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5주차 세미나인데요. 『창조적 진화』에서 핵심이자 결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는 제3장(생명의 의미 – 자연의 질서와 지성의 형식)의 전반부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세미나 초반부터 베르그손의 텍스트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화학반응이 일어난다는 샘도 있었고, 철학이나 과학, 지성, 직관, 무질서, 긴장과 이완 등 여러 이야기로 열기가 가득찬 세미나였는데요. 이야기를 나눌 때는 흥미로웠지만, 막상 후기를 쓰려니 정리가 어렵지만, 제가 느낀 것을 중심으로 쓰보렵니다^^
○ “철학은 전체 속에 다시 한번 용해되기 위한 노력”
베르그손은 3장 서두에서 앞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주는데요. 1장에서는 물질을 무기물과 유기물로 구분하였고, 이런 물질은 흐름의 상태로 있지만, 인간의 감관이나 지성이 그런 물질을 무기체로 분할하고 재단한다는 거죠. 2장에서는 지성은 무기물질에 의존하며, 본능은 생명적 질서에 의존하는 대립으로 보았지만, 생명이 분기 되어 온 것을 보면 지성과 본능은 단일한 토대에 있다는 것이죠. 이때 단일한 토대가 바로 “의식 일반”이기도 하며 “보편적 생명”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지성의 “<발생을 추적할engendrer>가능성”(280쪽) 이 있다고 해요. 결국 지성의 발생을 엿보는 것은 물질의 발생과 같이 가는 것이기도 하죠. 지성성과 물질성은 “동일한 본성”으로 지성과 분리해 물질을 생각할수 없다는 거죠.
그런데 베르그손은 왜 이런 지성의 발생을 추적해가는 걸까요? 니체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에 이를 것인가? 이런 것을 철학의 목표로 삼았듯, 베르그손은 겸손한 철학, 즉 “전체 속에 다시 한번 용해되기 위한 노력”으로 “지성은 그 원리속에 흡수되면서 자신의 본래 기원을 거슬러 체험”을 통해, 결국 “우리 안에서 인간성을 확장하고 인간성 자체를 초월하는데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듣기만 해도 가슴을 울리게 하는 구절이지 않나요!!
여기서 지성이 그 원리속에 “흡수”, “용해”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베르그손은 응고된 핵과 수영을 배우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응고된 핵(지성)이 핵 주위를 둘러싼 유동체(생명)에 다시 흡수되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세포가 끊임없이 분열을 통해 생성과 소멸을 하고 있는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수영을 배울 때는 물에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냥 이론으로 절대 배울수는 없는 것이죠. 이 말은 우리가 아무리 지성적으로 사색해 보아도 결코 지성을 넘어설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그래서 육지의 보행 방식을 벗어던지고, 물의 작동 방식에 몸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이죠. 물을 두려워하면 절대 물과 섞일 수 없겠죠. 걷는 것과 수영하는 것 완전히 다른 운동이죠. 그런데 수영을 하던 몸(생명)은 걷는 것(지성)으로 연장되기도 하지만, 걷는 것(지성)은 수영으로 연장되지 않는 다는 것이죠. 그래서 완전히 거기에 녹아 들어가야 하는 것, 용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일까요? 우선 “주어진 것의 순환”(290)에 우리 자신을 두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사물을 거칠게 다루어야 하고 의지 행위에 의해 지성을 그 처소 밖으로 밀어내야”(292쪽)한다고 하는데요. 이런 순환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도약”이라고 해요. “도약” 당연히 생명의 도약이겠죠. 의식 일반, 생명이 식물과 동물, 본능과 지성으로 진화 되어 인류라는 종점에 와 있는데, 생명이 작용하는 곳에서 잠자고 있는 직관, 본능으로 축소된 직관, 그 어둠을 뚫고 들어가야 함을 예고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 부분에선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철학일 수도, 예술일 수도, 종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질서와 무질서, 질서의 반대가 무질서일까요?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사유도 흥미로운 것 같아요. 우리가 가진 질서에 대한 관념을 여지 없이 깨뜨리고 있어요. 질서는 지성이 물질에 가하는 기하학적이고 공간에 대한 표상에서 생겨나는데요. 집안에 물건이 있던 자리에 놓여있지 않거나 흐트러져 있으면 무질서하다고 생각하죠. 지성은 이처럼 물체가 지닌 물질성과 공간성을 향하는 “기하학적 질서”처럼 완벽한 질서를 원하는데요. 그리고 연역이나 귀납의 방식 같은 원인이나 결론을 항해 추론해가는 질서를 만드어 내는 것인데요. 이것은 정신의 운동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죠. 물질의 질적인 차이를 양의 차이로 환원해 버리는 거라할 수 있죠. 이처럼 지성은 “기하학적 추”를 달고 물질이 기하학을 향하는 운동 속에 있죠. 그러니 지성과 물질은 “동일한 본성”에 속하고 동일한 반성으로 생겨나며, 지성은 자연스레 “공간과 수학”을 향하는데요. 지성은 수학적 질서나 이런 틀 중의 하나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질서의 부재”로 이해되는 “무질서의 관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다른 것(문제삼을 필요가 없었던)을 이용하여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예를 들면, 서고에서 책 한 권을 뽑았을 때,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산문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찾는 것과 관련하여, <이것은 산문이다> 라고 표현하는 대신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하는데요. 그렇게 우리의 지각은 산문의 관념에 고정되어 그것에 대해서만 귀기울이는 “나의 기대와 주의의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를 부정하는 것이 다른 것을 긍정하게 되는 그런 “부조리함”을 잊고 두 가지 동시 부정을 산문과 시의 “공통 기체”로 실체화 해버린다는 거죠.
그러니 무질서의 관념은 “두 종류의 질서중 하나를 찾는 동안 다른 것을 만날 때마다 우리 정신속에 떠오르는 것”(334쪽)이라고 해요. 즉 존재하지 않는 질서를 발견할 때 정신의 실망을 언의 편을 위해 “객관화하는 것”이죠. 이것은 인식의 혼동으로 인해 “주체와 대상간의 일종의 일치”에서 만들어지는 질서이기도 하죠. 우리의 정신은 두 방향으로 “자연젹 방향”과 긴장을 띤 “자유로운 활동성”을 띠는데, 자연적 방향을 거꾸로 가면 기하학적 작동기제에 도달하기에, 둘 사이의 혼동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그래서 베르그손에게 두 개의 질서, “생명적 질서”와 “자동적 질서” 가 있어, 의식은 이 둘 사이를 오간다고 해요. 여기에도 당연히 지성은 후자로 가려는 경향을 가진다고 볼 수 있겠죠.
☞ 3장에 후반부에 읽을 부분에서 이 2가지 질서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다음 세미나 시간에 이 두가지 질서에 대해 더 이야기 나누어 보아요^^
전체 속에 다시 한번 용해되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철학, 그 노력의 일환으로 '사물을 거칠게 다루고 지성을 그 처소에서 밀어낸다는 것'은 무엇일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생각으로 수영을 배우려 하지 말고 일단 물속으로 뛰어드는 일과 관련이 있겠지요.ㅎㅎ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