황폐해진 인도의 땅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솔개는 인간이 버린 쓰레기를 먹고, 그 때문에 생긴 기생충을 제거하기 위해 담배꽁초를 먹는 방식으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다른 동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폐허에 적응한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거리에 쓰레기가 넘쳐나자 쥐와 벌레들의 기하급수적 증가는 끔찍한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환경을 만든 것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면 나 또한 결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제목에 다시 주목하게 됩니다. 숨 쉬는 ‘모든 것’.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쩐지 인간은 그 사실을 자주 망각하는 듯합니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엄한 생명들이 인간이란 환경으로 인해 자신의 터전과 생존 방식을 바꿔서라도 살아남는 모습은 너무도 부자연스럽습니다. 영화는 거리의 쓰레기들을 수많은 솔개가 먹어치우는 방식으로 줄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으로 인해 삶을 위협받는 수많은 생명들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도심을 청소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들의 영향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걸 말하겠죠. (반대로 그들의 삶도 우리에게 치명적 영향을 받고요.)
<마무리하며>
언젠가 페스트 패션으로 소비된 수억 개의 옷들이 산을 이루고 있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태우고 태워도 그에 비례하게 빠르고 높이 쌓아지는 옷더미들은, 생명이 살아야 할 땅을 너무도 무서운 기세로 침범했습니다. 쓰레기 산과 그 위에서 풀 대신 옷을 뜯고 있는 소들, 이미 말라버린 지 오래된 강과, 매캐한 연기로 뿌옇게 덮인 하늘. 우리나라는 비교적 개개인이 분리수거를 꼼꼼히 하는 편이고, 많은 카페들이 일회용을 줄여나가는 추세라고 해도 한편에서는 빠르게 바뀌는 유행에 맞춰 계절마다 몇 벌의 옷들을 사고 버리고, 편의를 위한 각종 기계들은 줄어들질 않죠.
이미 개인이 뭔가를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이제는 집단과 국가가 움직여야 한다는 말도, 지구 온난화를 넘어 끓는 시대에 도달했다는 말도 나오지만 환경 면에서는 여전히 어떤 실천들이 부진한 것 같습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월-E처럼, 혹은 형제처럼 개인의 차원에서라도 할 수 있는바를 묵묵히 해나가며 무기력함이나 편의와 싸워보는 건 어떨까요? 그 과정에서 올라오는 개인의 욕망과, 지금도 수많은 곳에서 자행되는 파괴적 행동의 단면이나 충격만을 기억하지 말고 그것의 발현 과정과 내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깊은 공부 또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생기 세미나에서 그리고 생태영화제에서 유독 '무력함'과 크게 부딪치는거 같습니다. 나의 무력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회피, 외면, 습관, 편의 등등 여러 단어가 떠오르네요.. 내몸은 여기,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게 맞을 것입니다. 콩밭타령 그만하고 내몸이 생태와 어떻게 작용하는지 감각을 더 곧추세우고 관계를 되새기며 논리를 잘 다져다가면 불편을 무릎쓰고 습관을 해체하고 현실을 대면하면서 몸으로 응답하는 삶을 조금씩조금씩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장화를 살지 말지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일환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ㅠㅠ 너무 고민스러운 하루네요~~ 현주쌤의 놀라운 후기를 읽으며 크크랩의 제1영입자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드는군요!! 파하~~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