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중세철학사』 6장 ‘중세 이슬람철학’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중세 이슬람 세계는 풍요롭고 독창적인 지적 유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양 중세 지성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죠. 우선 이슬람은 서양 고대의 지식을 서양 중세에 역수출했습니다.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달아난 이단들이나 유대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에우클레이데스, 프톨레마이오스,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등의 저작을 이슬람 세계에 전파했고, 이슬람은 이것들을 폭넓게 받아들였고 12세기에 이르러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유럽에 전파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이슬람의 수학, 의학, 식물학, 농학, 연금술 등등도 서방 세계로 수입되었다고 하네요(자크 르 고프, 『중세의 지식인들』, 동문선, 50~53쪽).
이슬람 철학의 중요한 논쟁 중 하나는 ‘인과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슬람은 기독교보다도 신의 유일성에 대해 더 확고한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슬람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같은 신의 위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슬림들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알라 안에 있고, 세계는 알라의 창조 과정 그 자체입니다. 이런 관점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알 가잘리는 “신은 유일하게 참다운 원인이고 신 이외의 다른 사물들에 있어서의 소위 분명한 인과관계는 실제로 신의 직접적인 행위로부터 연유한다.”(124쪽)라고 주장합니다. 바람이 부는 것도, 불과 솜이 만날 때 연소작용이 일어나는 것도,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신의 직접적인 행위로부터 비롯됩니다. 알 아사리는 “사실 인간의 의지는 신의 창조이며, 인간을 위하여 신성하게 창조된 선택을 인간이 받아들이게끔 하는 인간의 전유권만은 인간의 힘 안에 있다.”(101쪽)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고, 인간에게는 단지 신에 창조에 의해 주어진 선택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만이 있다는 것이죠.
인과관계에 대한 가잘리의 극단적인 비판은 반(反)지성주의적으로 보입니다. 만약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알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인과의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우연에 맡겨지고, 우리는 그 앞에서 단지 우리보다 더 크고 강력하고 초월적인 존재를 숭배하고 그의 선함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대한 거부는, 우리의 경험이나 습성으로부터 비롯된 인과적 설명에 세계를 가두려는 관점과 싸우는 것 같습니다. 알 킨디는 “요소들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모든 것들은 제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천체적 조화의 결과들”(104쪽)이라고 말합니다. 즉 모든 것은 우주 전체와 더불어 그것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현상의 인과를 설정한다는 건 가능한 일일까요?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설명방식을 버릴 때 사태의 진상에 더 가까워지게 되는 건 아닐까요?
알 가잘리의 공격에 대해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는 인과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보이는 것 너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말로 응수합니다. 이븐 루시드가 보기에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는 신을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인과적 추론을 통해서, 보이는 것들의 원인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통찰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철학과 학문의 부정이고, 이는 곧 초월자에 대한 부정입니다. 저희는 토론 중에 이븐 루시드와 알 가잘리의 관점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둘 모두 우리가 개체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바를 넘어서고자 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한 쪽은 자기포기적인 신앙을 통해, 다른 쪽은 지적인 도약을 통해 우리가 경험을 조건 짓는 근본적인 원인의 차원에 대한 통찰에 이르고자 하는 듯합니다.
고통도 죽음도 신의 창조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나와 남이 모두 신이 만들어낸 피조물로서 동일한 구성성분을 나눠 갖고 있다면 어떨까요? 잘은 모르지만 ‘신’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에 일방적으로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줄 것 같습니다. 눈앞의 이해관계나 즉각적인 정념의 작동에 지배되지 않을 수 있는 힘. 이것이 중세 사람들에게 신앙이 의미하는 바의 한 측면이었을 것 같습니다.
'인과의 필연성'이 경험과 습성을 인과로 삼는 습속을 경계하는 것이라는 건화샘 말이 새롭네요. 인과와는 다른 차원의 '조화'로 존재를 설명할 때 “요소들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모든 것들은 제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천체적 조화의 결과들”이라고 했는데, 이 말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들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존재의의를 갖는 것으로서 출현하네요. 지금 살아가는 우리에게 타자들과 관계에서 요청되는 감각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