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에세> 읽기는 계속됩니다!
셋째 주에는 20장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21장 '상상의 힘에 관하여', 22장 '한 사람의 이익은 다른 이의 손해이다', 23장 '습관에 대해, 그리고 기존의 법을 쉽게 바꾸지 않는 것에 관하여'를 함께 낭송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멋진 문장들에서는 '!!'를 금치 못했고, 몽테뉴가 인용하는 고대 철학자들의 글귀들과 그 인용의 폭이 넓음에 놀랐습니다. 상상의 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또 피식피식 웃게 되었구요. 습관 이야기는 정말로 밑줄을 쫙쫙 긋게 되었습니다. 각자 다른 일상을 보내지만 아침에 모여서 30분 간 16세기 철학자의 글귀들을 함께 읽는 실천은 대단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남은 부분도 쭉쭉 재밌게 읽어가 보아요~~
샘들께서 보내주신 필사 문장들을 나눕니다!
20장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자연에서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반대 항에 의해 더 활기를 얻는 것처럼, 그런 불편함들이 그 쾌락의 달콤함에 가시와 겨자 같은 자극제 역할을 한다고 여기는 것, 덕의 문제에 와서도 그와 같은 부대 사항과 난관이 덕을 압도하여 덕을 도달할 수 없는 엄격한 것으로 만든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옳지 않다. 덕에서는 불편함과 난관이 관능적인 쾌락에서보다 더 적절하게, 덕이 우리에게 주는 신성하고 완벽한 즐거움을 기품 있고 예리하게 만들며 고양시키니 말이다.(162쪽)
내가 지금까지 거의 중단된 바 없이 매우 튼튼하게 누려 온 건강이 내 희망을 늘여 주지 않듯, 병도 그 희망을 줄여 주지는 않는다.(172쪽)
가급적 언제나 신발끈을 매어 두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때가 왔을 때, 오직 나 자신 이외에는 걸린 문제가 없게 해 두어야 한다.(173쪽)
집 짓는 자는 말한다.
내 작업은 미완인 채 멈춰 버리는구나.
거대한 벽면들은 곧 무너질 듯하다.(베르길리우스)
그토록 긴 숨이 필요한 일을 계획해서는 안 된다. 또는 적어도 기필코 끝을 봐야 한다고 열을 올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행동하도록 태어났으니,
한창 일을 하는 중에 죽음이 닥치기를 원하노라.(오비디우스)
나는 사람들이 행동하기를 바라고, 또 생명의 기능을 할 수 있는 한 연장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죽음은 내가 양배추를 심는 중에, 그러나 죽음에는 아랑곳 않고, 불완전한 채로 두고 가는 내 밭에 대해서는 더욱 무사히 그 일을 할 때 와 주기 바란다. 나는 어떤 이가 임종 때, 우리의 15대인지 16대인지 왕에 관해 그가 집필 중이던 역사책의 맥락을 자기 운명이 끊어 놓는다고 끊임없이 불평하며 죽는 것을 보았다.(175쪽)
나는 열병에 걸렸을 때보다 건강할 때 더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생의 낙과 멀어지고 재미도 없어지면서 이제는 그것들에 크게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만큼 죽음을 훨씬 덜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 점이 내게, 삶에서 멀어지고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이 둘의 교체를 쉽게 해 내리라는 희망을 준다. 마찬가지로 모든 일이 가까이에서보다 멀리서 볼 때 흔히 더 중대하게 여겨진다고 한 카이사르의 말을 여러 기회에 시험해 보았더니, 병에 걸렸을 때보다 건강할 때 병을 훨씬 더 혐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고 힘이 넘치니, 상상으로 절반은 더 부풀린 그 반대 상태가 더 끔찍한 것처럼 보이고 실제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지지만, 막상 어깨에 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죽음도 그렇게 왔으면 좋겠다.(177~178쪽)
구부려 접은 몸으로는 짐을 받치기가 더 힘들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적수의 공격에 맞서도록 영혼을 단련해 일으켜 세워야 한다. 영혼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안에는 휴식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영혼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마치 인간 조건을 초월한 무엇인 듯 영혼은 자기를 자랑 삼을 수 있다. 불안도 고통도 두려움도, 나아가 가장 작은 불쾌함조차 자기 안에는 깃들 수 없다고 말이다.(179쪽)
우리의 출생이 모든 사물의 출생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듯이, 우리 죽음 또한 모든 사물의 죽음을 가져다주리라. 우리가 백년 전에 살지 않았다고 우는 것이 미친 짓인 것처럼, 지금부터 백년 후에 살지 못한다고 우는 것도 미친짓이다. 죽음은 다른 생명의 근원이다. 여기로 들어오며, 이 생으로 들어오는 것이 괴로워서, 우리는 울었다. 우리의 옛 껍질을 벗겨야 했기에.(180쪽)
“서른 명의 참주가 자네에게 사형을 선고했네.”라고 말해준 자에게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대자연이 그들에게도 같은 선고를 내렸네.”라고.(180쪽)
한 번이면 되는 일이 괴로울 것은 없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일을 그토록 긴 시간 동안 걱정한다는 것이 도대체 이치에 맞는 일인가? 오래 살건, 얼마 못 살건, 죽고 나면 매한가지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게 긴 것도 짧은 것도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히파니스 강에는 하루밖에 살지 않는 작은 벌레들이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아침 8시에 죽는 것은 젊어 죽는 놈이요, 오후 5시에 죽는 것은 노쇠해서 죽는 놈이다. 우리 중 누가 이 촌음 같은 생애를 행불행으로 논하는 걸 웃지 않겠는가? 영원, 아니면 하다못해 산, 강, 별, 나무 또는 다른 짐승들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 인생을 가지고 기니 짧으니 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우스운 일이다.(181쪽)
삶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너희가 무엇에 내어 주느냐에 따라 삶은 선의 자리도 되고 악의 자리도 된다.
