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6주를 읽었네요!
아직 몽테뉴의 사유와 닮아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슬슬 아침형 인간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매일 여섯시 반이 넘어가면 슬쩍 눈이 떠지더라고요. ㅎㅎ 밤 12시가 넘으면 몰려오는 졸음을 어떻게 하지 못하게 되기도 하구요!
이번주에도 마음에 콕 박히는 문구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특히 현학적인 단어나 유려한 논리가 아니라, 파리의 시장터에서 쓰이는 말들만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구절이 와 닿았습니다.
몽테뉴의 글쓰기 실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럼 이번주 필사 보시겠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는 자기 군주와 웃고, 장난치고, 방탕한 짓도 해야 합니다. 나는 그가 방탕에서조차 자기 동료들보다 기운차고 억세기를 바라며, 힘이 없거나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할 생각이 없어서 악행에 끌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악행을 원치 않는 것과 할 줄 모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세네카)(309쪽)
우리의 아이는 배운 것을 읊조리기보다는 몸으로 행해야 합니다. 배운 것을 행동으로 복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계획을 세울 때 사려 깊은지, 행동거지에 선의와 공정함이 있는지, 말할 때 판단력과 우아함이 있는지, 병 중에도 원기가 있는지, 내기를 할 때 신중한지, 쾌락을 즐김에 절제가 있는지, 육류이건 생선이건 포도주 또는 물이건 아이의 입맛이 가리는 건 없는지, 제 물건들을 관리하는데 질서가 있는지, “자기가 받은 교육을 자랑거리가 아니라 자기 삶의 규율로 삼는 사람, 자기 자신에게 복종할 줄 알고,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키케로)인지 봐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대로 보여 주는 진정한 거울은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311쪽)
“자기 마음에 드는 말을 집어넣기 위해, 다룰 생각이 없던 주제로 들어가는 자도 있다.”(세네카) 나는 훨씬 기꺼이 훌륭한 문장들을 내 논지에 맞게 비틀어 씁니다. 그것들을 빌려 오려고 내 논지의 가닥을 비틀기보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말이 봉사하고 따라와야지요.(317쪽)
옷차림에서 어떤 별나고 괴상한 방식으로 주목을 받으려는 것이 째째한 짓거리이든, 언행에서도 새로운 표현이나 잘 모르는 낱말을 추구하는 것은 유치하고 현학적인 야망에서 비롯됩니다. 나는 파리의 시장 바닥에서 쓰이는 말들만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318쪽)
사람들이 내게 바라는 것이 그런 과한 선행뿐이라는 것을 호의로 받아들여야겠지요. 하지만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훨신 엄격하게,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요구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내가 과한 선행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은 행위에 담긴 선의와 내가 마땅히 받을 만한 감사를 지워 버리는 것이니까요. 내가 그런 선행의 혜택을 입은 바가 전혀 없음을 생각하면 내가 자발적으로 내 손으로 베푸는 선행은 더 무게가 나갈 텐데 말입니다. 내 재산이 내 것이면 내 것일수록 나는 더 자유롭게 쓸 수 있습니다. 아무튼 내가 내 행위를 요란하게 치장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단번에 그런 비난들을 날려 버렸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르쳐 줄 수 있었겠지요. 그들이 화가 난 것은 내가 충분히 베풀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많이 베풀지 않아서라는 것을.(325쪽)
우리는 대자연의 저 무한한 능력을 더 깊이 존경하고, 우리의 무지와 연약함을 더 깊이 의식하며 판단해야 한다. 그럴 리 없을 것 같은 일인데도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그렇다고 증언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납득할 수 없다면 적어도 판단을 보류해 두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가능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자기가 아노라 주장하는 섣부른 오만함이기 때문이다. 섣불리 무엇을 믿지도 않고 아니라고 쉽사리 내치지도 않으면서 불가능과 생소함의 차이를 잘 이해한다면, 자연이 운행해 가는 질서에 거스르는 것과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거스르는 것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킬론이 가르치는 저 ‘그 무엇도 과도하지 않게’라는 규칙을 지키는 셈이 될 것이다.(331쪽)
오만과 호기심은 우리 마음의 두 가지 재앙이다. 후자는 우리에게 도처에 코를 내밀게 하고, 전자는 그 무엇도 미해결이나 미결정의 상태로 두지 못하게 한다.(334쪽)
28장 우정에 관하여
자연은 무엇보다 서로 어울려 살도록 우리를 준비시킨 것 간다. 훌륭한 입법가들은 정의보다 우정을 더 배려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런데 어울려 살기의 정점이 바로 우정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쾌락이나 이익, 공적이거나 개인적인 필요가 만들어 내고 키우는 모든 사귐은 우정에 우정 자체가 아닌 이유, 다른 목적과 이득을 섞느니만큼 덜 아름답고 덜 고상하며 우애도 덜 깊기 때문이다.(337쪽)
만일 내가 말하고 있는 우정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무엇을 준다면, 자기 자기에게 베푼 그 사람이 은혜를 입은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잘하려는 열망이 다른 무엇보다 크므로 그럴 동기와 기회를 준 사람이 아량을 베푼 셈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가장 열망하는 바를 친구가 자기에게 하도록 하여 기쁘게 해 줌으로써 말이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돈이 궁하면 친구에게 ‘달라’고 하지 않고 ‘돌려 달라’고 말하곤 했다.(348쪽)
30장 중용에 관하여
우리가 만지면 감염이라도 되는지, 우리는 그 자체로는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주물러서 부패시킨다. 우리가 너무 사납고 난폭한 욕망으로 덥석 달려들어 움켜쥐면, 덕조차 악덕이 된다. 지나침이 있다면 더 이상 덕이 아니니 지나침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말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다.
“덕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에서조차 너무 멀리 가면, 현자도 미치광이라 불릴 것이요, 정의로운 자도 부당한 자라 불릴 것이다.”(호라티우스)(358쪽)
사람은 덕도 지나치게 사랑할 수 있고, 정의로운 행위에서도 과하게 행동할 수 있다.(358쪽)
인간의 지혜는 우리를 위해 부지런히, 고통을 색칠하고 단장해서 그것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려고 술책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어리석게도 우리에게 속한 쾌락의 가짓수의 달콤함을 줄이는 데도 재간을 부린다. 내가 만일 철학 학파의 권위자였다면, 다른 길, 보다 자연스러운, 고로 참되고 편하고 거룩하다고 할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길에 한계를 둘 수 있을 만큼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363쪽)
31장 식인종에 관하여
우리가 배보다 눈이 더 큰 것은 아닌지, 능력보다 호기심이 더 많은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우리는 모든 것을 껴안으려 하지만 가슴에 안기는 것은 바람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껴안으려 하지만 가슴에 안기는 것은 바람뿐이다.(367쪽)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인공적으로 변질시키고 평상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만든 과실들이야말로 오히려 야만적이라고 불러야 할 일이 아닐까. (...) 우리의 부패한 취향을 만족시키려고 적당히 다듬느라 퇴화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372쪽)
파리의 시장터에서 쓰이는 말들로만 쓰고 싶다라... 민호샘이 현학적인 말이나 유려한 논리를 탐하는 말에 이 말들을 대비시키니 큰 울림을 주네요. 하지만 이 현학적이라는 말들이나 유려한 논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처지라 지금당장은 그것들이 탐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