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를 4주간 읽었어요. 다 읽었지만 읽었다고 할 수가 없죠. 하이데거의 개념(존재, 존재자, 존재론적 차이), 데리다의 개념(해체, ‘텍스트의 기호, 문체, 글쓰기’, 차연), 니체의 “증후학”, “가면”, “서명” 등 이런 개념들이 소화되지 않은 채 있었거든요. ㅋ 우리의 이런 옹알이와 속내를 채운샘이 알아차리시고 이번주에는 채운샘의 (애정어린) 특강이 있었는데요. 이 책에서 핵심적인 것은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니체 독해로부터 니체의 텍스트에 대한 해체론적 독법이라 할 수 있어요. 데리다의 “차연”, “해체”는 우리가 책을 읽는 태도에 대한 생각을 깨게 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개념이라 할 수 있어요! 제가 소화한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볼텐데요.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도 데리다의 “해체”가 무엇인지 널리 퍼져 책을 읽는 것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요(^^)
○ (하이데거)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 현현하는 근원
“존재자”란 존재하는 것, 즉 나무, 구두 등 우리가 세계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고, “존재”는 은폐(비가시적)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탈은폐(비은폐)되어 있어요. 이 전체로서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에 의해 현현하는 것이죠. 이런 “존재”가 진리와 같은 것이지만,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저너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도(道)와 같은 것으로, 현상 세계에 은폐·비은폐된 채로 있으면서 언제나 “존재자”에 의해 의미로 드러나죠. 이런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를 하이데거는 반 고흐의 <구두> 그림을 보는 것으로 설명했다고해요. 그림에서 구두만 보는 것은 “존재자”를 보는 것이죠. 그런데 그 구두를 신었을 누구의 삶을 끌어내는 것은, 삶 자체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즉 은폐되어 있는 동시에 비은폐되어 있는 “존재”에 의해 의미가 현현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 의미는 ‘구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두에 은폐되어 있는 것, 구두를 신었을 사람(노동자,농부)의 삶에 대한 해석으로 비은폐(탈은폐)로서 해석되는 것이죠. 이때 반 고흐의 <구두> 그림이 누군가에게는 예술의 고통으로 드러나거나, 누군가에는 삶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구두> 그림은 그 모든 다른 해석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자”이죠. 그래서 존재는 존재자에 깃들어 있지만, 존재자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고 존재가 존재자는 아니죠. 왜냐하면 탈은폐로부터 세계 존재의 의미가 작품들이 차이들을 함축한 채로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어떤 식으로 현현하느냐가 “존재론적 차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가 같은 사진, 동일한 영화를 보더라도 모두가 다르게 느끼고 다른 의미를 떠올리는데요. 이런 경우 하이데거의 존재, 진리가 존재자에 의해 차이로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하이데거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가져와 “모든 존재자의 본질을 힘에의 의지”로 규정해요. 이 힘에의 의지로 지금 그렇게 드러나는 “현전”의 존재 방식이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로 보는데요. 즉 존재하는 것이 오늘도 내일도 존재자 전체가 현재속에서 모습을 매번 같은 나가 힘에의 의지로서 존재가 드러나는데, ‘동일한 나’가 드러나는 것일까요? 사실은 동일한 게 아니죠. 차이와 더불어, 동일자이지만 매번 나, 존재 전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나. 존재 전체의 드러남이죠!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모든 것들에 깃들어 있어는 도(道) 같은 것으로 매번 존재자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라고 본거죠. 그게 존재 전체이고 진리이기도 한 이런 구도에서 니체를 해석했다 할수 있어요!
○ 데리다의 “해체”적 독해란? 미래 독자로서 반복하여 읽기!
