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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을 읽자 1/ 5주차 후기 / 정연희
제 3장 의식상태들의 조직화에 관하여: 자유
자유는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까 합니다. 5주차에서는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베르그손의 자유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많지 않은가'라는 지안샘의 이야기로 시작해 다양한 질문과 흥미진지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1. '각각의 감정들은 영혼 전체를 대표하며, 영혼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는게 어떤 의미일까? 2.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영혼 전체, 인격 전체로부터 나올 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아의 심층부, '근본적 자아에 다가가려는 경향을 가질수록 더 자유로워진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3. 하부 자아란 무엇인가 총체성을 가진 어떤 자아, 그리고 그런 자아에 의해서 어떤 행동이 나올 때 그것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라는건가? 4. '자유롭다'가 '우리의 행위가 우리 인격 전체로부터 나올 때'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게 하부 자아와 연결되는 부분인가? 5. 베르그손은 [자유는 행위 자체의 어떤 뉘앙스나 질에서 찾아야 하며, 그 행위와 그것 아닌것(오직 이 행위이며 다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결정론의 경우), 또는 그것일 수 있었던 것(자유론의 경우) 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자유는 결국 '질'의 문제가 아닐까? 6. 자유와 행동의 문제, 연상주의 이론과 반사적 행동의식이나 자동,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은 자동기계처럼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등등 여러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중 제가 이해되는 부분이 많지 않은 관계로 이야기한 내용 중에 몇 부분만 간추려 정리해보겠습니다.
자아는 사실 그 표면으로 외부세계에 접촉한다. (이 부분을 2장에서 참고해 보면 자아의 표면은 공간과 접하는 곳이며, 동질적 시간은 바로 거기서 성립한다... 우리의 자아는 이미 밖에 나가 있으며, 그 표면에서 물질 세계, 즉 외부대상을 만지고 있다. 즉, 거기에 접해 있다. 그렇지 않고는 자아의 〈초월의 문제〉를 해결할 도리가 없다.(160)라고 합니다.) 그 표면은 사물의 자국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자아는 병렬된 것으로 지각한 항들을 인접성에 의해 연상할 것이다. (207)
자아의 표면는 외부 대상에 접해 있고 지각한 것들을 인접성에 의해 연상합니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를 파고들어가면 의식의 상태들은 병치되기를 멈추고 상호침투하며 전체가 융합됩니다. ('전체가 융합'된다는 것을 베르그손은 '각각이 다른 모든 것들의 색채로 물든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들 각자의 감정은 나름의 방식이 있고 그 감정은 인격 전체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언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동일한 말로 그런 상태를 지시함으로써 수천의 감정들을 객관적이며 비개성적인 면만을 고정합니다. 그러나 한 운동체가 두 위치 사이에 점들을 무수히 끼워 넣어도 지나간 공간을 결코 메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느끼는 것을 완전히 말로서 번역할 수 없습니다. 즉 사유는 언어와 통약 불가능한 것으로 남습니다.(208)
근본적 자아의 한가운데에 그것을 부단히 침범하는 어떤 기생적 자아가 형성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살며, 진정한 자유를 알지도 못하고 죽는다. 즉,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위에서 주입한 생각이나 관습에 따라 산다.(210~211) 그러나 주위에서 일러준 것이므로 암시가 되지만, 자기가 진심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거기에 설득된 것이다. 그때 암시는 자기의 일부가 된다. 열정은 갑작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전 역사가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면, 더 이상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지배받지는 않을 것이다. (숙명이란 자유가 아니라 필연이다.)
