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열대야가 주춤하고 태풍이 지나간 한 주였습니다. 그래도 아침을 수놓는 몽테뉴-되기는 계속되었습니다!
몽테뉴는 이번에도 재미난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는데요.
필사해주신 부분에서도 많이 보이는 구절은, 몽테뉴의 자기로의 탐구 시도(essai)였습니다.
자기 삶을 녹이는 글쓰기란 무엇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구절들인데, 살짝 미리보기로 볼까요?
"여러 해 전부터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내 사색의 목표로 삼아 오로지 나만을 관찰하고 나만을 연구해왔다. 또 내가 다른 것을 연구한다면 이는 그것을 내 위에 놓아 보기, 또는 더 적절히 말하자면 내 안에 담아 보기 위해서이다. "
"이 에세이들은 나의 변덕스러운 생각이요, 그것들을 통해 내가 하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알게 하려는 것이다."
"또는 책을 통해 무슨 공부를 한다쳐도, 거기서 구하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을 알게 해주는 지식, 내게 잘 죽고 잘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줄 지식뿐이다."
그럼 이제 필사를 좀 보겠습니다!
6장 수련에 관하여
여러 해 전부터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내 사색의 목표로 삼아 오로지 나만을 관찰하고 나만을 연구해왔다. 또 내가 다른 것을 연구한다면 이는 그것을 내 위에 놓아 보기, 또는 더 적절히 말하자면 내 안에 담아 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덜 유익한 학문들에서 하듯이 내가 이 공부에서 얻은 것을, 아무리 그 성과가 만족할 만하지 못해도 남과 나누는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묘사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고, 분명 그만큼 유익한 일도 없다. 사람들 앞에 나서려면 머리도 좀 더 매만져야 하고, 치장도 더하고 매무새도 더 정돈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끊임없이 나를 묘사하고 있기에 끊임없이 나를 가다듬고 있다.(84~85쪽)
어쩌면 저들의 말은 말로만이 아닌 업적과 행동으로 나 자신을 증명하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로 내 사유를 그리는데, 고정된 형태가 없는 소재라 행동으로 발현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그것을 목소리라는 이 기체로 된 몸체에 담는 것뿐이다.(86쪽)
내가 여기에 쓰는 것은 내 행위가 아니라 나이다. 나의 본질이다.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데는 신중해야 하고, 자기를 증언할 땐 비천하건 고매하건 똑같이 양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착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하거나 거의 그렇다고 생각하면 나는 목청껏 그렇다고 외칠 것이다. 사실보다 자기를 깎아내려 말하는 것,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바보짓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비굴한 겁쟁이의 행동이다. 어떤 덕성도 거짓을 이용하진 않는다. 그리고 진실은 결코 허물거리일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부풀려 말하는 것, 그것 역시 항상 오만이 아니라 어리석음일 때가 많다. 내 생각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과대망상을 갖고 분별없이 자기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이 악덕의 실체이다. 그것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은, 자기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자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못하게 만드는 저 관습의 명령과 반대로 하는 것이다. 오만은 생각에 깃든다. 혀는 아주 조금만 거들 뿐이다.
자기에게 전념하는 것이 저들에겐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와 부단히 사귀어 연마하는 것을 지나친 자기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지나침은 자기를 피상적으로 더듬는 자, 자기가 이룬 일에서 자기를 보는 자,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몽상 또는 게으름이라고 부르고, 자기를 충실하게 만들고 지어가는 것을 공중누각으로 짓는 일이라고 여기며, 자기를 제삼의 물건인 양 저 자신과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서만 생긴다.(87~88쪽)
[ 메모 : 몽테뉴의 에세란‘한 번밖에는 경험해 볼(essayer)’수없는 것에 대한 탐구이다. 에세이에 대한 때묻은 생각을 다시 한번 씻어 내는 아침. 사람들은 글을 쓴다고 할 때 ‘내가 빠진 글’을 쓰지 말라고 한다. 이 의미는 글이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의 이야기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쓰면 그건 자기탐구일까? 몽테뉴는 “업적과 행동으로 나 자신을 증명”하는 것은 자기탐구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소재는 “고정된 형태가 없는 ”것으로, 행동으로 발현될 수 없는 “사유”이다. 사유가 글의 소재가 된다는 것을 또 오해할 여지가 있다. 그 사유를 ‘내 생각’이라는 오해. 우리가 생각을 쓴다는 것은 나의 신념, 혹은 물려받은 전통과 같은 것이 아닌가. 행동도 아니고 생각도 아닌, ‘사유’를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왜 자기탐구가 되는가?]
