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Seminar Board
<즐거운 학문>을 다 읽었습니다. 이것으로 올해 일곱 권의 니체 텍스트를 마무리했네요. 아직 다 음미하지 못한 구절들이 그 안에 부글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야 언제라도 다시 펴보고 해석할 수 있으니 아쉽기는커녕 왠지 좋기만 하네요. 든든한 우군 같은 느낌이랄까. 배움, 지식, 학문, 뭐라고 하든 지성이 가벼움과 연관된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책은 만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을 꼭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는 데 있다. 우리는 학자와는 다른 존재이다 : 물론 우리도 학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하지만 우리는 다른 요구, 다른 성장, 다른 소화방식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또한 더 적은 것을 필요로 한다. 정신의 얼마만큼의 자양분을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공식은 없다 : 하지만 정신의 취향이 독립성과 빠른 오고감을 지향하고, 가장 빠른 자만이 해낼 수 있는 방랑과 모험을 지향한다면 그는 배부르고 부자유스럽게 살기보다는 적은 음식으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할 것이다. 훌륭한 무용수가 음식에서 원하는 것은 비만이 아니라 최대의 유연함과 힘이다.―그리고 나로서는 철학자의 정신이 훌륭한 무용수가 되는 것 이상 무엇을 더 바라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381절)
저희는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도덕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 왜 진지함이 아니라 ‘가벼움’의 문제인걸까? 배운다는 것이 어떻게 앎의 축적과 체계화가 아니라 날렵하고 유연해지는 것과 관련되는 걸까? 철학자-무용수의 이미지는 저희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앎이나 배움의 상을 뒤흔드는 이미지였어요. 핵심은, 여기서 배움은 비유가 아니라 영양섭취의 문제와 완전히 동일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무용수는 자유로운 동작과 빠른 움직임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그의 비전입니다. 그런 이상 그는 배부르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지요. 그런 섭생은 하나의 ‘해야 한다’라는 원칙으로 그에게서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비전을 원하고 거기서 분리되지 않는 이상, ‘해야 한다’는 ‘원한다’와 구분되지 않습니다. 목표를 원한다면 수단까지도 원하는 법이죠. 그는 배부르고 부자유스럽게 살기보다는 적은 음식으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위해서 더 적은 것을 필요로 하지요. 정신의 섭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사물들과 사건들을 더 명랑하게 해석하고, 마음이 슬픔에 머무는 게 아니라 기쁨(고통의 유무와 상관없이)의 파장에 머물 수 있기 위해서는 더 적게 먹어야 합니다. 즉 마음에서 시끌벅적 무겁게 증식하는 표상들과 정념들을 간결하고 담백하게 쳐내야 합니다. 단 반목은 아닙니다. 거리를 두고 눈길을 돌리는 방법이지요. 한 무더기 씩 짊어지고 있는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해야 한다 하면 안 된다 등의 분별과 규범들을 덜어내지 않고서 우울함과 원한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섭생, 즉 들고 나고 만나고 헤어지고 움직이고 멈추는 일거수일투족에 가하는 절차탁마 없이는 가볍고 날랜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가벼움이 아니라면, 즉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면 철학이든 노동이든 훈련이든 우리는 달리 원할만한 것이 없다는 니체의 말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또 한 가지 저희가 많이 이야기하고 채운샘께서도 강의해주신 구절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두 가지 종류의 원인’이라는 제목의 360절이었습니다. 니체는 묻습니다. “배가 그곳을 향하려는 것은 그곳으로 향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어떤 행동의 원인이, 이 방향, 이 목표를 향한 목적이나 의도와 같은 당위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것에는 그 사건을 일으킨 특정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가령 지금의 판데믹은 ‘코로나19'라는 이름의 바이러스 물질 때문에, 혹은 특정 전파자나 국가 때문에, 조금 나아가서는 인간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협소한 계열화입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우리 행동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도 그렇지요. 어떤 목표나 동기가 원인이 되어 그 행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원인 분석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떤 사건의 전개 전반에서 분리해낼 수 있는 원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니체는 조타수와 증기를 혼동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성냥과 화약통을 혼동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건과 행동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아는 원인보다 훨씬 더 넓고 다층적입니다. 행위의 원인은 ’목적들‘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자취, 행동들의 궤적, 맺어온 관계들의 양상 전체에서 축적된 힘의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원인들은 그저 그 힘의 일부로서 그 힘을 현실화시키고 점화시켜준, 순간적으로 포착된 계기들일 뿐이지요. 전자에 비하면 후자는 사소한 우연, 때, 조건 상황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니체는 그런 가시적인 부분들을 주요한 원인으로 소급시킬 때 드러나고 있는 우리의 허영심을 지적합니다. 마치 천재를 예찬할 때, 우리가 그를 천부적인 존재로 추앙하고 우리와는 다른 곳에 두려는 경향을 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손 없는 라파엘’이라는 레싱의 찬사에 반대하며 오히려 ‘오백 개의 손을 가진 라파엘’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상황 조건들, 즉 그의 만남, 배움, 훈련, 그가 보낸 나날들에서 축적되는 힘이야말로 그를 탄생시키는 원인임을 이해하는 데에서 나온 반박이지요.
여기에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목적’ 개념은 비판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목표의식 때문에 목표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적에 사용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축적된 힘의 양”, 즉 아주 작은 데에서부터 가해지는 미세한 터치들, 반복들, 실험들, 그런 우연과 연습들만이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분리도 없습니다. 배가 가는 것(현존)과 가려는 것(욕망)과 가야하는 것(당위) 사이에는 아무 단절이 없지요. 물론, 어떤 커다란 외부적 상황 조건이 우리의 축적된 힘이 발휘될 기회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때’가 그것이지요. 그렇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것만이 대수는 아닙니다. 위험을 피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아무리 해도 뭐가 안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물러나서 사람들과 맛있는 것 먹으며 공부하면 된다는 채운샘의 말씀이 무척 깊이 남았습니다. 우리가 갖출 수 있는 것은 그저 역량, 매일매일의 실존을 가다듬은 양생과 섭생의 기술 외에는 달리 무엇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지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를 읽고 이야기거리를 간단히 준비해옵니다.
-코멘트 받고 수정하신 에세이 초고를 들고 옵니다. 9주차이니만큼 막힌 부분, 고민되는 부분을 적극 SOS하면 좋겠죠?
-비극에 대한 마무리 강의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