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라르와 보편문제
건화샘이 건넨 말처럼 모르는 채로, 모르는 것을 자각하면서 〈중세철학사〉를 읽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마음임에도 후기를 쓰려니 막막하네요.
맑은 정신으로 읽으면 좀 알게되려나 싶어 새벽에 〈중세철학사〉의 4장과 5장을 다시 읽었습니다. ‘아벨라르와 보편문제’라는 제목의 5장에서 아벨라르가 말하는 이 ‘보편’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접근해얄지 알고 싶었지요. 5장에 앞선 내용을 보면 이해가 될까 싶어 4장을 읽었지만 새벽에 일어나는 정성이 곧바로 졸음이 되어버리네요. 교재 외에 다른 책을 더 읽었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남지만 후기 쓰기를 더 지체할 수는 없네요.
‘아벨라르’라는 ‘인간’(?)
세미나 전반과 후미에 ‘아벨라르’가 ‘인간’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을 주고 받았는데요. 이 ‘인간’적이라는 느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39살에 17(8)살의 제자, 엘로이즈와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엘로이즈의 삼촌에 의해 거세를 당한 후 수도원에 은거하는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요?
이런 일이 있기 전에 많은 학생들이 도시를 버리고 시골에 있는 그를 찾아와 배움을 구할 정도로 그는 꽤 이름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로이즈와의 사랑을 떳떳하게 생각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추문으로 떠돕니다. 자크 르 고프의 『중세의 지식인들』을 보면 아벨라르가 살았던 12세기의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시각에서 해방됩니다. ‘성모마리아에 대한 숭배가 발흥’하는 시대더군요. 지식인들 사이에 결혼이 그리 긍정적인 위상으로 발휘되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면 교수로서의 경력에 지장이 생기고, 학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두려워’(자크 르 고프 『중세의 지식인들』, 최애리, 동문선, P79)합니다. 자신의 아이를 밴 엘로이즈를 수녀원에 피신시키지만 이것을 아벨라르의 배신으로 오해한 삼촌에 의해 그는 거세당합니다. 저에게 ‘인간’이란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묻게하는 부분은 이후의 행보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지나자 아벨라르는 신학적 저작을 저술하기 시작했’(J.R.와인버그 『중세철학사』, 강영계, 민음사, P78)다는 대목입니다. 사랑, 추문, 거세, 은거. 아벨라르의 삶에서는 이 낱말들 사이에 상상하기 힘든 심연이 존재하네요. 이 심연 속에서 자신을 구하는 것은 글쓰기였을까요? 거대한 삶의 구비를 돌아 하는 일이 저작활동이라니. 그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아니 제 질문은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것일까죠. 고통과 배신감을 준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남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써서 후학을 길러냅니다. 자크 르 고프는 12세기 지식인의 전형으로 아벨라르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학자이자 교수였던 지식인’이라는 아벨라르라는 ‘인간’에게서 관대한 애정을 발견합니다. 더불어 인간 삶에 ‘글쓰기’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보편은 왜 중요한 문제일까?
세미나에서 나눈 질문 중 하나는 아벨라르는 왜 보편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는가,입니다.
그의 시대 속에서 바라보자면 3가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되었는데요. 간단히 소개하면 첫째는 교권과 제권으로 나뉜 시대에 교회가 세속의 권리를 획득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교황과 여러 중소(나라)의 형태를 띠고 있던 영주국(공국)과의 관계지요. 이렇게 잘게 쪼개진 정치지형을 교회는 통합하고 싶었고 그런 의미에서 통일된 감각으로서 보편이 중요하게 대두되었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독교 교리와 관련되는데요. 원죄를 진 아담과 인류와의 관계에서 이 보편의 개념이 필요했지요. 한 개체일뿐인 아담의 죄를 인류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해야 차원에서 보편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을 것이라는 거죠.
아벨라르가 살았던 중세시대에 보편이 중요했던 맥락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보편의 문제는 중세 이전에도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었고, 역시 우리에게도 보편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보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작동할까요?
세미나에서 보편은 범주와 관련해서 작동한다고 이야기되었는데요. 범주에 의지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명명하지요. 낱낱이 흩어진 개체들 사이에 유사 또는 동일한 것이 있다고 보고 이름짓게 되는데요. 이 묶여진 것들 사이에 있다고 가정하는 이 유사함을 우리는 ‘보편’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 개체들간의 유사성이라고 규정된 것은 경계로 작동하고, 이 경계가 범주가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범주는 우리 인식의 기준으로 작동하게 되지요. 이 범주는 범주 안에 들지 않는 ‘다른 것’을 만들어냅니다. 이 보편성을 통해 우리는 ‘공통’이라는 감각을 만들어내지요.
