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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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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지금은 마지막 에세이를 수정하고 있고, 수업이 2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니체의 여러 저서, 다양한 소설 등을 어떻게 다 읽고, 10p 이상의 에세이를 쓸 수 있을지 부담스러웠지만 도반들과 함께 쉽지 않은 이 길을 잘 걸어왔다고 자부하고 싶네요.^^ 니체와 다양한 소설을 통해 많이 배우고 좁은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힌 것 같고, 이번 주에도 니체의 「즐거운 학문」과 아이스퀼로스의 「탄원하는 여인들」은 우리를 한 걸음 더 이끌었습니다.
1.조별토론
1) 「즐거운 학문」
니체를 공부하면서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하게 얘기되는 주제는 도덕인 것 같습니다. 니체는 도덕은 나쁜 것이니 지키지 말라는 반도덕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니체의 도덕 비판을 잘못 받아들이면 니체가 가장 비판하는 즉흥적인 인간, 즉 막사는 자를 옹호할 수도 있는데요. 니체는 기존의 도덕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기반으로 타자를 비판하고 배제하는 심판자적인 위치에 자신을 놓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359절 “정신에 대한 복수 그리고 도덕의 또 다른 배경들”에서도 니체는 상상속에서나마 복수를 성취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 도덕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실제 내가 우월한 위치에 올라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보편적인 도덕을 근거로 그가 소화하지 못한 사람, 사상 등을 비판하고 이를 통해 우월해 보이는 외양을 만들어냅니다. 그들은 이런 도덕적 수다, 정신적 사교를 통해 점점 더 나쁜 버릇에 빠져들고 복수에의 의지가 습관화됩니다. 그들이라고 표현했지만, 저희는 이 절의 내용은 너무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얘기를 나눴네요. 정치는 물론, 회사, 공동체, 사교 등 삶 속에서 부딪히는 국면에서 우린 갈등을 겪거나 불편한 마음이 들면 바로 누군가를 탓하게 되고 도덕을 기반으로 평가를 하게 됩니다. 이런 버릇에 중독된 인간은 정신, 교양, 재산, 고독도 독이 될 수 있다고 니체는 말하는데, 우린 니체 공부를 통해 니체를 기반으로 타자를 비난하고 배제하지는 않는지 잘 봐야할 것 같습니다.
360절 “사람들이 혼동하는 두 가지 종류의 원인”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요. 니체는 계속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원인과 결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이 절에서도 니체는 행동의 원인은 목표나 목적이 아니라, 어떤 방법과 목적에 사용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축적된 힘의 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소한 우연에 불과한 것을 행동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니체는 힘의 양을 화약통에, 특정한 방식으로 방출된 것을 성냥으로 비유를 했는데요. 화약통에 화약이 없다면, 아무리 성냥을 켜도 폭발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화약통에 화약이 어느 정도 차 있어야 성냥을 통해 사건이 드러나겠죠. 성냥이 트리거가 될 수는 있지만 이것은 화약의 엄청난 힘의 양에 비하면 거의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냥에만 초점을 맞추고, 마치 성냥 때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여기고, 그 안에 내재된 엄청난 힘(화약)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네요. 대통령 선거든 부동산 가격 급등이든 마주하는 현상에 대해 어떤 힘이 그런 결과를 이끌었는지, 화약을 잘 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359절, 360절 외에도 370절 “낭만주의란 무엇인가?”와 364절 “은자가 말하기를”. 381절 “이해의 문제에 대하여”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습니다. 니체를 계속 읽어나가면서 어떤 개념에 대해 단정하거나, 이것을 이항대립적으로 사유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요. 이번에 읽은 절들도 그랬던 것 같아요. 애매한 문장들로 저희를 길을 잃게 만들면서 각자 더 사유하는 힘을 내도록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은자가 말하기를”과 “은자가 다시 말하기를”에서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기술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 절에 나온 3개의 교제의 원칙을 긍정적으로 본 것인지 아닌지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기술이 본질적으로 식사를 하는(오랜 연습을 전제로 하는) 숙련된 솜씨, 전혀 신뢰하지 않는 요리를 먹을 줄 아는 능력에 기초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허기진 상태로 식탁에 가서 아무거나 먹으라고 말하지 않네요. 즉 모든 사람을 교제하고 소화하라는 얘기가 아닌거죠. 그리고 니체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독특한 기술 하나를 알려주는데, 그것은 유령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빨리 달아나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때 권할만한 방법인데, 이를 통해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손을 뻗어도 잡을 수가 없고 공포를 준다고 하네요. 니체는 교제에 있어서도 각자의 교제술을 발명하고 시험해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381절 “이해의 문제에 대하여”는 배움, 앎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절이었습니다. 니체는 과학이 발전하는 이 시대에 가장 박식한 사람조차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드러나는 경우가 있고, 더 고약한 것은 우리가 너무 많이 아는 경우라고 하네요. 니체가 비유한 것처럼 이는 다양하고 많은 음식을 통해 비만이 되고 유연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걸 배우고 지식을 습득해도 오히려 그 지식들 때문에 무겁고 뒤죽박죽이고 더 아집에 갇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어요. 이 절에서 니체는 심오한 문제를 다룰 때면 차가운 물에 들어갈 때처럼 빨리 들어갔다가 빨리 나온다는 얘기를 합니다. 닭처럼 오래 품고 있어야 문제를 오랫동안 깔고 앉아 있어야 이해되고 인식되는 것이 아니란 얘기죠. 순간적으로 밖에는 얻을 수 없는, 불시에 붙잡거나 놓아줘야만 하는 앎이 있다는 것인데, 불교든 철학이든 깨달음의 순간이 이렇게 다가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기에 니체는 철학에서도 가벼움, 유연성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지식을 통해 비만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적은 지식이라도 잘 체화하여 이를 통해 유연한 무용수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네요.
