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Seminar Board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은 추상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베르그손의 친절한 설명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우린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강독을 통해 우리가 공간적인 사유를 하고, 질을 양화하고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문장을 얘기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시간을 공간화하고 있으며 질적인 걸 양적으로 환원하고 있다고 말은 할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저는 이 내용을 잘 알고 있는 걸까요? 객관식이나 단답형으로 문제가 오면, 저는 정답을 맞힐 수 있겠지만, 이걸 상세하게 설명하라고 하면 머릿속이 하얘지겠죠. 우린 이미 결론을 알고 있으므로 뭔가 복습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결론과 같은 명제를 인식하고 있다고 하여 우린 그걸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친절한 베르그손은 감각별로 우리가 질적인 걸 어떻게 양화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어떤 걸 보고 듣고 느낄 때 우리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 차이를 묘사의 장인처럼 세세하게 설명해줍니다. 그의 글을 통해서 저는 얼마나 대충 감각하고 사는지, 대상을 지각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표상과 전제를 확인하고 있는지 깨닫고 있는데요. 우리는 베르그손을 통해서 사유가 대부분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대상과 관념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언어를 통해 불연속적이고 애매한 것조차 명확하고 선명하게 구별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동시에 세계를 읽어내는 방법, 사유하는 ‘과정’에 대해 배우는 것 같습니다.
#고통과 쾌락
“이 추론에 근거가 있다면, 증가하는 강도의 고통을 점점 커져가는 음계의 한 음에 비교하기보다는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교향악에 비교해야 할 것이다. …… 리셰는 고통이 약할수록 더 정확한 장소에 아픔을 지정한다는 것을 관찰한 바 있다. 즉 고통이 커지면, 온몸이 아프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통은 커지는 만큼 더 멀리 퍼진다>고 결론지어 말한다. 우리는 그 명제를 뒤집어서, 바로 고통의 강도야말로 의식이 보는 앞에서 그 고통에 동조하고 반응하는 신체 부분들의 수와 범위라고 정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시론」 56p)
“지성이 생각하는 여러 쾌락들 앞에서, 우리의 신체는 마치 반사작용처럼 그들 중 어느 하나로 자발적으로 향한다. 그것을 멈추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지만, 그 쾌락의 매력은 그렇게 시작된 운동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을 맛보는 동안의 쾌락의 세기 자체는 모든 다른 감각을 거부하고 거기에 빠져 버리는 신체의 무기력에 불과하다. …… 물리적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세계에서도 매력(attraction, 인력)은 운동을 일으키기보다는 설명하는 데에 쓰인다.” (「시론」 58~59p)
