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베르그손 읽기1> 세미나의 마지막 후기를 맡게 되었네요. 부담스럽고 떨리고, 그렇습니다. 어렵고 이해가 안되는 게 많아서, 반장 샘께 천천히 글을 올리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얻은 귀한 시간을 그다지 잘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때문에 아는 것은 전혀 없는데도, 잘 해보리라는 터무니 없는 마음이 일어나는 걸 바라보면서 그저 몇 자 끙끙거려 봅니다.
저는 『물질과 기억』으로 베르그손을 처음 만났었는데요. 그가 던지는 '우리는 시간을 시간으로서 사유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해 충격에 가까운 경험을 했었습니다. 이번에 저희들이 함께 공부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시론』)은 그의 최초의 저작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그의 시간에 관한 탐구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시간의 공간화와 지속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의 점유인 공간과는 달리, 시간은 눈에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알까요? 시계가 없던 예전에는 해가 뜨고 지는 자연의 변화나,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과 손목의 맥박을 기준으로 사용했겠지만, 현대의 우리는 '시계를 보고' 시간을 압니다. 그런데 시간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시간을 안다는 것일까요? 우리가 책을 읽을 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1시간이 지났습니다. 이때 '벌써 1시간이나 지났네', '이제 겨우 1시간이네'와 같은 말을 종종 합니다. 여기서 '벌써'와 '겨우'는 내가 심리적으로 느낀 흐름으로서의 시간을, 시계의 바늘이 특정한 위치에 와서 머무는(가리키는) 것에 대해, 1시간이라는 시간의 양으로 환원하여 말하는 언어 표현입니다. 내가 실제적으로 경험한 느낌보다 기계로 측정된 시간에 판단의 권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그저 1시간이고, 그 시간 동안 몇 페이지를 읽었나 정도를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심리적 시간을 지나는 의식은 책을 읽는 동안 어떤 특정한 단어나 문장에서 멈춰 골똘히 생각해 본다거나, 신체의 어떤 부분에서 미세한 통증을 느낀다거나, 오후의 장보기 목록을 떠올린다거나 하는 질적으로 각기 다른 일련의 상태들을 겪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의식 상태들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연속적 흐름을 진정한 시간이라고 보고, 이를 '지속'(순수지속으로서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시간을 공간화해서 사유하고 있다, 즉 '시간을 공간에 투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계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둥근 원을 일정한 간격으로 구획화하는 공간의 방식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를 모방하여 (절대 지키지 못할) 원형의 생활 계획표를 그리는 것으로 방학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시간에 관한 언어 표현도 공간의 방식으로 합니다. '여름이 다가온다’, ‘여름이 지나간다’, ‘사건이 뒤로 갈수록 미궁에 빠졌다’고 하지요. 시간의 공간화는 물리학의 방정식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t로 표현되는 시간은 공간을 어느 만큼 이동했느냐로 측정됩니다. 정확히 말해 어떤 특정한 시간에 운동체가 어느 지점에 가 있는지의 위치를 측정의 자료로 채택합니다. 출발에서 도착까지의 구간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변화들 또한 미분하여 점의 위치로써 표현할 수 있다고 과학은 자부합니다(참고로 베르그손이 『시론』을 발표한 시점은 1889년으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 이론이 제기되기 이전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간격들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변화들(앞서 말한 책을 읽을 때와 같은 여러 심리적 상태들)로 서로에게 녹아들며 상호침투하는 연속적 흐름이기에 양으로 가늠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측정을 위해 공간 위의 점들로 흩어져 버리는 순간에는, 질적 특성이 사라진 (그저 선 위의 위치로써만 구분되는) 동일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방정식에서 기호 t는 지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두 지속 사이의 관계, 어떤 수의 시간 단위들, 또는 최후의 분석에 의하면 어떤 수의 동시성들을 가리킨다. 그러한 동시성들, 즉 그러한 일치(가령 어떤 물리적 사건과 시계바늘의 일치-역자주)들은 계속해서 동일한 수로 늘어날 것이다. 오직 그것들을 나누는 간격만이 감소될 것이나 그 간격들은 계산에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 간격들이 바로 체험된vécue 지속, 의식이 지각하는 지속이다(242쪽).
여기서 동시성의 의미에 대해 세미나 시간에 여러 의견들이 분분했는데요. 베르그손은 이것을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교차점, 접합점'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선 위의 점과 같은, 공간 위의 위치로써만 구별되는 지속의 순간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시간의 계기는 하나가 사라진 다음에야 다른 것이 나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공간 속에 병치시키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즉 여럿이 한 순간에 동시에 머물러 있는 계기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132쪽 주65 참고). 공간의 개입이 없는 순수 지속은 의식의 연속적 흐름이며, 서로에게 녹아드는 유기적 전체이면서도, 그 계기하는 순간들은 독특한 고유성을 지닙니다. 때문에 '구별되는 질이 없는 순수이질성'(277쪽)이라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두 표현을 함께 놓음으로써만 언어로 번역을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자유의 문제
베르그손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과 실제로 느낀 시간, 즉 실재 지속을 혼동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보여줍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삶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자유에 대해 고찰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이 논파하고 있는 제논의 역설은 운동체와 운동을 구분하고, 이미 지나간 운동을 재구성하는 것과 진행 중인 운동에 대한 혼동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에 관한 논의들(결정론과 비결정론)은 선택의 시점에서의 자유로운 의지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최종적인 행위가 무엇인지를 가정 안에 포함시켜야만 논의 자체가 성립됩니다. 그러나 이미 이루어진 행위들을 궤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으로는 자유의 문제를 말할 수 없습니다. 진행 중인 현재를 과거의 재구성으로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행위는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지, 흘러간 시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는 하나의 사실이며,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 중에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다. 문제의 모든 난점들과 문제 자체는 지속에서 연장성과 동일한 속성을 찾으며, 계기를 동시성으로 해석하고, 자유의 관념을 그것을 번역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언어에 의해 번역한다는 것으로부터 탄생한다(272쪽).
베르그손이 『시론』에서 자유에 관해 언급하는 또 다른 문장들을 소개하며 후기를 마칠까 합니다.
자유로운 결정이 나오는 것은 영혼 전체에서다. 행위는 그것이 연결된 동적인 연쇄가 근본적 자아와 더욱 같아지려는 경향을 가질수록 그만큼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211쪽).
우리의 행위가 인격 전체로부터 나올 때, 전자가 후자를 표현할 때, 전자와 후자가 작품과 예술가 사이에서 때로 발견되는 그런 정의할 수 없는 유사성을 가질 때, 우리는 자유롭다(217쪽).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소유를 되찾는 것이며 순수한 지속에 다시 자리잡는 것이다(282쪽).
마지막 시간에 의견이 분분했던 문제들을 잘 정리해주셨네요. 동시성의 문제도, 자유의 문제도 어렵지만 곰곰 생각할수록 재밌기도 하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베르그손의 개념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에게 모순되게 느껴지는 점들이 함께 있는 상태를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한 거 같아요. 그래서 함께 머리를 모으는 일이 꼭 필요한 거 같고요!ㅎㅎ 시론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창조적 진화에서도 계속 풀어가보아요~^^
시간을 공간의 언어로 표현하고 표상하는 우리의 용어들을 정리해주신 게 이해가 쏙쏙갑니다.
과학의 시간(특히 아인슈타인과 양자
자유의 문제는 아리송하게 남아 있어서 다음 저작에서 눈에 불을 켜고 쫓아가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