자유로운 결정이 나오는 것은 영혼 전체에서이다.(212) 행위는 그것이 연결된 동적인 연쇄가 근본적 자아와 더욱 같아지려는 경향을 가질수록 그만큼 더 자유로워지지만,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에게조차도 자유로운 행위는 드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공간을 굴절되게 자신을 보고, 의식 상태들은 말로 응고되며, 서로로부터 분리되며 따라서 고정된 심리적 사실들의 외부 껍질로 덮혀있기 때문이다.(212)
우리는 대부분 습관에 의해 행동하며, 어떤 것으로부터 받는 인상은 관념으로 이어져 자동기계처럼 반응하게 됩니다. 어떤 감정들, 관념들이 기억 속에서 응고된 덕분에 외부로부터의 인상들이 의식적이며 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많은 측면에서 반사적 행동과 닮은 운동, 그러니까 거의 기계적 행위입니다. 그 감정들은 점점 우리의 개인적 감정들을 덮는 두꺼운 껍질을 형성할 것이며,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반성을 해 보고 나서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거나, 행동하려는 순간 내가 원하는대로 방향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표면으로 올라오는 하부의 자아입니다. 자아의 하부에서 우리가 누르고 싶어하지 않았던 감정과 관념들이 증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 반성해보면, 즉, 우리의 기억을 조심스레 모아보면 ('잘'과 '조심스레'라는 표현이 『물질과 기억』의 원뿔도식에서 주의 깊은 식별, 숙고, 직관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와 관련해 샘들의 여러 이야기가 나왔었는 것 같네요.) 우리 스스로 형성한 관념들과 우리 스스로 그 감정들을 살았으나, 그것들이 표면에 올라올 때마다 그것들을 우리 존재의 어두운 심층으로 밀어냈음을 알 수 있(214)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어떤 결정을 변경하는 경우 우리는 그 변경이 그에 앞선 외견적 상황에 의해 설명하려는 헛된 시도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이유로 결심하게 되었는가를 알고 싶어하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아마도 심지어는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것이 가장 좋은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이루어진 행동은 더 이상 표면적이고 거의 우리 밖에 있으며, 구별되고 표현하기 쉬운 이런저런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은 가장 내밀한 우리의 감정과 사유, 열망 전체에, 우리의 모든 과거 경험의 등가물인 삶에 대한 그 특유의 사고방식, 행복과 명예에 대한 우리의 개성적 관념에 대응(215)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르그손은 우리가 이유없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생명과 무관한 상황에서 예를 찾으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합니다.
중대한 상황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진짜 누구인지를 밝혀야 할 때) 우리는, 동기라 부르기로 합의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합니다. 베르그손은 분명한 이유를 밝히려 할수록 우리는 더 깊은 자유로운 것에서 멀어지며, 또한 중대한 감정들이나 영혼의 깊은 상태들을 서로서로 구별하며 자아에 대한 기계론적 견해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결정론이 내세우는 인과율에 따르지 않고 어떻게 자아가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진실은, 첫번째 감정을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두번째 감정이 올 때는 자아가 이미 조금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숙고의 모든 순간에 자아는 바뀌며 따라서 그 자아는 또한 그를 흔드는 두 감정을 바꿉니다. 그리하여 상호 침투하고 서로를 보강하며 자연스러운 진행에 의해 자유로운 행위에 도달할 상태들의 동적인 연쇄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결정론자들은 막연히 상징적 표상이 필요하다는 것[생각]에 복종하여, 자아 자체와 함께 자아를 나누는 대립되는 감정들을 말로 지시할 것'입니다. 이로서 결정론자들이 미리 스스로에게 선고한 기계론적 상징적 표상에 다른 가치를 가지며, 내적인 역동론을 사실로 제시하는 주의 깊은 의식의 증언에 대항하여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자유롭다'를 작품과 예술가 사이에서 때로 발견되는 그런 정의할 수 없는 유사성(217)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인격 전체로부터 나올 때, 행위가 인격 전체를 표현할 때,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이부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요, 베르그손은 자유[옹호]론이든 결정론이든 정도차의 문제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유로운 행위의 정의를 도입하는데 있어서 외적인 영향과 언어의 선입견을 제거하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속에 대해 분명하게 관계되는 한에서 결정론과 자유론자들의 근본적 잘못과 착각을 포착하고자 합니다.
시간은 공간적인가?
베르그손은 지도 위에 그려진 길을 걷는다는 공간적 표상과 시간에 대해 말하면서, 자유의지의 지지자와 결정론자들이 잊고 있는게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지도 위에 그려진 길을 따라 갈 때는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 보거나 군데군데 나뉘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방해받지 않습니다.(228) 그러나 시간은 다시 지나갈 수 있는 선이 아닙니다. 일단 흐르고 난 다음 공간적으로 표상합니다. 그 선은 흐르고 있는 시간이 아니라 흘러간 시간을 상징한다는 것은 합의된 사항으로 남습니다.