데리다의 해체는 하이데거에서 시작인데요.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책을 반복하여 읽기인데요. 책을 반복해서 읽다보면 저자조차도 감지하지 못한 모순, 균열 지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런 균열, 모순으로부터 재독해, 재구성을 하는 것이 바로 해체작업이에요. 예를 들면, 들뢰즈가 스피노자 <에티카>를 여러번 읽은 끝에, 어떤 미세한 단어(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몇 번 정도 나오는 미세한 걸)로 스피노자가 의식하지 않았지만, 스피노자 이후를 가능하게 하는 균열적 지점에서 해체작업을 했어요. 이것이 미래완료, 즉 미처 의식되지 않은 부분을 독자가 읽어내면서, 아직 오지 않은 것과 연관해서 이루어지는 독해를 말해요. 이런 점에서 텍스트는 미래 독자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죠. 니체의 텍스트는 자신의 책을 읽을 ‘미래 독자’를 늘 기다리고 있죠! 미래 독자는 미래 태어난 독자가 아니에요. 니체를 읽는다고 하면, ‘아직 여기에 출현하지 않았으나, 니체 텍스트에서 말하고 있는거, 말하고 있지만 충분히 드러나지 않아 잘 의식되지 않는, 차원을 끄집어내는 미래적 독해!’를 하는 이런 ‘미래 독자’인거죠.
○ “로고스(음성) 중심주의”비판_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제 ‘미래 독자’가 되기 위해 데리다의 “로고스 중심주의” 비판을 먼저 이해해야 해요. 로고스는 이성, 말씀인데요. 신이나 누구의 말씀이 내 행위 앞에 재생되어 명령으로 금지로 행위를 주재하죠. 이런 로고스 말씀 중심주의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현전”인데요. 하지만 철학의 중심은 현재, 지금 여기와 같은 현재중심적이죠. 그리고 현재는 알 수 있다, 지금 현재에 어떤 말씀이 출현하는거로 생각하는데요. 이런 로고스(말씀)는 현재를 중심하는 사상이라 할수 있어요. 그래서 니체 사상을 ‘지금을 살라, 지금이 전부야’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요. 서양 철학에 지금이라고 하는게 모든 사유의 중심이었죠. 사실 지금이란 것은 없고 지금이라 생각하는 것도 허상인데요. 이런 점에서 로고스 중심주의는 과거·현재·미래 시간 전체 사유를 배제하는 것이죠. 그러나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시간이라는 질문, 차이를 사유하여야 하는데, 이런 사유를 못하니, ‘현재 그렇게 느껴!’라는 이성의 명령이 작동하는 이 순간을 특권화하고, 현재 속에 말씀을 재생하는 그런 “현전의 사상”을 데리다는 비판하고 있어요.
더 나아가 데리다는 음성(말씀, 목소리)보다 문자, 텍스트가 갖는 차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요. 책은 저자의 음성이 문자로 쓰여진 것이지만, 보통 음성이 문자보다 앞선다고보는데요. 다시 말해, 한 권을 읽으면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는지를 찾으며, ‘저자의 의도(뜻)가 무엇인가?’로 책을 읽는다는 것이죠. 그런 독자, 수용자는 언제나 의도가 저자의 최초의 발화이며, 우리는 그 의도가 저자의 뜻(진리,기의(시니피에, 의미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인데요. 이게 바로 문자가 매개로서 문자 뜻을 찾아가는 “음성중심주의”이에요. 그러나 데리다에겐 “텍스트”는(완결성을 부정) 씨실 날씰이 얽혀 기록된 직물이며, 이 기록이란 누가 해독하는가 중요한 것으로 보는데요. 그 맥락속에서 독자가 문자를 해독할 때 어떤 맥락에서 읽느냐가 중요하죠. 그래서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데, 즉 맥락밖에는 없다는 의미이죠! 텍스트(쓰여진 것)은 기표(시니피앙, 의미하는 것)이며, “왜 쓰여졌는가?”라고 할때 ‘쓰여지지 않았지만 발견하려고 쓰여진거다’라는 의미이죠. 데리다는 니체의 문체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해요!! 로고스 중심에서 텍스트의 맥락속 해독이 바로 “해체”로서 읽기이죠.
○ 서명(시그니처)은 정치적이고 책임이 따르는 것!