이번 주 세미나에서 거의 모든 분이 고통과 쾌락에 대해 메모해 오셨는데요. 그만큼 고통과 쾌락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은 정조적 감각들을 설명하면서 고통과 쾌락에 관해 설명하는데요. 참고로 정조적(情調的) 감각이란 감정 중에서 특히 쾌·불쾌, 쾌락과 고통과 같은 가장 기초적 감정에 관련된 걸 의미합니다. 정조의 사전적 의미는 단순한 감각에 따라 일어나는 느낌으로 색채, 악취 따위에 대한 쾌, 불쾌의 느낌입니다. 단순한 표상에서도 정조적 요소가 들어가지만, 베르그손은 일단 쾌락이든 고통이든 하나의 정조적 감각이 어디에서 성립하는가를 따로 탐구하죠. 우리는 고통은 피하고 싶고, 쾌락은 계속 얻고 싶은데요. 아무리 철학자들이 고통이 있어야 우리는 사유를 하고, 결국 그 고통이 우리를 성장하게 만든다고 설득해도 고통을 겪고 싶지는 않습니다. 베르그손 또한 같은 얘기를 하지만, 대놓고 고통이 필요하다거나 고통을 긍정하라고 확언하지 않죠. 그는 신체적 관점에서 고통과 쾌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세심하게 설명합니다. 신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고통은 동조하고 반응하는 부분들이 늘어나는 것이고 쾌락은 어떤 상태에 사로잡혀 운동을 일으키지 못하고 옴짝달싹 못 하도록 만드는 것인데요. 고통이 발생하면 신체 안에서 다양한 기관들의 행동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함께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생각하게 되고요. 반면, 나를 사로잡는 쾌락을 맛보면, 이것에 계속 머물고 싶기에 뭔가를 하기보다는 무기력하게 되죠. 요약하면 고통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운동하라는 명령이며, 쾌락은 작동하지 못하게 사로잡힌 무기력입니다. 참으로 설득력이 있는 설명입니다.^^ 저는 고통은 나의 역량이 확대되는 것과 관련되나, 쾌락은 내 역량이 축소되는 것과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계속 그 자리에 머물게 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과 쾌락을 어떻게 양화하는 걸까요? 우린 아무렇지도 않게 이 고통이 저 고통보다 심하다거나, 이걸 했을 때 더 기분이 좋다는 식의 말을 사용합니다. 베르그손은 증가하는 강도의 고통을 점점 커져가는 한 음에 비교하기보다는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교향악에 비교해야 한다고 말했는데요. 즉 고통이란 어떤 단일한 영역에서 고통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영역이 관여하는 걸로 해석할 수 있겠죠. 교향악을 떠올려보면, 교향악은 대규모의 관현악 조직에 의해 연주되는데, 바이올린, 첼로, 베이스, 플루트, 트럼펫으로 연주하다가 클라리넷, 이후 피아노가, 그다음에 하프가 추가되었을 때마다 소리는 커지는 게 아니라 다르게 퍼지는 것이죠. 우리의 고통의 강도도 이와 유사한 메커니즘이며, 다윈은 거세지는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데요. “고통은 동물에게 그것을 일으킨 원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장 격렬하고 가장 다양한 노력을 하도록 내몬다. …… 심한 고통을 받을 때에는 입이 굳게 오므라들고, 입술이 떨리며, 이빨이 다물린다. 때로는 눈이 매우 크게 벌어지고, 때로는 눈썹이 심하게 찌부러진다. 몸은 땀으로 뒤덮이며, 피의 순환이 호흡과 함께 변한다.” 고통을 견딜 수 없기에 우리의 신체는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다양한 행동을 하게 되죠. 베르그손은 우리에게 감각에 수반되는 ‘더’와 ‘덜’에 대한 표상이 없었다면, 이런 감각의 차이를 양의 차이로 해석하지 않았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 표상적 감각들(ex: 소리의 감각, 열 감각, 중량 감각, 빛의 감각)
베르그손은 감각들의 차이를 양적으로 환원하는 것에 대해 영역별로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세밀한 관찰이 어렵고 언어가 짧은 저에게 베르그손의 설명은 경외감을 부를 정도로 자세하고 구체적입니다. 이렇게 얘기해주는데도 계속 양적으로 접근하겠냐고 설득하는 것 같아요.^^ 앞에서 베르그손은 정조적 감각을 따로 떼어 놓고 고찰했는데, 사실 이는 대체로 표상적 감각과 같이 작동하는데요. 표상적 감각은 정조적 성격을 동반하며, 이는 우리가 표상적 감각의 강도를 평가할 때 작동합니다. 예컨대 빛이 갑자기 증가하면, 운전하는데 갑자기 강한 햇빛이 쏟아지면, 이는 우리에게 시야에 불편함을 일으키며 불쾌감을 유발하죠. 이때 우리는 빛의 크기에 따라 발생한 불쾌감에 빛의 크기라는 원인의 양을 집어넣습니다. 외부 원인의 성격을 감각의 내용과 동일시하는 거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습관이기에, 지금은 둘을 분리하는 일이 오히려 힘든 상황이네요.