2) 「탄원하는 여인들」
「탄원하는 여인들」에서는 확실히 폭력, 강요, 전사의 시대에서 설득, 숙고, 정의의 시대로 넘어가는 모습이 보인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제우스가 정의를 수호하고 관장하는 신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는데, 제우스는 균형을 이루도록 저울대를 잡고 굽어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시기에 그리스인들은 악한 자들에 대한 재앙과 선한 자들에 대한 복을 저울대에 올릴 수 있으며, 저울의 균형이 곧 정의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신이나 왕이 단독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었는데요. 펠라스고스가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소이다. 이 일에 관해 모든 시민들과 상의하기 전에는”, “이 나라 온 백성들이 만장일치로 가결했다네. 어떤 일이 있어도 여인들이 무리를 폭력에 넘겨주지 않기로 말일세.”라고 말했듯이 시민들의 의견이 중요했습니다.
「탄원하는 여인들」에서는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등처럼 자신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중재나 판결을 내리는 제3자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정의, 저울, 균형, 법 등으로 불립니다. 탄원하는 자들이 전사들, 청년들이 아니라 여인들인 것도 시대적 조건상 그들이 직접 결투하거나 싸우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네요.
2. 채운샘 강의
1) 360절 사람들이 혼동하는 두 가지 종류의 원인
행위에는 행위의 방향성이 이미 있습니다. 힘과 방향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쉽게 간과하는데요. 힘에 벡터가 내재해 있기에 힘의 방향성은 중요합니다. 즉 해탈로 향할 것인가? 번뇌로 갈 것인가? 습관이라는 것은 일정한 방향으로 가는 것인데, 우리는 대부분 관성적으로 하던 대로 합니다. 이는 매번의 습을 강화시킵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조금이라도 벡터를 바꾸는 노력이 필요한데, 이 것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죠. 꾸준한 수련과 수행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 화살은 누구나 맞을 수 있으나, 그 이후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고통을 늘리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는 각자의 수행, 습관 등에 따라 다릅니다. 매번 같은 번뇌를 겪으면서도 고통을 증폭시키며 화살을 계속 맞을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네요. 해탈과 자유는 어딘가에 있어서 도달해야 하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이 곧 자유이며 해탈입니다.
저희 조별토론 내용에서도 나왔지만, 행동의 원인은 축적된 힘의 양에 있습니다. 목적이나 목표가 어떤 것을 추동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표나 목적도 축적된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화약통과 성냥의 예시를 떠올리면 될 것 같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힘을 축적하는 것 밖에 없는데, 때가 오더라도 축적된 힘이 없으면 기회를 보내겠죠. 그리고 이 때는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고 수 많은 인연조건에 의한 것입니다.
한편 이 절에서 니체는 “배가 그곳을 향하려는 것은 그곳으로 향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말하는데, 당위에는 욕망이 내재하고 있음을 얘기합니다. 저희는 욕망과 당위를 곧 잘 분리시킵니다. “나는 회사 다니기 싫은데 생계 때문에 할 수 없이 다녀.”, “나는 글을 쓰고 공부하고 싶은데, 일하느라 시간이 부족해” 등 우린 욕망과 당위 사이에서 갈등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에는 내 욕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과 당위는 무수한 힘들과 우연이 작용한 것입니다.
2) 2절 지적양심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저울을 가지고 선악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저울이 보편적 저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평가, 비판만큼 쉬운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울에 달기만 하면 자연스레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 저울에 대해 질문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기에 물어보기조차 하지 않죠. 불확실하고 애매한 삶 속에서 우리는 확실성에 기반한 저울에 대해 매번 질문해야 하고 새로운 저울을 가져와야 합니다. 불확실성에서 어떻게 새로 질문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14절 사랑이라 불리는 모든 것
소유물은 소유에 의해 시시하고 권태롭게 된다는 것을 경험과 앎을 통해 알면서도 우리는 왜 그토록 소유하고 싶어할까요? 역설적이게도 소유할 수 없는 자연은 권태롭지 않습니다. 니체는 소유 없는 사랑인 우정을 얘기합니다. 채운샘은 이 우정을 잘 보여주는 영화 「First Cow」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 영화 초반에 브레이크의 시구절이 나온다고 합니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 이 영화는 이질적인 두 타자, 유대인 쿠키와 중국인 킹 루의 우정을 잘 그려냄과 동시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태동되었는지도 잘 보여줍니다. 태초에 교환은 증여에서 비롯됩니다. 자연의 증여인 소의 젖에서 빵이 만들어지고 이것은 돈, 다른 물건들과 교환됩니다. 지금 우리가 풍부하게 누리고 있고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도 발생의 차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셀 수 없는 증여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애초에 증여가 없으면 교환도 없는 거죠. 소유와 교환이 일상이고, 사물 뿐만 아니라 사람, 동물 등 모든 것과의 관계를 소유와 교환방식으로 행하고 있는 이 시대에 다르게 관계맺는 방식이 어떤 것일지 고민해보고 싶네요.
