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활짝 핀 봄나들이 시즌과 함께 아침부터 밤까지 떠들어대는 선거철이 왔습니다.
낭송을 하러 부랴부랴 짐을 나서다 보면 빨강 파랑 바람막이를 입으신 분들이 누구보다 먼저 지하철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제 <에픽테토스 강의> 2권도 거의 끝나가는데요.
시종일관 우리에게 달린 일을 가려내고 훈련을 요구하는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우리에게 끝없이 스스로 강해질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그것이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싸우기.
저는 특히 '
18장 인상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만 하는가?에서 스토아적 마음 훈련의 구체적 단계가 제시되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뭔가를 잘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하는 습관을 들이고, 뭔가를 잘하고 싶지 않으면 그것을 하지 말고, 그것 대신에 오히려 다른 어떤 일을 하는 습관을 들여라. 혼의 상태들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라네."
습관의 본성에 대한 담담한 이치로부터 시작해서 에픽테토스는 어떻게 우리가 마음의 정념들에 맞설 것인가를 말합니다.
특히 분노에 있어서, 우선 그 격렬함에 땔나무를 던져 넣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후에는 '화를 내지 않았던 날들을 세어 보면서' 자신을 칭찬하고, 그런 날들을 늘려갑니다.
또한 격렬함에 사로잡힐 것 같으면 '지혜롭고 덕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본보기들을 선택'하는 것이죠.
산 사람들 중에서든 죽은 사람들 중에서든 누군가를 선택해 '자신의 삶을 그들의 삶과 비교해서 검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너 자신에게 만족스럽게 되는 것이 너의 바람이 되게 하며, 신에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너의 바람이 되게 해야 하네."
이 외에도 스토아 철학의 정수로서, 상실의 고통을 마주할 때면 비통해하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것과 함께해왔음에 감사하라는 문구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에픽테토스는 그것을 '신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 법을 지속적으로 마음에 새기면서 그의 눈앞에 이것을 두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네. 어떤 법? 신의 법. 너 자신의 것을 보존하며, 너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주장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부여된 것을 사용하며 부여되지 않은 것을 갈망하는 것이네. 빼앗긴 것이 있다면 기꺼이 또 당장에 그것을 포기하며, 그것을 사용하며 누렸던 시간에 대해 감사하는 것."
그럼 한 주 간의 필사를 보실까요
11장 철학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철학의 출발점은, 최소한 마땅히 해야만 하는 방식대로 철학에 전념하고 또 현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관한 인간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함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네. 실상 우리는 직각삼각형, 음악에서 4분음이나 반음에 대한 자연적 개념을 갖지 못한 채 세상에 왔지만, 어떤 종류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이것들 각각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므로, 그런 이유로 그것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에 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네. 이와 달리,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 적절함과 부적절함, 행복, 우리에게 적합한 것(의무)과 우리의 몫으로 부과된 것(책임), 그리고 우리가 행해야만 하는 것과 우리가 행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에 대한 본유적 개념을 갖지 못한 채, 우리 중에 누가 세상에 들어왔는가? 이런 이유로 우리 모두는 이렇나 명사들을 사용하여, 또 우리의 그것들에 대한 ‘선개념’을 개별적인 사례들에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네.(332~333쪽)
우리는 사실상 어느 정도 자연에 의해 이미 가르침을 받고 이 세상에 오고, 거기로부터 시작해서 계속적으로 우리의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여 가는 것이라네.(333쪽)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시작하지만, 그들은 그 개념들을 적절하지 않은 개별적인 경우들에 적용하는 결과로서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네. 이러한 일반적 개념에 더하여 그들이 또한 그 개념들을 올바르게 적용하는 데 요구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무엇이 그것들이 완전해지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겠는가?(334쪽)
자, 그렇다면 개인적인 의견보다 더 높은 무언가로 나아가 보기로 하자. 그게 무엇일 수 있을까? 철학의 출발점을 살펴보는 것이네. 즉 그것은 사람들 서로 간에 상충하는 의견을 갖고 있음을 깨닫고, 그 상충의 기원에 대해 탐구하며, 단순히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믿지 않는 것, 그리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올바르게 생각되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무엇인가 판단 기준을 발견하는 것, 예를 들면 중량의 경우에는 저울을, 예를 들면 사물이 똑바른지 굽었는지를 결정하는 목수의 축선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네.(335쪽)
13장 불안에 대하여
불안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보면, 나는 말하네. ‘이 사람이 도대체 원하는 게 무엇일까?’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여전히 불안해할 수 있을까?(346쪽)
의지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의지에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이 좋음도 나쁨도 아니라면, 그리고 의지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의지에 달려 있는 것) 모두는 우리에게 달려 있으며, 우리가 원하지 않는 한 누구도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빼앗거나, 혹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강요할 수 없다면, 거기에 불안을 위한 무슨 여지가 남아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 보잘것없는 몸과 우리의 대단찮은 재산, 카이사르가 어떻게 생각할까에 관해 불안해하고 있지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관해서는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네.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품을까 봐 불안해하는 일도 없겠지?(348쪽)
이런 까닭에 제논은 안티고노스 왕을 만나려고 했을 때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네. 안티고노스는 제논이 소중하게 평가하는 것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안티고노스가 권한을 갖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는 제논이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네. 반면에, 안티고노스가 제논을 만나려고 했을 때 불안을 느꼈고, 또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제논을 기쁘게 해주길 원했고, 그것은 그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제논은 어떤 다른 전문가가 비전문가를 기쁘게 해주고 싶지 않은 것만큼, 안티고노스를 기쁘게 해주고 싶지 않았네.