어떤 특별한 자질도, 자기에게 있는 다른 불완전하고 허약한 성질들, 그리고 결국 인간 조건의 허망함까지 동시에 고려하는 자를 우쭐하게 할 수는 없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자기 신(神)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붙들고 늘어진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그리하여 공부를 통해 저 자신을 멸시하기에 이르렀기에, 소크라테스는 ‘현자’라 불릴 만한 유일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누구든 그렇게 자기를 알게 되면, 자기 입으로 담대히 자기를 알리게 하라.(89쪽)
7장 명예포상에 관하여
프랑스에서 귀족의 고유하고 유일한 본질적인 형태는 군사적인 직분이다. 짐작컨대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져 보이고 어떤 자들을 다른 자들보다 유리하게 만든 첫 번째 덕이 바로 용덕이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가장 강하고 용감한 자들이 보다 약한 자들의 지배자가 되어 특별한 지위와 명성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용덕에 이런 언어적인 영예와 위엄이 따라다니게 되었을 것이다. 또는 몹시 호전적인 나라들이 덕들 중에서 자기네에게 가장 익숙한 덕에 가치를 부여하고, 가장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했으리라. 여자들의 정절에 대해 우리가 품은 열렬한 갈망과 열띤 염려 때문에 ‘좋은 여자’. ‘훌륭한 여자’, ‘명예로운 여자’, ‘덕 있는 여자’가 우리에겐 사실상 오직 정숙한 여자만을 의미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치 여자들에게 이 의무만 강제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의무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이, 이 한 가지만 지킨다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듯이 말이다.(95쪽)
8장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관하여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고찰을 덧붙일 수 있는데 그 고찰은 이러합니다. 즉 남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은 그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더 많이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베푼 자가 은혜를 입은 자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작품이 감정을 지녔다고 가정한다면, 작자는 자기 작품을, 그 작품에게서 사랑받을 것보다 더 사랑합니다.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소중히 여기기에, 그리고 존재한다는 것은 움직이고 행동한다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각자는 자기가 한 일을 통해 존재합니다.(98~99쪽)
참되고 절도 있는 애정은 자식들이 보여 주는 바에 따라 그 아이들에 대해 알아 가면서 생기고 커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사랑받을 만하면 본능적 경향과 이성의 보조가 맞으니 진정 아버지다운 정으로 사랑해 줘야 합니다. 그들이 사랑받을 만 하지 못하면 그 역시 판단해 본능에 얽매이지 말고 항상 이성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할 때가 너무 많지요. 우리는 아이들이 완전히 철든 행동을 할 때보다 발을 구르거나 장난질을 하거나 유치한 짓을 할 때 더 감동받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을 심심풀이 삼아,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를 귀여워하듯 사랑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또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장난감을 아낌없이 사주던 사람이, 아이들이 성장해서 필요로 할 땐 몇 푼 되지 않는 것조차 인색하게 굽니다. 사실 우리 자신은 세상에서 멀어지려는 즈음에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 즐기는 것에 질투가 나서 더 그들에게 쫀쫀하고 인색해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더러 빨리 나가라는 듯 바짝 쫓아오는 게 화가 나는 거지요. 그렇지만 그것을 두러워할 양이면 아비가 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사실상 우리 존재와 삶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그들이 존재할 수도 살 수도 없게끔 되어 있는 것이 사물의 질서이니까요.(99~100쪽)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노쇠뿐만 아니라 모든 허약이 인색을 촉진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생기지 못하게 했어야 할 병에 대한 약입니다. 자식에게서 도움이 필요해서 바치는 애정밖에 못 받는다면, 그 아비는 참으로 비참한 아비입니다. 그런 것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요. 덕성과 능력으로 존경받고 선하고 다정한 처사로 사랑받아야지요. 내용이 충실한 질은 타고 남은 재조차 값이 나갑니다.(102쪽)
우리는 하느님을 전능하신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 자식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우습게 여깁니다. 아버지와 친근해질 만한 나이가 된 자식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금하고, 무서워하고 복종하게 만들려는 생각에서 엄격하고 거만하게 대하는 것 또한 부당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광대 짓으로, 자식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지겹게, 더 나쁘게는 우스꽝스럽게 여기게 만듭니다.(108~109쪽)
노년엔 너무 많은 결함이 있고 너무도 무력합니다. 멸시당하기 꼭 알맞은 노년에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식구들의 애정과 사랑입니다. 명령과 두려움은 더 이상 무기가 되지 못합니다. 나는 젊은 시절에 아주 강압적이던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그런대로 건강하게 노년을 보내고는 있었지만, 때리고 물어뜯고 욕질하며 프랑스에서 가장 요란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걱정하고 감시하느라 속을 끓입니다. 그 모든 것이 온 식구가 공모하고 있는 소극(笑劇)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락에서 지하 창고에서, 심지어 그의 지갑에서도 가장 좋은 몫을 다른 자들이 빼먹고 있습니다. 그가 허리 전대에 열쇠들을 자기 눈보다 소중하게 간수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그가 절약하면서 검소한 식사에 만족하고 있는 동안 방탕의 도가니가 된 집안 이 구석 저 구석에선 잔치판, 놀음판이 벌어지고, 돈이 흘러넘치며, 늙은이의 쓸데없는 역정과 노심초사를 조롱하는 대화가 만발합니다. 모두가 그를 경계합니다. 어쩌다 마음 약한 하인이 그를 따르며 헌신할라치면 그 하인은 즉각 그의 의심을 사고 맙니다. 의심이란 늙은이들이 제풀에 걸려들곤 하는 특성이지요. 그는 자기가 식구들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고, 그래서 한 치의 소홀함도 없는 복종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릅니다. 자기 일은 너무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나요.