4) 18절 고대의 긍지, 21절 사심없기를 가르치는 설교자들에게
우리에게 평등은 너무나 익숙합니다. 니체가 말하듯이 평등 자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이 평등하다는 가르침에 익숙해져 버렸네요. 우리는 거리를 지우면서 존재의 다양성을 쉽게 부정합니다.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한가한 여유도 지니지 못한 사람을 고대에는 경멸했습니다. 고대에는 스스로 명령한 것을 따르고 그것이 위험을 가져오더라도 힘을 고양시키는 삶을 고귀하다고 봤습니다. 우린 스스로 무엇을 명령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네요. 스스로 명령한 것을 따르라는 것은 내 윤리의 발명과 같이 가는 문제일 텐데,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험할 것인지 모색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평등만큼이나 돈에 있어서 다다익선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인데요. 모든 시대에 중에서 가장 근면한 시대인 우리 시대는 그 많은 근면과 돈에서 점점 더 많은 돈과 근면을 만들어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부를 추구하기만 할 뿐, 이를 누릴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데, 부는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좋은 것입니다. 어떻게 부를 축적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부를 누릴 것인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부는 어느 수준인지 등에 대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5) 370절 낭만주의란 무엇인가?
니체는 청년기에 낭만주의를 철학적 염세주의나 독일 음악의 본질적 성격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370절에서 낭만주의자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데요. 첫 번째로는 삶의 지나친 충만성으로 인해 인해 고뇌하는 자들, 두 번째로 삶의 궁핍으로 인해 고뇌하는 자들입니다. 낭만주의는 사실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는데, 청년 니체는 첫 번째 유형이 낭만주의라고 생각했었고 바그너와 쇼펜하우어가 이에 속한다고 봤었죠. 그러나 니체는 이들을 오해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두 번째 유형이며, 사유나 행동에 있어 온화하, 평화로움, 선의를 가장 필요로 하고, 가능하다면 구세주로서의 신을 필요로 한다고 얘기합니다.
니체는 파괴, 변화, 생성을 향한 열망은 충만하고 미래를 잉태하는 힘의 표현일 수 있다고 하며 이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파괴가 긍정을 낳은 경우죠. 반면 이런 열망은 실패자, 불필요한자의 증오일 수도 있는데, 이것은 죽음의 도주, 부정의 파괴로 볼 수 있습니다. 파괴가 부정으로 가면 모든 지속과 존재가 그에게 분노와 화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다 같이 망하자’ 등의 방식으로 갈 수 있죠. 영원에의 의지, 영원회귀는 두 가지 해석, 즉 긍정의 파괴와 부정의 파괴를 동시에 요구합니다. 전자는 디오니소스적 염세주의, 후자는 낭만적 염세주의로 얘기될 수 있는데요. 이를 디오니소스와 예수(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자)로 설명해보면, 일단 둘다 무, 폐허, 즉음을 마주하고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디오니소스의 경우 태어나자마자 찢겨져 죽었으나, 그는 다시 태어나고 이상세계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매순간을 긍정하는 자입니다. 반면 예수는 죽음이 없는 세계, 즉 이상 세계로 가버립니다. 폐허를 긍정하지 않고 죽음앞에서 멈춥니다. 그는 죽지 않는 세계와 구원을 꿈꿉니다. 그렇기에 니체는 아무리 풍부한 표현형식을 갖췄을지라도 낭만적 염세주의인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 바그너의 음악을 비판했는지 모릅니다.
쉽지 않고 부담스러운 길을 잘 걸어왔다는 말씀이 왠지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한 주 한 주 힘을 축적해서 화약통에 화약을 비축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물론 그것이 샘이 말씀하신 대로, 그저 암탉처럼 알을 품고 비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연하고 가볍게 되기 위해서 이뤄지는 것이 핵심이겠네요. 어렵지만 매번의 방향 조정이 중요한 듯하구요.
짱짱하게 정리해주신 후기 덕분에 토요일 하루, 아침부터 오후까지 오고 간 이야기들과 지혜들을 다시 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믿고 읽는 주영샘 후기! 감사합니다 ㅎㅎ
믿고 읽는 주영샘 후기! 저도 그 의견에 한표 던집니다. 후기를 복습노트 삼아 니체의 구절들을 다시 읽어봤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