내가 너를 기쁘게 해주고 싶을까? 그것으로 내가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해 알고 있는가? 너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람이 각자의 것이 되는지를 알기 위해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있었나? 그렇다면 너는 왜 좋은 사람이 아닌가?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지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가 말했다.
왜 그러냐면, 좋은 사람은 슬퍼하거나 신음하거나 탄식하지도 않으며, 좋은 사람은 창백해지거나 떨지 않고, ‘어떻게 나를 받아줄 것인지, 어떻게 나에게 귀를 기울여 줄 것인지’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네. 노예야, 그는 자신에게 최선으로 생각되는 대로 너를 받아들이고, 너에게 들을 것이네. 그러면 너는 왜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가? 지금 그가 네가 말하는 것에 대해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닌가?(350쪽)
이 문제들은 연습을 쌓은 자신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너로서는 너 자신의 일들로 되돌아가서, 그것들로부터 다시는 결코 떨어져서는 안 되네.(352쪽)
14장 나소에게
따라서 우리의 경우에서도 철학자의 임무를 이와 같은 어떤 것으로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네. 즉 그는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며, 또 일어나지 않는 일들 중에서 일어나기를 원할 때 일어나지 않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의지를 일어나는 일에 적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네.(354쪽)
철학자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네. 즉 신이 존재한다는 것, 만물을 예견한다는 것, 우리의 행위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의도까지도 그의 눈에 숨길 수 없다는 사실. 다음으로 배워야만 할 사항은, 신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네. 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발견되든 간에, 그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복종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반드시 그를 닮도록 노력해야만 하기 때문이네.(355~356쪽)
거울이 못생긴 남자에게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그대로 보여 줌으로써 그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지 않는 한, 전혀 그렇지 않네. 또 의사가 환자에게 ‘인간아, 너는 너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열이 있네.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말고 물만 마시게’라고 말했을 때, 의사가 환자를 모욕한 것이 아니라면,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이네. 아무도 여기서 ‘참을 수 없는 무례함!’이라고 소리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네가 누군가에게 ‘당신의 욕망이 불타오르고, 당신의 혐오가 저열하고, 당신의 목적이 일관적이지 못하고, 당신의 충동(동기)이 자연 본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당신의 생각이 혼란스러워서 잘못 되어 있다’라고 말하면, 곧바로 그 사람은 ‘나를 모욕했어!’라고 소리치면서 자리를 뜰 것이네.(358쪽)
우리가 처한 사정은 시민 축제에 모여든 경우와 비슷한 것이네. 이곳으로 팔기 위해 양과 소를 몰고 오며,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서 사고팔기 위해 오지만, 단지 소수만이 축제의 볼거리를 위해서 오는 사람이 있네. 축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왜 열리며, 누가 이 축제를 조직하고, 어떤 목적으로 열리는지를 보기 위해서 이곳에 오는 것이네. 또한 우리가 사는 인생의 축제도 마찬가지이네. 어떤 사람들은 양과 소와 같아서 오직 먹이에만 관심이 있네. 자신의 재산과 토지의 노예, 이런저런 공직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모든 것이 먹잇감에 불과하기 때문이네. 반면, 볼거리에 대한 사랑으로 축제에 참석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질문을 던진다네. ‘도대체 우주는 무엇이며, 누가 다스리는가?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한 도시나 가정이 그것을 다스리고 돌보는 사람 없이는 아주 짧은 시간도 유지될 수 없는데, 어떻게 그처럼 광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단순한 우연과 행운에 의해 그렇게 잘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을 수 있을까? 따라서 그것을 다스리는 누군가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네. 그 지배자는 어떤 종류의 존재이며, 그는 어떻게 그것을 다스리는가? 그리고 그분에 의해 창조된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과연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결합과 상호 관계로 그와 함께 묶여 있는가?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은가?’
