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베르그손과 만나는 시간, <베르그손을 읽자> 첫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6주간 이어지는 이번 시즌에는 베르그손의 첫 번째 주요 저작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읽습니다. 플러스, 그동안 베르그손을 읽어오며 마음 속에 쌓아두었던(^^) 이야기들도 마음껏 풀어놓을 예정인데요.ㅎㅎ 그 첫 시간에는 1장의 반 정도를 읽고 모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장에서 베르그손은 질적 차이를 모두 양적 차이로 환원하는 우리 습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는 ‘지속’이라는 독특한 관념을 공유하는 <물질과 기억>과 <창조적 진화>에서도 언급되는데, 베르그손은 이를 우리 ‘지성’의 습관으로 규명하고 있지요.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르는 지속으로서의 세계에서 우리는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그 움직임을 정지시키지 않으면 안 되고, 그로 인해 우리는 모든 걸 ‘고체화(공간화)’해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시론> 1장에서는 감각, 감정, 열정, 노력과 같은 의식의 상태들을 세밀하게 분석하며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봅니다.
베르그손은 먼저 어떤 대상을 ‘더와 덜’의 문제로 보는 것은 그것을 ‘포함하거나 포함되는 것의 관계’, 다시 말해 ‘공간의 문제’로 보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크기나 넓이, 높이를 지니지 않는 비연장적인 것에 그러한 관계를 대입하는 것이 모순이라는 점을 짚어주고, 나아가 우리가 뭉뚱그려 하나로 퉁치는 감정과 감각이 실은 무수한 상태들의 이행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를 위해 베르그손은 여러 감정들을 세밀하게 구분해 보이는데요, 이번 시간에 여러 샘들께서 인상적인 부분으로 꼽아주시기도 했지요. 베르그손에 의하면, 가장 낮은 단계의 기쁨은 “우리 의식의 상태들이 미래로 방향을 잡는 것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어떤 느낌인지 조금 애매하지만, 이는 무엇인지 모르게 열려 있는 느낌, 무한한 가능성의 느낌이라는 점에서 희망과도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극도의 기쁨은 우리 지각과 기억들이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성질을 띠는데, 어떤 열기나 빛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새로운 이 성질을 베르그손은 “존재의 경이로움과 같은 것”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슬픔은 “과거로의 정향(定向)에 불과한 것에서 시작”되며, “미래가 우리에게 닫혀 버린 것처럼, 우리의 감각과 생각이 빈약”해지다가 무를 갈망하게 되고, 결국에는 “어떤 으깨지는 듯한 느낌”에서 끝을 맺습니다.
감정뿐 아니라 도덕감의 하나인 ‘연민’에 대한 분석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에 의하면 연민이라는 감정은 우선 생각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겪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그 고통을 덜어주려는 요소가 즉시 결합됩니다. 가장 저급한 형태의 연민은 그 고통에 대한 혐오나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연민은 오히려 그 고통을 욕망합니다. 그러한 욕망은 낮아지려는 열망, 일종의 겸손함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연민의 증가하는 강도, 즉 질적 진전을 베르그손은 "혐오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공감으로, 공감 자체에서 겸손함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구분들이 모두 공감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감정의 양적 진전이 아니라 질적 진적,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 다른 상태들로의 이행이라는 베르그손의 주장만은 충분히 와닿았습니다.
감정들 외에도 베르그손은 미적 감각이나 신체적 느낌 등을 다양하게 가져와서 살펴봅니다. 주먹을 점점 세게 쥐거나 입술을 굳게 다물 때의 느낌에 대한 부분에서 저를 포함해 많은 샘들이 직접 실험해보았음을 증언하셨는데요.ㅎㅎ 베르그손은 몸의 한 점에서 더 큰 강도의 노력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것이 실은 그 작업에 관여하는 신체의 면적이 더 넓음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요. 손이나 입술이 느끼는 감각은 동일한데도 그러한 감각이 강해지는 거라 생각해왔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미나 시간에 이야기 나눈 것처럼 무엇보다 놀랍고 다시금 감탄하게 되었던 것은 이토록 디테일하게 감정이나 감각들을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베르그손의 방식이었습니다. 그가 몸소 보여준 것처럼 신체적 심리적 감각이나 감정들을 세밀하게 구분해서 보려는 시도를 해보아야겠다는 이야기, 그 연습의 일환으로 그것들을 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는 이야기, 매순간 다른 상태들을 하나의 감정이나 생각으로 환원하고 그로 인해 번뇌에 휩싸이는 습관을 그런 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 등도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이 강조하는 질적 차이를 인식하게 되는 길이기도 하겠고요.
베르그손을 처음 읽고 계신 샘께서는 이처럼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혼동하는 문제에 대해 베르그손이 지적하는 이유를 물으셨지요. 이런 식의 혼용(?)이 우리 일상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아마도 앞으로 읽어나갈 부분에서 베르그손이 또 친절하게 설명해주겠지만(^^), 이러한 혼동은 감정이나 감각을 실체화해서 그 안에 우리를 갇히게 한다는 점, 모든 것은 순간순간 관계 속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되고 계속 다른 것으로 변화해하고 있음을 잊게 만든다는 점, 그처럼 뭉뚱그려 하나로 규정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것은 보지 않게 된다는 점 등을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베르그손의 저작들을 연이어 읽고 있는 저희는 한편으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문제를 이 정도로 세밀하게 살펴본다는 점이 매우 감탄스러웠고, 배우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만큼 우리 인식의 고체화, 공간화 습관이 공고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부분에 스며들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그런 점에서 앞으로 베르그손이 펼쳐보여줄 면면들이 더욱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이번 시간에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 풀지 못한 궁금증들도 계속 가지고 가면서 그 면면들과 다시 연결시켜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은 가장 낮은 단계의 기쁨과 극도의 기쁨, 그리고 슬픔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감정과 감각이 무수한 상태들의 이행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이해됩니다. 무수한 상태들의 이행이라는 것은, 감정과 감각은 질적 진전을 하므로 '더와 덜'의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지요. 감정을 양화할 때 발생하는 문제가 우리 인식의 고체화, 공간화 습관이 공고해진다는 것에 있지요. 다시 말해 양적 진전은 감정의 다양하고 미세한 결들을 파악할 수 없는, 즉 감수성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될까요? 알 듯 말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