소리도 질적 차이가 발생하는데, 우리는 소리를 데시벨이라는 단위로 환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죠. 그러나 베르그손은 소리 감각의 정조적 요소, 즉 신체 전체가 받는 흔들림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소리의 높이도 양적으로 환원하지만, 높이 또한 질적으로 다른 것일 뿐입니다. 성대의 근육과 몸의 더 큰 부분이 공감하면, 그것이 바로 아래에서 위로의 운동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높은음에는 공간에서의 더 높은 위치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소리의 크기와 높이는 양적인 단위가 있어서 질적이라고 보지 못했네요. 소리의 질적 차이는 연주자별 연주 스타일, 교향악단이나 합창에서 소리의 어울림 정도로 좁게 해석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날씨가 덥다고 할 때 이것도 양으로 금방 환원하죠. 날씨 정보를 통해 어제에 비해 오늘 더 더울지 추울지 가늠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더 강한 더움은 사실상 다른 더움이라고 베르그손은 말합니다. 소리처럼 열 감각도 정조적 성격을 띠고, 외부 원인의 수치만큼 더 세거나 덜 센 반응을 우리에게 유발한다고 합니다. 감각의 원인에 대한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없이 감각 자체와 맞대면 한다면 이 감각 변화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지 생각해보라고 그는 얘기하는데요. 압각이나 중량도 우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양화합니다. 무거운 것을 들었을 때 우리는 감각이 증가했다고 느끼는데, 그 감각의 증가를 증가의 감각으로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베르그손은 질문합니다. 우리는 쌀 10kg와 15kg을 들었을 때 느낀 무거움의 차이를 10kg과 15kg의 차이로 여깁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몸에서 느낀 무거움의 차이는 질적 차이고, 원인이 되는 쌀 중량의 차이는 양적 기준이죠. 원인이 양적이더라도 그 원인으로 인한 감각은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예컨대, 같은 10kg을 들으면 우린 똑같은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실제 몸의 상태, 쌀을 들고 있는 장소 등에 따라 다르게 겪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르그손이 말한 바와 같이 크기의 관념을 도입하지 않았다면, 같은 무게의 사물을 들더라도 질적 차이를 감각하겠죠. 그런데 우리는 동질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동질적 운동을 직접적으로 지각한다고 믿는 습관 때문에, 양적 원인으로 발생한 증가(감소)의 감각을 감각이 증가(감소)로 해석하게 됩니다.
빛의 강도를 양으로 부를 것인지, 질로 취급할 것인지 베르그손이 묻습니다. 빛의 세기와 명도 또한 측정되고 있는데요. 색채도 빛의 스펙트럼에서 빨간색, 녹색, 파란색의 수치를 통해 만들 수 있기에, 이것 또한 불변의 결정된 것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베르그손의 책을 읽을수록 우리가 얼마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계량화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실감하게 되는데요. 질적으로 다르기에 양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부분까지 우리는 수치화하여 마치 그런 게 원래부터 있었다는 듯이 사용합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더 다양한 색감을 나타낼 수도 있는 장점도 있으나, 이를 수치화함으로써 색채들이 빛과 맺는 관계, 색과의 관계를 통한 효과 등을 더 보지 못하는 건 아닌지라는 의문이 들었네요. 베르그손에 따르면 질의 변화를 양의 변화로 해석하기로 작정한 우리는 모든 사물이 불별의 결정된 고유색을 가진다는 걸 원리로 놓고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색채는 빛과 만나면서 다채롭게 변합니다. 광원이 가까워짐에 따라 보라색은 푸르스름한 빛깔로, 초록은 희끄무레한 노랑으로, 빨강은 밝은 노랑으로 되는 경향을 보이는데요.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는 색깔이 변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색깔은 동일하게 남아있고 다만 조도의 감각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질적 인상을 우리의 지성은 양적 해석으로 대체합니다.