이런 것들이 이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인생에 대한 생각들이네.(359~360쪽)
16장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들에 관한 판단을 적용하기 위해 훈련하지 않는다는 것
좋음은 어디에? ‘의지 안에’. 나쁨은 어디에? ‘의지 안에’. 좋음도 나쁨도 아닌 것은? ‘의지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 안에.’(366쪽)
자,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행동 자체에 관해 관심을 갖는 단 한사람이나마 나에게 보여 주게. 걸을 때, 누가 행동 자체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숙고할 때, 누가 숙고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결과보다 숙고 자체에 관해 관심을 두겠는가?(369쪽)
그러나 우리를 어떤 실천적인 행동으로 끌고 가 보라 그러면 너는 우리가 비참하게 난파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네. 혼란스러운 인상이 우리에게 엄습하도록 놔 둬 보라. 너는 우리가 무엇을 공부해 왔는지, 무엇을 위해 훈련해 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네! 연습의 부족 때문에, 우리는 항상 스스로에게 두려움을 쌓아 두며, 실제로 그런 것보다 더 큰 것으로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네.(371쪽)
그렇다면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바다? 아니네, 오히려 나 자신의 판단이네. 다시, 지진이 나면 온 도시가 나에게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상상하네. 하지만 작은 돌 하나면 내 두뇌를 부서뜨릴 만큼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를 짓누르고 또 우리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의 판단 외에 다른 무엇이 있는가?(371쪽)
그 올바른 판단들은 무엇인가? 사람이 온종일 연습해야만 하는 것들로, 동료이든, 장소이든, 체육관이든, 심지어 자신의 몸이 되었든지 간에,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것들에 결코 집착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들이지만, 그는 그 법을 지속적으로 마음에 새기면서 그의 눈앞에 이것을 두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네. 어떤 법? 신의 법. 너 자신의 것을 보존하며, 너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주장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부여된 것을 사용하며 부여되지 않은 것을 갈망하는 것이네. 빼앗긴 것이 있다면 기꺼이 또 당장에 그것을 포기하며, 그것을 사용하며 누렸던 시간에 대해 감사하는 것. 네가 유모와 엄마를 향해 우는 아이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네!(372쪽)
‘이제로부터 당신의 뜻대로 저를 사용하십시오. 나는 당신과 한마음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나를 이끄시고, 당신이 원하는 옷으로 나를 감싸십시오. 내가 공직에 있거나 일반 시민으로 남거나, 여기 머물거나 망명을 떠나거나, 가난하거나 부자가 되는 것이 당신의 바람입니까? 나는 동료 시민 앞에서 이 모든 경우에서 당신을 방어할 것입니다. 나는 각각의 것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겠습니다.’(375쪽)
17장 우리의 선개념을 개별적 경우들에 어떻게 적용해야만 하는가?
철학에 전념하는 사람의 첫 번째 임무는 무엇인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을 없애는 것.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우려고 착수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런데 우리가 철학자들을 만나러 갈 때, 우리 모두는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에 관해 마음대로 지껄임으로써, 또 이것들을 기반으로 칭찬과 비난, 비판과 질책을 할당하며, 어떤 행동은 찬양할 만하고 다른 행동은 부끄러운 것으로 구별하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철학자들에게 가는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그것은 무엇인가? 일반 원리들. 어떤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이 날카롭고 재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이네. 이제 누군가가 어떤 것을 배우기를 원할 때 실제로는 다른 어떤 것을 배우게 되거나, 더 나아가 그가 배우지 않은 것들에서 진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노릇이네.(378~379쪽)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명사들을 발언하는 모든 사람이 이것들 각각에 대해 단지 공허한 앎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 우리가 우리의 선개념을 명확히 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면, 왜 우리는 일치하지 못하며, 왜 다툼을 벌이고, 왜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겠는가?(381쪽)
우리가 기하학이나 음악 연구에 다가갈 때 우리가 하는 것처럼, 철학으로 나아가기 전에 이미 말했듯이 유용한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믿음을 내버려야만 하는 것이네.(387쪽)
18장 인상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만 하는가?