결정론자가 〈행위는 일단 수행되었으면 수행된 것이다〉, 반대자들은 〈행위는 수행되기 전에는 아직 수행된 것이 아니다〉라고 할때, 이에 대해 베르그손은 '자유의 문제를 아직 건드리지도 않은 채 끝나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행위 자체의 어떤 뉘앙스나 질에서 찾아야 하며, 그 행위와 그것 아닌 것(결정론이 경우), 또는 그것일 수 있는 것(자유론의 경우)과의 관계에서 찾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불분명한 점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숙고를 공간에서 왔다갔다 하는 형태로 표상하는 데에서 오는데, [사실] 숙고는 자아와 그 동기들 자체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자들처럼 계속적 생성 속에 있는 동적 진행으로 성립한다.(229)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난희샘이 낭송해 주신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옮겨 봅니다.
"나는 가령 창문을 열려고 몸을 일으킨다.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멍하니 서 있게 된다. —――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보다 간단한 것은 없다. 당신은 두 개의 관념, 즉 도달해야 할 목적과 완수해야 할 운동의 관념을 연합했고, 그 관념들 중 하나는 사라지고 오직 운동의 표상만 남아 있다고.—――그러나 다시 앉지 않는다. 막연하게 뭔가 해야 할 것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즉, 목적의 관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내가 멍하니 서 있는 것은 따라서 아무렇게나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완수해야 할 행위가 미리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내가 머무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위치에 머물면서 그것을 탐색하거나 또는 내적으로 느끼기만 하면 잠시 사라졌던 그 관념을 재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윤곽이 그려진 운동과 자리잡고 있는 위치의 내적 심상에 그 관념이 특별한 색채를 분명히 전달했어야만 하고, 도달해야 할 목적이 달랐다면 그 색채는 아마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204)
"뭐라고 빨리 단정짓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언어를 빌려오지 않고, 내가 멍하니 서 있는, 그런데 아무렇게나 서 있는게 아닌, 그 머뭇거리면서 자신의 언어를 쓰는 그 만큼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유없이 선택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은 어떤 이유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기 위해 원하는 것이다.(201) "자기가 진정 뭘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다른것을 원하는 것이다."라는 난희쌤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자유에 관한 우리의 흥미로운 관심은 '시간은 공간에 의해 충분히 표상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환원되는 3장 마지막 '실재 지속과 인과성'으로 이어집니다. 다음주 마지막 시간을 기대하며, 이해가 부족한 상태로 후기를 쓰다보니 오류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늘 절감하는 거지만 책을 충실히 읽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의 자유는 우리가 상식으로 갖고 있는 자유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인 것 같아요. 우리는 ~로부터 자유를 찾지만, 베르그손은 시간이 공간에 쉽게 지배 받는 자아, 표면의 자아와 인간의 심층을 이루는 근원적 자아와의 화해를 촉구하는 그런 자유를 말하는 듯해요. 왜냐하면 "시간은 공간인가?"이런 질문만 보더라도 우리의 삶 대부분이 공간에 놓여짐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것을 기계적이고 수학적인관계속에서 파악하는 경향때문이겠죠. 아무튼 공간에서 시간은 질적으로 지속의 시간일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오늘 토론할 마지막 3장에서 지속의 시간을 사는, 체험하는 시간을 다루고 있는 듯해요. 여니 샘의 후 기 덕분에 지난 세미나를 다시 떠올려보며 자유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후기 잘읽고 갑니다. 이따 뵈요^^
어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베르그손의 자유 개념은 깊은 의식의 상태, 원뿔 밑면의 상태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네요. 이번 주 자유에 대한 묘사에서 나온 '구체적 자아'라는 말도 그렇고, "순수한 지속에 다시 자리잡는 것"이 자유라고 말한 부분도 그렇고요... 계속 생각해보게 되네요.
후기 감사해요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