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에세> 읽기! 어느새 2주차가 지나고 3주차에 접어들었는데요. 이제는 비몽사몽 일어나서 일단 자리에 앉고 <에세>를 펼쳐드는 일이 좀 습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앉고 나면 그 안에는 재미난 문장들이 기다리고 있고, 줌으로 얼굴을 맞댄 샘들과 함께 읽으며 괜히 키득거리거나 밑줄을 쫙 긋는 경험이 아주 재미납니다~. 저는 그렇게 읽은 열댓 페이지 텍스트 안에서 슥 흘려버리기가 아까워서 한 두 문장이라도 끄적이게 되는데요. 함께 낭송하시는 샘들께서도 자발적으로 필사 사진을 보내주셨어요. 이번 주에는 예식, 돈, 죽음에 대한 몽테뉴의 단상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나눠보고 싶어서 이렇게 올립니다~
13장 왕끼리 회동하는 의식에 관하여
내 집에서 모든 의례적인 행사를 끊고 사는 나는 맞을 때건 배웅할 때건 그런 공허한 허식을 대체로 잊고 지낸다. 그 때문에 화를 내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나 자신을 매일 화나게 하느니 차라리 단 한 번 그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러지 않고는 끊임없는 예속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자기의 누옥까지 그런 격식을 끌고 들어온다면 궁정 생활의 굴레를 빠져 나온 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107~108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이의 예법을 안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것은 우아함이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친숙해지는 과정으로 가는 첫걸음을 마련해 준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예를 우리가 배우고, 또 우리에게 무슨 가르칠 만하고 전할 만한 점이 있으면 우리의 예를 돋보이게 제시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109쪽)
14장 좋고 나쁜 것은 우리 견해에 달려 있다
우리가 달아나면 적이 더 사나워지는 것과 똑같이, 두려워 떠는 것을 보면 고통은 더 오만해진다. 당당히 맞서는 이에게 고통은 훨씬 얌전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팽팽히 긴장하고 그것에 대항해야 한다. 밀려 뒷걸음치면 우리를 위협하는 파국을 지레 불러들일 것이다.(123쪽)
나도 젖먹이들이었지만 아이들 두셋을 잃었다. 애석치 않은 바는 아니지만 울고불고하진 않았다. 사람 속을 그처럼 아프게 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통상적인 애사들 중 내게 닥친다 해도 슬플 것 같지 않은 일, 내게 닥쳤으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 많은데, 세상이 그 일들을 어찌나 끔찍한 것으로 그려 보이는지, 얼굴이 붉어지지 않고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무심을 자랑할 생각도 못할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슬픔이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견해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키케로)(128쪽)
나는 궁한 사람의 해결을 별들에게 맡겨 버리곤 했다. 차후 신중함이나 판단력에 의존해 해결할 때보다 훨씬 즐겁게, 훨씬 자유롭게.(131쪽)
부유함은 수입보다 정돈된 생활에서 나온다.(132쪽)
나의 두 번째 삶은 돈을 갖게 된 상태였다. 나는 돈에 매달려 일찌감치 상황이 허락하는 바에 따라 상당한 액수를 따로 비축해 놓았다. 통상적인 지출보다 많이 가지고 있어야 가졌다고 할 수 있고, 아무리 확실한 수입이라도 아직 수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믿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생각했다. ‘갑자기 이런저런 사고가 생기면 어쩐단 말인가?’ 그런 헛되고 그릇된 상상 끝에 꾀를 내어 여분의 저축을 마련해 불시에 닥칠 수 있는 모든 불편에 대비하려 했다. 그런 일은 거의 무한정 일어날 수 있다고 논박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에 대비할 수는 없어도 어떤 것들, 나아가 많은 것에 대비할 수 있다고 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괴로운 염려 없이 지낼 수는 없었다. 나는 돈을 비축해 둔 것을 비밀에 부쳤다. 자신에 대해 그렇게 서슴지 않고, 그토록 많이 말하던 내가, 내 돈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유하면서 가난해지고, 가난한 채로 부를 쌓아 가면서, 자기 재산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털어놓지 않아도 좋다고 양심에게 허락해준 사람들처럼 말이다. 가소롭고 수치스런 조심성이다.(133쪽)
돈을 저축해 얻은 이익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돈이 많다고 해서 지출이 덜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철학자 비온이 말하곤 했듯이, 숱 많은 사람이건 대머리건 머리털을 뽑히면 화가 나게 마련이니 말이다.(134쪽)
그렇게 해서 나는 세 번째 방식의 삶, (내 느낌대로 말하자면) 말할 것도 없이 훨씬 즐겁고 잘 조절된 삶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지출을 수입과 나란히 달리게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이것이 앞서고, 어떤 때는 저것이 앞선다. 하지만 그 둘이 서로를 저버리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그날그날의 햇볕으로 살면서, 현재의 일상적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한 것을 지니고 있음에 만족한다. 비상시의 필요에는 세상의 온갖 비축으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없을 테니까. 운수가 제게 대항할 충분한 무기를 우리에게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운수와 싸우려면 바로 우리 무기로 싸워야 한다. 운이 좋아 손에 넣은 무기는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내가 돈을 모은다면 그것은 오직 가까운 장래에 쓰고 싶어서이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땅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을 사기 위해서 말이다. “구매 열정을 갖지 않는 것도 하나의 부요, 탐욕스레 사지 않는 것도 수입이다.”(키케로) 나는 재물이 없어도 별로 겁나지 않으며, 그것을 늘릴 욕심도 없다. “부의 열매는 풍요요, 풍요의 척도는 만족이다.”(키케로) 자연히 인색해질 나이에 나를 바로잡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 늙은이들 사이에 그토록 흔한 병,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그 병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135~136쪽)