이런 데리다의 “텍스트”와 이어서, 책에 “서명”이란 무엇일까요? 카페마다 내걸고 있는 시그니처와 같은것이죠. 어떤 것을 시그니처로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죠. ‘들뢰즈의 니체.’ 그러면 들뢰즈가 시그니처한 니체인데요. ‘데리다의 니체, 들뢰즈의 니체’ 그들의 시그니처인데요.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니체는 없는 것이죠. 니체는 ‘텍스트로서, 텍스트를 독자가 어떤 미래 독자 관련해서 존재하는가?’로서 있는 것이죠. 아직 오지 않은 독자와 관련해서 독자의 시그니처인거죠. 그런 점에서 텍스트를 읽는거는 정치적인 것이고, 내가 “해체”를 하는 것은 니체의 시그니처, 서명을 하는거와 같은 것인데요. ‘내가 이걸 어떤 맥락속에서 왜 해독하는가?’ 라는 점에서 읽는다는 자체가 책임, 정치적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 니체의 텍스트(기호, 문체), 텍스트의 가면, 해체론적 텍스트 읽기
그래서 독자가 어떤 콘텍스트 속에서 어떤 맥락속에서 읽느냐? 어떤 고민하는 몇세기 어떤 공간의 독자인가? 독자는 이미 콘텍스트를 지닌 인간으로 콘텍스트 속에서 니체를 보는 것인데요. 모든 “해체”의 기본은 반복해서 읽는거죠! 읽고 읽는 과정에서 그 독자의 콘텍스트가 책의 콘텍스트를 또 하나를 형성하죠. 그리고 니체의 단편에서 어떤 것을 뽑아낼 것인가? 니체 텍스트는 체계를 가지고 쓴 텍스트가 아니라 그런 걸 가능하게 하죠. 가령, 어떤 단편이, 나의 콘텍스트속에서, 니체의 콘텍스트가 있고, 아주 다양한 맥락이 맞물리면서 해석이 이루어지죠. 그러니 니체는 매번 그런 니체의 괴물같은 모습으로(이게 니체의 본모습이 아니라) 나타나는데요. 니체 텍스트는 말씀의 흔적(음성 중심주의)을 만들지 않으려고, 독자들을 초청하는 글쓰기이죠!. 니체왈이 이런 게 아니죠. 데리다는 여기에 주목하여 “은유”로서 읽어내야 한다고 했어요. 은유 자체는 맥락을 파악하는거에요.
이 은유는 가면과 연결시며 생각해볼수 있는데요. 니체의 텍스트가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고 하면, 이게 가면인거죠. 가면은 매번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가면 아래 뭐가 있는가 아니죠. 니체 텍스트는 매번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것이죠. 그렇기에 늘 위장되고 다르게 느껴지게 나타나는, 그런 가면이 전부라 할수 있어요! 세모, 네모, 동그라미로 다른 가면으로 드러나죠. 누군가에게는 니힐리스트, 현재주의자, 누군가에게는 위험하게, 낙천주의자, 비관주의자로 니체에겐 진짜 가면이 많죠. 니체가 이런 글쓰기를 했기 때문이죠. 매번의 가면으로 나타나는 글쓰기라! (감이 잘 오지 않네요^^)
○ 데리다 차연differance? “양자택일”이 아닌 놀이
e를 a로 바꾼다. 레이몽 루셀 글쓰기도 그렇다고 해요. 원래 p가 들어가는 단어에서 b로 바꿔, 이렇게 되면 문장 주위의 다른 단어의 뜻이 달라지게 되는데요. 예를 들면, 새빨간 거짓말(완전), 새빨간 쿠션(색깔)에서 새빨간 단어가 문장 전체에서 뜻이 ‘완전’과 ‘색깔’의 의미로 달라지는데요, 이런 식으로 글을 쓴 것이죠. 차이도 그런 것이죠. 차이와 더불어 뭐가 만들어지죠. 그런 차이 자체는 연장을 갖지 않으며, 차이와 더불어서만 차원을 갖는다고해요. 그래서“차연은 드러날 수도 단어도 개념도 아니다.”라고 해요. 새빨간 거짓말(완전), 새빨간 쿠션(색깔) 거짓말, 쿠션이라는 단어가 왔을 때 달라지듯, 다른 것과 관계에서 차이와 더불어 뜻을 갖게 되는데요. 전체문장 관계, 단어들과 맥락에서 다른 모든 것과 관계들에서 차이와 더불어 규정되는 것이죠. 그래서 차연은 규정과 미규정이 함께 있는 것이며, 애초에 정해진게 없어요. 복잡한 맥락에서 바로 옆에 있는 게 뭐냐에 따라서 달라지죠. 그런 텍스트는 놀이의 차원, 놀이의 기호학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놀이는 주어진 것 안에서 택하는게 아니라, 규칙으로 환원 되지 않는 것을 발생하는 놀이이죠. 주사위 던지기 놀이로 만들어주는 것은 매번 차이이기에, “양자택일”이 아닌 아이들의 순수한 놀이일 뿐이죠!