그 혼자만 아무것도 모른다.
_테렌티우스(109쪽)
남들은 나를 속일지라도, 적어도 나는 내가 그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거나 방지할 능력을 가지려고 골머리를 썩이지는 않습니다. 나는 불안과 동요와 의심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생각이나 결단으로, 내 심정 안에서, 그런 배신 행위들로부터 나 자신을 구합니다. 어떤 이가 당한 일을 들을 때,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즉시 나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 나는 어떤가를 봅니다. 그에 관한 일은 모두 내 일이 됩니다. 그가 겪은 일은 내게 경고가 되어 그 방면에 대해 각성시킵니다. 생각을 밖으로 뻗치는 대신 안으로 돌릴 줄만 안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 해야 할 이야기를, 우리는 매일, 매 시간, 남에 대해 합니다.(112쪽)
“그래서 가여운 그 아이는 내게서 차가운 모습, 성에 차지 않아 하는 것 같은 모습만 봤기 때문에 내가 저를 사랑하지도, 알아주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품고 갔소.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 애에게 품은 그 남다른 사랑을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단 말이오? 그 사랑을 전적으로 즐기고 알았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애가 아니오? 나는 괴로우면서도 억지로 그 부질없는 가면을 고집했소. 그러다가 그 애와 사귀는 즐거움도, 그 애의 애정도 잃고 말았소. 내게서 엄하고 무뚝뚝한 대접밖에 못 받았고, 폭군처럼 구는 모습만 보아왔으니 나에 대해 아주 냉정할 수밖에 없었던 거요.” 저는 이 한탄이 매우 진실하고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뚜렷한 경험으로 알거니와, 친구를 잃어 슬픔에 빠졌을 때, 그에게 해야 할 말을 하나도 잊지 않고 다 했으며, 그래서 서로서로 마음을 속속들이 완벽하게 나누었음을 안다는 사실보다 더 따뜻한 위로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식구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내 속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리고 아주 기꺼이, 누구에게나 그러듯 식구들에게 그들에 관한 나의 의향과 판단을 알려줍니다. 나는 서둘러 나를 밝히고 나를 내어놓습니다. 좋게건 나쁘게건 오해받고 싶지 않으니까요.(113~114쪽)
플라톤에 나오는 입법자와 시민들 사이의 재미나는 대화가 이 대목에 빛나는 예증이 되어 줄 듯싶습니다. 죽음이 가까워 옴을 느끼자 시민들이 말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 것을 우리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단 말이오? 오 신이여, 우리가 아플 때, 우리가 늙었을 때, 우리가 일을 처리할 때, 가솔들이 우리에게 봉사한 공에 따라 우리 마음대로 더 주고 덜 줄 수 없다니 이 무슨 잔인한 법이오!” 이 말에 입버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여보게들, 자네들은 얼마 안 가 죽을 테고, 델포이 신전의 현판에 쓰인 바에 따르면 그대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그대들의 것인지 알기란 쉽지 않소. 법을 만드는 내가 보기엔 그대들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며, 그대들이 누리는 것도 그대들의 것이 아니오. 그대들의 재산과 그대들은 과거에나 미래에나 그대들 가족에게 속한 것이오. 아니 그보다 그대들 가족과 그대들 재산 모두가 국가의 것이오. 그러니 만일 그대들이 늙었을 때, 병들었을 때, 또는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떤 아첨쟁이가 사리에 맞지 않게 부당한 유언을 하게 만든다면 나는 그것을 막을 거요. 반면 나는 국가의 공동 이익과 그대들 가족의 이익을 고려해서 법을 만들 것이며 개개인의 소망은 공동체를 위해 양보하는 것이 옳다는 걸 알게 해 줄 거요. 인간의 숙명이 무르는 곳으로 순순히, 마음 놓고 떠나시오.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공평하게 다루고, 힘닿는 한 전체를 살피면서 그대들이 남기고 가는 재물을 처리하는 것은 나의 일이오.”(117~118쪽)
