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모어 니체” 시즌1 세미나가 벌써 5주 차에 접어들었네요. 앞으로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를 5주에서 8주 차까지 4주 간 읽을 예정인데요. 이번 주는 1장 하이데거 편을 읽었어요. 저는 하이데거, 데리다 철학은 이 책을 통해 처음인데요. 이 책을 성실히 읽어내는 것 만으로도 두 철학자와 가까워지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 에른스트 벨러의 하이데거. 데리다의 니체 독법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고 있어요. 하이데거와 데리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개념과 데리다의 문자와 텍스트가 지닌 “차이적 글쓰기”에 대한 개념은 서로 다른 지점에 있다 할 수 있죠. 이런 점에서 두 철학자의 사유가 서로 다르다 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데리다가 언어라는 기호론에 근거한 철학의 토대가 된 것은 바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철학에서라고 해요. 결국 하이데거 철학이 “형이상학”의 철학으로 니체를 잘못 해석했다고 하지만, 데리다는 더 나아가 자신의 사유를 확장 할 수 있었던 것은 하이데거 니체 해석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철학이란 완성된 무엇에서, 완벽한 무엇에서 시작이 아니라, 비판 되는 곳, 바로 균열이 일어나는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하이데거 철학에 대해 토론하면서 제일 헷갈리고 어려웠던 부분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개념이었어요. 이것은 구체적으로 <니체의 형이상학>(1940) 텍스트에서 “존재자들의 존재의 진리”를 규정하는 사상으로 드러나는데요. 여기서 하이데거는 “존재자들의 존재의 진리”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힘에의 의지, 니힐리즘, 위버멘쉬 등을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주로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 존재와 존재자, 존재론적 차이
니체는 『우상의 황혼』의 잠언 <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우화가 되어버렸는지, 오류의 역사>에서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서양의 형이상학을 6단계에서 마지막 “참된 세계” “가상 세계”도 없다는 것으로 형이상학을 끝장냈다 할 수 있는데, 반면에 하이데거는 “존재의 역사”,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니체의 철학을 다시 형이상학으로 해석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동안 서양철학에서 “존재”에 대한 물음을 문제 삼지 않았고 존재와 존재자가 다르다는 “존재론적 차이”를 철학자들은 알지 못했다는 것이죠. 이런 하이데거의 질문에서 니체의 주요 철학적 원리를 “힘에의 의지”는 존재, “같은 것으로 영원회귀”는 다수의 존재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았죠. 여기서 존재자는 “현존재”라는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데요. “현존재”라는 것은 “사유의 모든 과정을 지도하는 것”(87)으로, “인간의 본질”을 되풀이 할 뿐인데요. “바로 우리 자신인 이러한 존재자”가 “현존재”이기도 하죠. 이런 존재자는 “초월적 현상학에서처럼 주관적 의식의 형태”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빛에 가져감”의 형태를 취한다고 하는데요. “존재”에 의해서 “존재자”로 드러난다는 말로 이해되는데요.(??) 암튼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존재론적 차이”라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죠. 니체가 “물자체”와 같은 본질은 없다고 하는데, 주체와 실체, 객체 이런 것을 다시 상정한 것이죠. 니체의 “힘에의 의지”라는 것은 복합적 성질에 의해 드러나는 사물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런 관계성을 부정하는 측면에서 그렇다 할 수 있어요.