○ 차연과 증후학(증상, 징후)
프로이트에게 반복되는 꿈을 꾸거나, 어떤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고 회피하는 증상은 몸이 아프면 열이 나듯, 정신의 상태가 위험에 처해있다는 증상이니, ‘주의깊게 봐야’라고 하는거로 파악하는데요. 철학이란? 시대의 균열을 읽는거라 할 수 있어요. 왜 열심히 일하지? 왜 물질적 풍요에도 왜 행복하지 않지? 등 현대사회 징후들을 파악하는 건데요. 이는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지 않고 병을 나타내는 기호들을 읽어내는 것처럼, 철학자도 ‘왜 이 시대 사람들은 집착할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현대인들의 기본적인 병이야’라고 감지해 내는데 이게 “징후학”이죠.
병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나면 이미 손쓸 수 없게 된 상태이죠. 이처럼 “징후”는 손쓸 수 있는 상태에서 알아보는 것이죠. 가령, 기후가 변하는 것(해일, 지진 등)에 위기 의식을 못 느끼는데, 직접 나타나기 전에 여기저기 홍수나 가뭄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연결시켜 어떤 “징후”를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바로 미세한 차이들에 민감히 반응하며, 아직 시작되지 않은 병을 읽으려는 것이, 철학자나 의사의 진단 같은 것이죠. 현재의 미세한 차이들을 연관지어, 징후들을 읽어내는 것이 바로 데리다 차이와 더불어서 드러나는데. 그 드러나는 것 속에서 차이를 읽어내는 것이지, 차이가 별도로 존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니체 징후학도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무엇과 연관되는 것이죠! 징후학 자체가 이미 차이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맥락화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책을 읽을 때 ‘a, b라는 단어 많이 사용하니, a가 b가 중요하구나’ 라고 이렇게 읽는데. 우리는 들뢰즈처럼 읽지 못하죠. a가 나올 때 근처에 f 단어가 걸쳐 있어, 니체 이 텍스트에서 f라는 단어, a나올 때 왜 f가 근처에 있을까? a가 나올 때 따라 나오는 b가 아니라, a단어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미세하게 나타나는 f가 중요한 것 같아. 이런 걸 끄집어내는 것이 독자(수용자)의 질문이기도 한데요. 독자가 어떤 욕망 속에서 텍스트를 읽느냐? 이것만큼 읽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다르게 살고 싶어’, ‘무슨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논문 쓰고 싶어’ 각각의 다른 욕망에서 텍스트와 접속은 다르게 차이로서 드러나는 것이죠. 차연의 잠재성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 데리다가 싸우고자 했던 것은 텍스트를 어떻게 차연적으로 읽고, 해체적으로 독해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남은 니체 세미나 동안 계속 이어서 생각해야 할 문제들인 것 같아요^^ (늦은 저녁 시간까지 궁금한 점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며 애써주신 채운샘께 감사드려요^_^)
★ 10주차 (5.6. 월) 공지입니다!
- 『즐거운 학문』 2부, 3부을 읽고 나누고 싶어 이야기를 메모해 옵니다.
- 후기는 경원샘, 간식은 영아샘! 부탁드려요.
- 그럼 월요일 저녁 6시 30분에 뵈요^^
수니쌤의 정성어린 후기 잘 읽었습니다. 우리가 세미나를 하면서 어려웠던 개념들, '존재자와 존재, 기호, 기표, 기의, 차연, 서명, 가면' 등에 대해 채운쌤의 강의로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는데, 수니쌤의 후기로 또 한번 복습하게 되네요. 저는 채운쌤이 차연을 우편엽서에 비유해 설명해주신 것이 재밌었어요. 예전 우리가 썼던 우편 엽서는 발신자, 수신자, 엽서 내용까지 다 오픈되어 있잖아요. 맥락과 차이에 의해 드러나는게 달라보이는, 놀이와도 같은 차연의 개념을 설명해주셨죠. 우리가 하이데거와 데리다, 니체를 만나는 것도 차연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렵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니체세미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