게다가 우리가 그토록 대단하게 생각하는 본능적인 애저이란 것도 그 뿌리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말 하찮은 푼돈을 주고 우리는 날마다 어미들의 품에서 친자식을 떼어 내고 우리 자식들을 돌보게 합니다. 그 여자들의 친자식들은 우리 아이들은 도저히 맡기고 싶지 않은 다른 허약한 젖어미나 염소에게 맡기게 하고요. 굶겨 죽이는 한이 있어도 친자식에겐 젖을 못 물리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아이에게 전심전력을 다하라고 자기 자식에겐 관심조차 갖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얼마 안 가, 대부분의 여자들이 습관 때문에 친자식보다 남의 아이에게 더 맹렬한 애착을 갖게 되고, 자기 자식보다 남의 아이를 보호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119쪽)
그런데 우리가 낳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자식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또 다른 나’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서 나온 다른 생산물도 자식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혼을 낳은 것, 우리 정신, 우리 마음과 능력으로 생산하는 것은 육체보다 더 고상한 부분의 산물이요, 육체의 생산품보다 더 우리 것이니까요. 이 생산물에게 우리는 아비이자 동시에 어미입니다. 이것들을 만드는 것이 아이 만들기보다 더 힘들고, 또 거기에 무슨 좋은 점이 있을 땐 우리에게 더 큰 영예를 안겨 줍니다. 왜냐하면 다른 자식들의 가치에는 우리 몫보다는 저희 자신의 몫이 훨씬 많고, 우리가 기여한 바는 아주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자에서는 그것이 지닌 모든 아름다움, 모든 우아함과 가치가 다 우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자식보다 훨씬 생생하게 우리를 대리하며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 줍니다.(120~121쪽)
이 모습 이대로의 이 자식에게 내가 주는 것은 우리가 육신의 자식에게 주듯, 순수하게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자식에게 준 얼마 안 되는 자신은 더 이상 내 소관이 아닙니다. 이 책은 이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이제는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내게서 가져가 담아 두고 있을 수도 있어서, 필요할 때면 마치 남에게서 빌리듯 이 책에서 빌려 와야 할 판입니다. 내가 이 책보다 현명할지 몰라도 이 책이 저보다 부유합니다.(124쪽)
10장 책에 관하여
전문적인 대가들이 더 훌륭하고 분명하게 다룬 것을 내가 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순전히 나의 타고난 기능들을 시험(essai)해 보려는 것이지 알게 된 것을 논하려는 게 전혀 아니다. 그러니 누가 내 무식을 간파한대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내 생각들에 대해 나 자신에게도 답하지 못하며 그것들에 전혀 만족하지도 못하는 내가 남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학식을 구하는 사람은 학식 있는 곳에 가서 낚으라고 하라. 내가 가장 내세울 생각이 없는 게 그것이다. 이 에세이들은 나의 변덕스러운 생각이요, 그것들을 통해 내가 하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알게 하려는 것이다.(131쪽)
나는 내 글이 요령부득이어도, 내 사고방식에 허영과 결함이 있어도 그것을 느낄 수 없다고, 또는 나 스스로에게 그것을 제시해서 느낄 능력이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흔히 과오는 우리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판단력의 병은 남이 우리 과오를 드러내 줬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다. 판단력이 없어도 학식이나 진실이 우리 안에 깃들 수 있고, 판단력 또한 학식이나 진리가 없어도 우리 안에 깃들 수 있다. 나아가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내가 아는 한 판단력의 가장 아름답고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이다.(133쪽)
내 계획은 남은 생애를 기분 좋게, 힘들지 않게 넘기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도, 설령 학문을 위해서라도 머리를 쥐어짜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도 말이다. 나는 책에서 소박한 재미를 느끼며 즐겁게 몰두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또는 책을 통해 무슨 공부를 한다쳐도, 거기서 구하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을 알게 해주는 지식, 내게 잘 죽고 잘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줄 지식뿐이다.(1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