○ “무제약적 주관성”으로서 완전한 인간, 위버멘쉬
하이데거는 힘에의 의지 개념을 위버멘쉬에 대한 개념에서 완전히 바꿔버렸지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위버멘쉬는 “존재 자체를 힘에의 의지로서 사유하고 전체로서의 존재를 같은 것의 영원회귀로서 사유할 수 인간”인데요. 이때 위버멘쉬의 실존이란? 힘에의 의지가 정점에 이르러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전체로서 존재자와 일치할 때를 말하는데요.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훈육하는 새로운 “종족”에 관한 것이죠. “모든 사물과 사람을 하나의 통일로 엄격하게 단순화”시킨다는 것인데. 여기서 통일이란 “지구를 지배할수 있도록 힘의 본질을 무제약적으로 강화시킨다는 통일”(66)로서, “사물들의 총체적 ‘기계화’와 인간의 훈육”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죠. 하나의 통일된 인간, 초월적 인간, “위대한 양식”이 나치즘의 정치적 원리에 연결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하이데거가 “힘에의 의지”를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으로 잘못 해석되었던 것 아닐까요? 니체의 위버멘쉬는 “자신이 무엇을 뒤에 남기는지 돌아보지 않는”(89) 방식으로 늘 깨어있으면, 자기 자신(주체)을 떠나는 인간이죠. 집의 바깥에 머물면서 ‘능동적 망각’의 춤과 ‘잔혹한 축제’의 춤을 추는 “존재의 능동적 망각”이 요구되는 인간이라고 하는데요. 한마디로 주체도 실체도 자아도 없는 분열에 가까운 인간이죠. 니체에겐 니체의 글쓰기 방식(사유)이 그런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하죠.
○ 데리다가 주목한 하이데거 사상
하이데거 철학이 형이상학으로 철학이었지만, 데리다에겐 철학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데요. 어떤 부분에서 데리다가 영향을 받았을까요? 하이데거의 니체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존재 역사”에 대해 포괄적으로 《존재와 시간》에서 “형이상학의 파괴”, “존재론의 역사를 파괴하는 과제”(55)로 서술되었어요. 여기서 “파괴”는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가장 두껍게 쌓였던 침전층과 퇴적물을 제거하거나 덜어내거나 분해시킨다는 뜻”이라 해요. 이런 하이데거 기획이 “형이상학과 로고스 중심주의의 해체”와 바로 연결되는데, 데리다는 여기서 “‘Destruktion’에 구성을 뜻하는 ‘con’이라는 음절을 끼워 넣음”(55)으로서 하이데거가 의도했던 의미보다 더 확장시켰어요. 하이데거, 데리다 모두 “파괴”에 주목했지만 사용법은 달랐죠.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파괴”는 존재의 역사에 대한 물음으로 그동안 존재는 사상가들의 말(언어와 같은 기호) 아래 자신을 탈은폐함으로써 존재를 망각해왔다는 것이죠. 반면에 데리다의 해체는 “기호학적인 작용 영역”에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와 같은 글쓰기 영역에서 수행된 것인데요. 이는 2장 데리다에서 더 잘 읽을 수 있어요. 데리다 니체 해석은 다음 후기를 기대해주세요^^
★ 6주차 (4.8. 월) 공지입니다!
-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 2장(데리다)을 읽고 나누고 싶어 이야기를 메모해 옵니다.
- 발제 및 후기는 승연샘, 간식은 세헌샘 부탁드려요!
- 그럼 월요일 저녁 6시 30분에 봬요^^
요즘 '무진장 수요반 노장'에서도, '생-기 기술철학'에서도 하이데거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니체-하이데거-데리다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사유의 결이 '원모어 니체'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것 같네요!
나치즘과도 연결 고리를 갖는 하이데거의 초인 해석을 비롯해 데리다의 형이상학 해체까지... 꼼꼼한 후기 덕에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라는 책에 급 관심이 갑니다!
수니샘 자세한 후기 덕분에 세미나때 헤매였던 '존재와 존재자, 존재론적 차이'에 대해 조금 이해가 되네요. 하이데거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존재로 보고, 이 힘에의 의지에 영원회귀, 위버벤쉬, 니힐리즘,을 다 연결시키고 있는데요. 니체의 힘에의 의지 개념을 완전히 바꾸었지요.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처음 접하는 나로서는 어려우면서도 아주 재밌습니다.
아참! 민호샘, 이 세미나 관심있으면 2학기부터 오시어요. 지금 딱 한자리 남아 있어요. 서두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