너희가 하루를 살았다면 모든 것을 본 것이다. 하루는 모든 날과 똑같다. 다른 빛도 없고 다른 어둠도 없다. 저 해, 저 달, 저 별들, 그것들의 배치, 그것은 너희 조상들이 즐겼던 그대로요, 또 지금 있는 그대로 너희 자손들을 기껍게 할 것이다.(183쪽)
너희의 인생이 어디서 끝나건, 거기까지가 전부이다. 삶이 유익했는지 아닌지는 기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썼느냐에 달렸다. 어떤 자는 오래 살고도 조금 살았다. 아직 삶 중에 있을 때 그것에 유의하라. 충분히 사는 것은 너희의 의지에 달린 것이지 산 햇수에 달린 것이 아니다. 너희가 끊임없이 향해 가던 그곳에 결코 다다르지 않을 줄 알았단 말인가? 끝이 없는 길이란 없다. 길동무가 있는 것이 위안이 된다면, 세상 역시 너희가 가는 같은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186쪽)
21장 상상의 힘에 관하여
이 기관이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라는 지적은 옳다. 우리가 써먹을 일이 전혀 없을 때는 참으로 거북하게 불쑥 나서고, 꼭 써야만 할 순간에는 너무나 난감하게 널브러져 더없이 방자하게 우리의 의지와 패권을 다투는가 하면, 머릿속으로 또 손을 써서 아무리 애걸복걸해 봐도 너무나 오만하고 고집스럽게 거절한다.(197쪽)
23장 습관에 대해, 그리고 기존의 법을 쉽게 바꾸지 않는 것에 관하여
습관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조금씩 우리 안에 자기가 행사하는 권위의 발판을 세워 놓는다. 이처럼 유순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일단 시작하고 나서는 시간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고정시켜 단단히 박아 넣은 뒤, 이윽고 폭군의 성난 얼굴을 우리에게 드러내며, 그 앞에 선 우리는 감히 눈을 들어 올려다볼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209쪽)
우리는 자연의 규칙이 언제나 습관에 의해 깨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습관은 무슨 일에서나 가장 힘있는 주인이다”(플리니우스)(209쪽)
습관은 정신에서 그리 큰 저항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213쪽)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어떤 해괴한 환상일지라도 사람들의 실제 관행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것, 그래서 우리 논변이 그 환상을 지탱해 주지 않거나 그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주지 않는 것은 없다고 여겨진다.(214쪽)
기적이라고 하는 것들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무지한 것과 관계되는 것이지, 자연의 본질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면 우리가 지닌 판단력은 졸기 시작해 그 시력이 약해진다. 야만인들이 우리에게 괴상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괴상해 보이는 것보다 결코 더하지 않으며, 우리 생각에 더 정당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215쪽)
인간의 이성은 우리가 가진 온갖 견해와 풍습을 그 형체가 무엇이든 엇비슷한 비율로 물들이는 염료이다. 그 형체는 소재가 무한하고, 다양성에서도 무한하다.(215쪽)
나의 목소리로 읽는 경험에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몽테뉴의 에세를 듣는 이중의 경험이 즐겁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지해 책을 읽는다는 경험을 실감나게 하는 중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듯하면서도 하나하나 받아적어 두고 싶게 만드는 몽테뉴와 에세도 , 함께 하자 말해 준 분들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학인들이 발췌한 내용들을 시간이 지나고 다시 살펴보니 새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