# 정신물리학
베르그손은 정신물리학에 대해 비판하는데요. 정신물리학은 말 그대로 물리적 자극의 특성과 그에 의하여 생기는 감각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를 양적으로 취급하는 학문입니다. 이들이 공헌한 건 정확하고 객관적인 반응 측정기법을 개발한 것이죠. 감각에서 발생한 질적 차이를 수량화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정신물리학을 도입한 페히너는 두 감각이 같은 크기라는 것과 또 그것들을 더한다는 것을 우선 정의하지 않으면 심리학에 측정을 도입할 수 없음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관찰해보면, 감각에서 질적 차이가 발생하는데요. 질적 차이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일 텐데, 이를 제거한 후 무엇이 남겠냐고 베르그손은 의문을 가집니다. 페히너는 이런 난점을 최소차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타개합니다. 최소차이를 통해 차이의 색조와 고유한 질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최소차이란 자극이 연속적으로 증가하더라도 감각은 어떤 임계치를 넘으면서 급작스런 도약에 의해 변한다는 걸 이용한 것입니다. 임계치에 달하기 전에는 우리는 변화를 느끼지 못하죠. 그러나 베르그손은 S(원래 상태)와 S’(변한 상태)가 질적으로 다른 상태들이라면, 이들을 나누는 간격은 어디에서 성립하는 거냐고 되묻죠. 이런 현상은 감각도 크기로 나타내고자 하는 필요에 의한 것이며, 두 상태의 계기를 두 크기의 차이와 동일시하려는 사유 행위일 뿐이라고 베르그손은 말합니다. 결국 정신물리학은 상식에 친숙한 개념을 정확히 공식화하여 그 극단적 귀결로 밀고 나간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긴 설명과정을 거쳐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대비는 차이로, 자극은 양으로, 급작스런 도약은 등가성의 요소로 보일 것이며, 그 세 요인을 모두 결합하여 양적으로 동등한 차이라는 관념에 이를 것이다.”
친절한 베르그손의 설명 덕분에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질적 차이를 양적으로 만들어가는지 알게 되었지만, 언어를 사용하기에 양적으로 환원하는 걸 버리기 쉽지 않다는 우려도 있는데요. 우리는 생각하기보다는 말을 하기에 공통의 영역에 속하는 외부 대상들이 우리가 겪는 주관적 상태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죠. 상태를 전달할 때도 외부의 표상을 가능한 한 많이 도입하여 이들을 객관화하는 게 우리에게 이롭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전달하고 소통할 때 공통의 영역이 필요하고, 이것을 애매하고 혼몽하게 말할 수 없기에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것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언어 자체 특성상, 단어가 지시하는 것과 사물이 일대일 대응을 함으로써 실제 애매하고 붙잡을 수 없는 것조차 공간화하는 경향이 있죠. 글을 쓸 때 많이 느끼는데요. 언어가 짧은 것도 원인이지만, 내가 겪고 있는 감각의 차이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때 등장하는 것은 진부한 단어들인데, 이런 질적 차이를 어떻게 언어화할지, 시인처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내가 대상을 감각하는 방식도 보고, 질적 차이를 섬세하게 느끼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대상을 감각하는 게 아니라, 대상에 대해 기존의 습관과 전제를 확인하고 건성으로 넘어가는 건 아닌지 미세하게 봐야겠습니다. 앞으로 읽게 될 지속의 관념도 기대됩니다.^^
1장에서는 무엇보다 세밀한 관찰과 분석의 정수를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모든 걸 양화해서 생각하기로 '작정'한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해주는데도 계속 양적으로 접근하겠냐고" 묻고 있는 기분이...^^ 세세한 설명을 따라가면서 쾌락과 고통, 색깔, 소리, 빛 등에 대한 느낌이 변하는 경험도 하게 되었고요. 2장에서도 세세한 설명은 여전하네요.ㅎㅎ
저도 질적 차이를 양화하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감각의 차이로 느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더'와 '덜'에 대한 표상이 없다면, 시간을 공간화하려는 우리의 경향성에 틈을 낼 수 있다고 하지만, 어렵게만 느껴지네요. 어쩌면 우리가 퉁치고 넘어가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다르게 바라보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런 감수성이 형성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의 사회적 삶의 대부분은 수적으로 측정하는거에 익숙해있어 우리스스로가 모르는경우가 대부분인거 같아요. 이런지점을 뚫고 나아기위해 2장에서 어떻게 모든것을 수적으로 공간화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