우리는 인간 자신에게 보편을 규정할 권리를 주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있는데요. 그러면서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생각하지 않지요.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이란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인데요. 특별한 위치에 놓인 인간이라는 보편성이 자의적으로 추출과 배제를 할 수 있고 억압과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미나에서 보편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이라는 규정 안의 비정상성, 인간의 삶의 영위를 위해 소모되는 위치에 놓인 동식물, 광물, 무기물 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벨라르의 보편은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요. 본질이 사물의 외부에 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재론에 대비해서 아벨라르는 보편을 ‘단어나 또는 의미있는 말이나 교훈’으로 이야기합니다. 보편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 속에서 개별적인 사물들의 유사성에 기인한 ‘하나의 의미있는 말이나 개념’이란 것이죠. 몇몇 사물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은 개체들에 내재한 공통된 본질에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체들 각자는 다른 개체들과 공통된 본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유한 자체로 인하여 상호 일치하거나 또는 서로 유사’할 따름입니다. 개체들 각자는 서로를 유사하게 만드는 개체들과 어떤 다른 것도 서로 포함하지 않습니다. 각자는 고유할 따름이죠. 보편은 이 각자의 고유성에서 기인한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개념입니다. 즉 개별 사물들이 실재할 뿐, 보편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죠. 보편이란 추상적인 개념이자, 이름입니다. 이와 같이 보편을 바라보는 것을 유명론이라고 하는데요. 중세철학사에서 실재론과 유명론은 중요한 논쟁이었다고 하네요.
아벨라르가 말한 보편 개념을 얼렁뚱땅 정리합니다. 역시 가려웠던 아벨라르의 보편의 문제는 제대로 긁지 못하고 후기를 마무리합니다. 한 학인이 『중세철학사』를 공부하다보니 밑도끝도 없이 확장돼서 공부하고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진다고 했는데요. 그 학인 말대로 무궁무진한 세상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를 하면 이런 후기를 쓸 수 있군요....일어나는 시간을 좀 당겨봐야겠습니다. 일요일 아침은 저에게 거의 절집에 가는 루틴이 거의 30년 정도였는데, 요즘 영 날라니가 되었어요. 대신 시간여행을 하는 중입니다. 중세라는 절로 가보니 그 또한 희안하고 경건해지네요. ㅎㅎ '보편성을 통해 우리는 ‘공통’이라는 감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 보편은 범주를 가능하게 해주는 시공간차원의 구조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이 개인적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보편이라는 주어진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로 저는 이해합니다만. 그리고 중세의 보편과 문득 단절된 근대란 저에게 이중성의 감각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체이자 객체인 시대로. 글 중에 이 문장이 인상 깊습니다.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이란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한 세상' 그렇다면 인간은 그 특권으로 무엇을 하고 있을까...저는 아벨라르가 유명론자였다는 것과 푸코도 유명론자에 계열에 들어간다는 것이 새삼 깊은 흥미로 다가옵니다. 공부거리가 많아지네요. 후기 잘 읽고 갑니다.
경희샘 새벽에 일어나 <중세철학사>를 읽고 계셨군요 ㅎㅎ 그래서인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샘의 질문과 고민이 쫀쫀하게 들러붙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후기를 읽다 보니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보통은 그냥 퉁 치고 넘어가는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보편'과 '개별'의 문제도 그렇죠. 우리는 개별적인 것들을 이러저러한 범주로 묶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죠. 그런데 또 우리는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을 계속 마주하지 않을 수 없죠. 이런 상황 속에서 더 참되고 궁극적인 범주를 찾으려고 노력하느냐 아니면 범주들을 의문시하며 갈 것이냐에 따라서 실재론과 유명론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아벨라르는 유명론자이기는 하나 보편을 완전한 추상이라고 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사물들의 유사성으로부터 오성에 의해 추상된 것이 보편이라고 말했으니, 아벨라르가 말하는 보편은 어쨌든 사물들 자체의 유사성을 참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가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그렇네요. 건화샘. 아벨라르를 유명론자라고 칭할 수 있으나 사물의 유사섬을 참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을 완전한 추상이나 가상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네요. 유명론이라는 범주에 그를 포함시키고 그에 맞게 재단하려다보니... 정작 제자신이 앞과 뒤가 모순되는 말을 쓰고 있었네요. 무의식 중에 제 배우는 습관,범주로 환원해서 단정하고 앎을 확정하려는 제 버릇이 나와버렸어요. 고마워요. 건화샘. 덕분에 잘 배우고 쉬어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