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시가 되기 삼사분 전, 살짝 여유 있게 접속한 분들은 운이 좋습니다
정랑샘의 반짝 역사 강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몽테뉴의 시대인 16세기의 프랑스 안팎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번 주 내용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몽테뉴의 독서 및 지식 습득의 배경이었습니다.
476년에 서로마가 멸망하고 약 천 년 뒤인 1453년에 동로마가 멸망합니다.
그러면서 천 년 동안이나 유럽 밖, 터키나 이슬람 문명에서 유지되어오던 그리스 철학이 서유럽으로 재유입되기 시작합니다.
르네상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몽테뉴의 고대 그리스 철학 독서도 이런 사상적 유동의 지평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죠!
몽테뉴를 읽으며 어떻게 이렇게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의 풍성한 사유에 정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좀 풀렸습니다.
지난 주부터 26장 '아이들의 교육에 관하여'가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무려 56쪽!).
몽테뉴는 절친한 집안의 신부인 디안 드 푸아 부인에게 편지 형식으로 이 글을 적었다고 합니다.
이 챕터는 <에세>의 모든 글이 쓰인 후, 초판 서문을 쓰기 직전인 1579년에 쓰였다고 합니다.
다음 주 중에는 다 읽게 되겠네요!
선생은 학생이 무엇이든 체에 받쳐 보게 해야 합니다. 그 무엇도 단순히 권위에 복종해서, 또는 남의 말을 믿고서 받아들이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이 학생의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토아 학파이건 에피쿠로스학파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선생에게, 이런 다양한 사상들을 학생에게 제시하라 하십시오. 그중에서 택할 만하면 택할 것이요, 아니면 계속 의심하겠지요. 바보들이나 늘, 뭐든 확실하고 확고합니다.(281쪽)
벌은 이 꽃 저 꽃에서 꿀을 따 오지만, 그것으로 순전히 제 것인 꿀을 만듭니다. 그 꿀은 이제 백리향도 꽃박하도 아니죠. 그와 마찬가지로 학생은 다른 이에게서 빌려온 조각들을 변형시키고 섞어서 완전히 자기 것인 작품, 즉 자신의 판단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르침, 숙제, 공부의 목표는 오직 자신의 판단력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282쪽)
순전히 책에만 의지한 능력이라니, 가련한 능력이로다!(283쪽)
세상을 두루 접하면 인간을 이해하는 데 놀랄 만한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끼리 엉겨붙고 들러붙어 있어, 시야가 우리네 코 길이로 짧아져 버렸습니다. 어떤 이가 소크라테스에게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라고 대답하지 않고 “세상”이라고 답했습니다. 우리보다 높고도 너른 사고를 지닌 그는 세계를 자기 도시로 품고, 자기 발밑밖에는 보지 않는 우리와 달리 인류 전체에 자신의 앎과 교분과 애정을 주었습니다.(292쪽)
그의 상상력으로는 자기 군주의 지위보다 더 높은 지위를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런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엄청난 결과를 야기하고 편견을 낳는 오류지요. 그러나 그림에서처럼 우리 어머니인 자연을 그 장엄한 모습 전체로 그려 볼 수 있는 사람, 대자연의 얼굴에서 너무도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읽는 사람, 그 안에서 자기를, 아니 자기가 아니라 왕국 전체라도 아주 미세한 붓 끝으로 찍은 자국처럼 알아보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사물을 그 사물이 지닌 정당한 크기에 따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292~293쪽)
이런 것들을 말해 줘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이요, 모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부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용기, 절제, 정의란 무엇인가, 야심과 탐욕, 봉사와 복종, 방종과 자유의 차이는 무엇인가, 참되고 견실한 만족은 어떤 특징으로 알 수 있는가, 어느 정도까지 죽음, 고통, 수치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어떤 고통을, 어떻게 피하거나 견딜 것인가.”(베르길리우스)(294쪽)
