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한다’는 ‘생태적’ 마인드에 경종을 울린 군다와 루마
영화 「군다」, 군다는 돼지이름이에요. 군다의 삶은 축사에만 갇혀 길러지는 다른 돼지들의 삶에 비하면 소위 ‘인간적’이라 할 수 있죠. 헛간(?)건물의 벽에 난 네모난 출구를 통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요. 그 출구에 드러누워 볕을 쐬고, 바람을 느끼고, 비를 맞아요. 젖먹이 새끼들과 주변을 자유로이 산책하고 진흙목욕을 느긋하게 즐길 수도 있죠. 그런데 어느 날 커다란 트랙터가 다가오더니 컨테이너에 군다가 그간 키운 새끼들을 모조리 싣고 사라져버려요. 군다는 한참을 울부짖죠. 그 장면을 보면서 저것이야말로 ‘적막에 갇힌 독백’이구나 싶었어요. 군다의 그 소리에 우리 인간이 그 새끼들을 데려올 리 없잖아요.
이렇게 좀더 ‘인간적’인 자유, 방목을 병행한 가축의 고기는 좀더 비싼 가격에 팔리지요. 군다와 같이 길러진 돼지는 ‘생태적’이라는 브랜드를 찾는 사람들의 취향, 그리고 진보와 생태적 삶을 산다는 사람들의 구미를 만족시키지요. ‘생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위계를 더 심화하는 아이러니라니. 실려가는 새끼들을 보면서 군다가 누린 ‘생태적’ 삶은 상품의 고급화 전략이었구나 싶었어요. 누군가는 이런 현실이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고 했지요.
‘군다’의 다른 장면, 케이지를 빠져나온 방목된 닭들이 이곳저곳을 경계하면서도 자유롭게 배회하죠. 그러다 어느 순간 철조망을 맞닥뜨려요. 철조망의 구멍 사이로 머리를 넣어 그 너머로 가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실패. 영화 내내 대부분 동물 가까이에서 그 동물의 눈높이에 맞춰 촬영이 이루어져요. 그래서 우리는 눈을 마주하며 그들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아주 멀리서 조망하듯 촬영된 장면이 있어요. 축사를 나온 일군의 소떼가 질주하는 장면인데요. 시원스레 내달리던 소들이 일시에 멈춰서요. 멀리서 볼 때는 그 영문을 알 수가 없는데요. 이어지는 클로즈업 된, 멈춰 선 소 뒤로 가로와 세로로 얽힌 철그물이 보이죠. 분명 그 전 화면에서는 소들에게 들판이 무한정 펼쳐져 있는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만 볼 수 있던 철그물이 놓여있었던 거죠.
「카우」는 ‘젖소’로 키워지는 ‘루마’에 관한 이야기에요. 새끼를 낳아야 젖이 ‘생산’되지요. 새끼를 출산한 루마는 젖을 주는 행위도 송아지와의 접촉도 허락되지 않아요. 새끼는 분리되어 다른 곳에 보내진 후 젖병에 인간이 담아서 주는 ‘우유’를 먹어요. 우유가 소의 젖임에는 틀림없지만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어미의 젖’이 아니라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상품인 ‘우유’가 먹여지는 것으로 보였어요. 루마라는 어미 소들의 젖은 상품의 원료더군요. 영화에서 젖소는 송아지를 낳아 키우고 번식시키는 ‘생명’의 이름이 아니라, 우유라는 상품의 원료, 사물의 이름이었어요. 어쩌면 ‘유기농’이라는 이름으로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우유의 원료일지도. 루마는 6마리 아니 ‘6회’ 송아지를 낳지요. 루마의 젖은 매번 제 새끼를 키우는 것으로 허락되지 않지요. 어느 순간 원유생산에 쓰인 유방은 루마가 스스로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져요. 그 유방으로 힘들어하던 루마는 총으로 사살되지요.
루마도 축사와 방목을 오가며 키워졌어요. (달빛아래서 여유롭게 되새김질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루마를 대하는 목장주들의 말과 태도도 부드러웠구요. 총살이라는 목장주의 선택도 너무 힘들어하는 루마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어요.
군다와 루마는 가축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 인간의 노력 속에서 키워지는 존재들이에요. 하지만 영화에서 멈춰선 소떼의 질주, 철망 너머로 고개를 내밀지만 너머로 빠져나갈 수 없는 닭, 일순간 사라져버린 새끼에 망연자실한 군다, 원유를 생산하고 다음 세대에 또 원유를 만들 암소를 낳는 기계가 되어버린 루마를 보면서 가축들을 ‘위해서’ 더 나은 조건을 마련해주는 인간행위의 한계가 너무 자명했어요.
영화제 첫날, 「군다」에 이어 「카우」를 본 직후 ‘위한다’ 것에 강한 의문과 회의가 들었어요. ‘ ~을 위해서’ 더 나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감각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영화에서는 볼 수 있는 비인간종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강력한 폭력을 일상에서는 왜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이토록 내 삶의 방식에 자족할 수 있었던 거지? 최소한 ‘위한다’는 도덕적 명분과 정의감으로 포장만 하지 않아도 폭력적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위한다’는 출발점은 이미 위계를 노정하고 있지요. 군다의 공허한 울음소리, 시간이 지날수록 우울하고 무력해지던 루마의 눈빛은 우리 인간의 것이란 느낌 때문에 지금도 영화에 붙잡혀 있는데요. 가축은 인간과 밀접하게 결합된 존재잖아요. 서로의 의존이 더 나은 상품을 위한 것이고, 이윤을 위해서 소모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고 할 때 우리 인간의 삶은 과연 다르게 영위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이 서 있는 지평이 우리가 서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거짓 감각과 위선이 우리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루마의 변화되는 눈빛을 보면서 인간의 변화되는 눈빛과 다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루마의 우울, 무력함과 인간의 우울, 무력함과 다를까? 나만 불행하고 다른 이들의 행복을 뺏고 싶다는 어떤 범죄자의 마음이 내 건강한 몸을 위해 온갖 영양식을 섭렵하려는 인간들의 마음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 한주였습니다. '~을 위한' 행위가 정확히 무엇을 위한 행위인지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계속 타자를 경계하고 해치고 자폭하고 마는 삶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군다와 카우는 저에게 자유의 허상을 깨닫게 하고 존재의 정의가 어떻게 재편되어야 하는지 뼈때리는 영상으로 새겨졌습니다. 이런 가슴의 답답함이 어디로 어떻게 승화되어야 할지도 저의 큰 과제입니다.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