걷는 능력이 걷기로, 달리기 능력이 달리기로 그렇게 되듯이, 모든 습관과 능력은 그것에 상응하는 행동으로 뒷받침되고 강화되는 것이네. 좋은 독자가 되기를 원하면 읽고, 좋은 작가가 되기를 원하면 써라. 그러나 읽지 않고 서른 날을 지나치며 다른 어떤 일로 지내게 되면, 너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네, 그래서 열흘 동안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상당히 긴 거리를 걸어 보면, 다리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알게 될 것이네. 그러면 일반적으로 말해, 뭔가를 잘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하는 습관을 들이고, 뭔가를 잘하고 싶지 않으면 그것을 하지 말고, 그것 대신에 오히려 다른 어떤 일을 하는 습관을 들여라. 혼의 상태들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라네. 네가 화를 낼 때, 현재 이 나쁨이 너에게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네가 그 습관을 강화했으며, 말하자면 너는 불에다 새로운 땔나무를 던져 넣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하네.(388쪽)
또 마음의 겪음(pathos)에서도 또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네. 어떤 흉터와 멍자국이 혼에 남아 있어서, 그것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면, 지난 흉터 자리에 채찍이 다시 가해졌을 때 그것에서 발견되는 것은 더 이상 멍이 아니라 상처가 될 것이네. 따라서 화내는 일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네 습관을 키우지 말고, 습관이 먹고 자랄 수 있는 어떤 것도 습관 앞에 던지지 말라. 무엇보다 먼저 침착하고, 화를 내지 않았던 날을 세도록 하라. ‘나는 매일 화를 내곤 했고, 그 이후에는 이틀에 한 번, 그다음엔 사흘에 한 번, 그다음엔 나흘에 한 번씩 화를 내곤 했습니다.’ 만일 네가 삼십 일 동안 화를 내지 않고 지속한다면 신께 희생 제의를 바치도록 하라. 처음에는 그 습관은 약해지며, 그런 다음 완전히 파괴되기 때문이네.(390쪽)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침내 너 자신에게 만족스럽게 되는 것이 너의 바람이 되게 하며, 신에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너의 바람이 되게 해야 하네. 너의 순수한 자아에 따라서 또 신에 따라서 너는 욕망이 순수하게 되도록 해야 하네. 플라톤은 말하네. ‘그런 종류의 어떤 인상이 너를 엄습할 때마다, 가서 속죄의 희생 제의를 올려라. 화를 피하는 신들의 성소에서 탄원자로서 참배하라.’ 또 지혜롭고 덕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물러나, 네가 자신의 본보기를 산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든, 아니면 죽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든지 간에, 자신의 삶을 그들의 삶과 비교해서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네.(392쪽)
무엇보다도 먼저 그 격렬함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네. ‘내 인상아, 잠시 기다려라. 네가 누군지, 네가 무엇에 대한 인상인지 내가 좀 보자꾸나. 내가 너를 시험해 보도록 하라’라고 말하게. 그런 다음, 그것이 너에게 뒤따를 모든 것을 상상하게 해서 너를 이끌도록 허용하지 않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너를 사로잡고 그것이 원하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네. 오히려 그런 자리에 어떤 고상하고 고귀한 인상을 끌어들여 이 불결한 인상을 쫓아내도록 하게. 이런 종류의 훈련을 수행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면, 네가 어떤 어깨를, 어떤 근육을, 어떤 힘을 갖게 되는지를 너는 볼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모든 것이 공허한 이야기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네.
그러한 인상들에 맞서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는 진정한 운동선수가 여기 있다! 굳세게 지키라, 가련한 인간이여! 자신을 인상들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라. 투쟁은 위대하며, 왕국을 얻고, 자유를 얻고, 행복을 얻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그 일은 신성한 것이다.(393쪽)
신을 잊지 말라. 뱃사람들이 폭풍 속에서 디오스코로이를 부르는 것처럼, 신을 구조자, 원조자라고 부르라. 이성을 몰아내는 강력한 인상이 불러일으키는 폭풍보다 어떤 폭풍이 더 강력하겠는가? 실제로 폭풍 그 자체가 인상과 다른 어떤 것인가?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며, 그런 다음 네가 원하는 만큼 천둥과 번개를 일으키고, 그러면 너의 지배하는 중심 안에 얼마나 큰 고요함과 좋은 날씨가 깃드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네.(3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