우울하고 낙담한 얼굴은 그곳이 철학의 집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298쪽)
철학이 깃든 영혼은 제 건강으로 몸까지 건강하게 만듭니다. 그런 영혼은 자기의 고요와 평안을 밖으로까지 빛나게 하고, 자기의 형태로 외적인 풍모를 빚어내어 결과적으로 우아한 자부심, 활동적이며 경쾌한 몸가짐과 만족스럽고도 양선(良善)한 태도로 무장시키기 마련입니다. 지혜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지속적인 즐거움입니다. 지혜의 상태는 마치 달 위에 있는 것들의 상태와 같습니다. 항상 평온하지요.(299쪽)
덕이 가장 총애하는 사람, 소크라테스는 힘이 드는 것은 기꺼이 피하고 덕의 자연스럽고도 편안한 길에 자기를 맡겨 두었습니다. 덕은 인간적인 쾌락의 유모입니다. 덕은 인간적인 쾌락을 정당화함으로써 쾌락을 확실하고 순수하게 만듭니다. 쾌락을 조절함으로써, 쾌락이 지닌 싱싱함과 풍미를 유지시킵니다. 덕은 자기가 거부하는 쾌락을 잘라내 버림으로써, 남겨 준 쾌락에 더 예민해지게 만듭니다. 게다가 덕은 천성이 원하는 쾌락은 무엇이나 풍성하게, 물리도록까지는 아니더라도(술꾼을 만취 전에 멈추게 하고, 포식가를 소화불량 전에 멈추게 하고, 호색가를 대머리가 되기 전에 멈추게 하는 섭생을 쾌락의 적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포만할 때까지 누리게 해 주지요. 보편적인 복을 누리지 못할 경우, 덕은 복에 초연해지거나 복 없이 지내며, 여느 복처럼 덧없이 굴러다니는 것이 아닌 자기만의 다른 복을 만들어 가집니다. 덕은 부유하고, 권세 있고, 박식할 줄도 알며, 사향내 나는 침대에서 잠잘 줄도 압니다. 덕은 삶을 사랑합니다. 아름다움을, 영광을, 건강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덕의 고유하고 특별한 기능은 그런 복을 절도 있게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요, 복을 잃어도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든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한 과업으로, 덕의 이런 기능 없이는 인생의 모든 과정이 변질되고 혼탁해지고 일그러지니, 저 암초들과 가시덤불과 괴물들은 그런 인생에나 결부시켜 마땅합니다.(301~302쪽)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 버린 후에야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303쪽)
학교는 정말 청춘을 가두는 감옥입니다. 방탕해지기 전에 벌함으로써 청춘을 방탕해지게 만듭니다. 수업할 때 한번 가 보세요. 체벌을 받는 아이와 자기 분노에 취한 선생들의 고함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처럼 여리고 겁먹은 영혼들을, 손에는 매를 들고 벌겋게 달아오른 무서운 얼굴로 이끌겠다니, 이것이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방법이겠습니까? 부당하고 해로운 관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퀸틸리아누스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이런 강압적인 권위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특히 벌 주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학교 교실은 피 묻은 버들가지 토막이 널려 있는 것보다는 꽃들과 나뭇잎들이 흩뿌려져 있는 것이 얼마나 더 온당한지요! 나라면 철학자 스페우시푸스가 자기 학교에서 그랬듯이, 학교에 기쁨, 환희 그리고 꽃의 여신과 우미(優美)의 삼미신을 그려 붙이게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유익을 얻는 곳은 즐거워서 깡총거리는 곳이기도 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유익한 음식에는 설탕을 섞고, 해로운 것에는 담즙을 섞어야 합니다.(307~308쪽)
나는 이 점에서 교육의 효과를 봐서, 얼마간 노력이 따라야 했던 것은 사실이나, 맥주를 제외하고 사람이 먹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308쪽)
맥주를 제외하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게되었다는 몽테뉴의 감각이 너무 낯설었어요. 그에게 맥주가 왜 끝내 먹지 못할 음식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