그러므로 여유와 궁핍은 각자의 견해에 달렸다. 부도 영광도 건강도 그 소유자가 그것들에 부여한 만큼만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다. 각자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이다. 행복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바로 그럴 때에만 믿음이 알맹이를 갖게 되고 현실이 된다.(137쪽)
19장 우리 행복은 죽은 뒤에나 판단해야 한다
우리 삶의 한결같은 행복은 좋은 천성을 가진 마음이 누리는 고요와 만족, 그리고 잘 조절된 영혼의 단호함과 침착함에 달려 있는데(157쪽)
시련이 있어도 우리를 폐부 깊숙이까지 시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늘 태연자약한 얼굴을 가장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과 우리 자신이 맡게 되는 이 마지막 배역에서는 더 이상 그런 ‘척’할 수가 없으며, 평이한 제 나라 말로 또렷이 말해야 하고, 단지 맨 밑바닥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솔직하고 단순하게 내보여야 하는 것이다.(157~158쪽)
그러므로 솔론의 훌륭한 충고는 받아들일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이고 철학자들에게는 운명의 호의나 무심함이 행복의 자리도 불행의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 까닭에, 그리고 위대함이나 권세는 별날 것 없는 자질이 우연히 갖게 된 외양에 불과한 것이어서, 나는 그가 필경 훨씬 더 멀리 내다보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의 한결같은 행복은 좋은 천성을 가진 마음이 누리는 고요와 만족, 그리고 잘 조절된 영혼의 단호함과 침착함에 달려 있는데, 삶이라는 연극의 마지막 장,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어려울 그 최후의 부분을 어떻게 공연하는지 보기 전에는 이 행복이 그 사람 것이라고 단언하지 말 것을 그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다른 경우에는 가면을 쓸 수 있다. 철학에서 내놓는 멋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사실 겉치레일 뿐이다. 시련이 있어도 우리를 폐부 깊숙이까지 시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늘 태연자약한 얼굴을 가장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과 우리 자신이 맡게 되는 이 마지막 배역에서는 더 이상 그런 ‘척’할 수가 없으며, 평이한 제 나라 말로 또렷이 말해야 하고, 단지 맨 밑바닥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솔직하고 단순하게 내보여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 순간이 되어서야 진실한 언어가 가슴 밑바닥에서 나오며, 가면은 벗겨지고, 참모습이 남게 된다.”(루크레티우스)(157~158쪽)
당연히 게으름쟁이에게 학업이, 술꾼에게 금주가 고통인 것처럼, 방탕한 자에게 검약은 형벌이요, 허약하고 나태한 사람에게 운동은 고문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물 자체가 그토록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허약함과 비겁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하고 고배한 것을 가려 내려면 그만큼 위대하고 높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에 우리 자신의 악덕을 넘겨씌울 것이다. 곧은 노도 물에 잠기면 휘어 보인다. 무엇을 보느냐만이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도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참, 죽음을 대수롭게 여기지 말며 고통을 견디라고 제각각으로 설득하는 수많은 논설 중에 왜 우리는 우리에게 딱 들어맞는 것을 찾지 못할까? 남을 설득하는 데 쓴 그 수많은 공상들 중에서 왜 각자 자기 기질에 제일 잘맞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을까? 불행을 뿌리 뽑을 강력하고 효과적인 약을 소화해내지 못한다면, 적어도 불행을 완화하는 약이라도 먹어야 한다. “쾌락 가운데서나 고통 가운데서나 우리는 경박한 편견,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어떤 편견에 지배된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물러져서, 이를테면 물같이 되면, 우리는 벌에 쏘이기만 해도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못 배긴다……. 모든 것이 자기를 제어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키케로)
결국 고통의 쓰라림이나 인간의 허약함을 아무리 내세워 봐도, 철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 봤자 철학은 이런 난공불락의 답변으로 방어할 테니 말이다. 필요에 시달리는 삶이 나쁘다면, 적어도 필요에 시달리는 삶, 그것을 반드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자기 탓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오래 고통받지 않는다.
죽음도 삶도 견딜 용기가 없는 사람, 저항할 의지도 도망칠 의지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쩌겠는가?(138~139쪽)
나는 내 평생 공부의 결과를 판정하는 일을 죽음에 맡긴다. 내 말들이 내 입술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내 가슴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그때 알게 되리라.(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