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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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날리...! 정말로 그 시간이 다가왔네요. ‘니체로 읽는 문학’ 대망의 최종 에세이가 다가왔습니다. 꼴이 어떻든 간에, ‘우리’가 읽은 소설들을 니체의 렌즈로 해석해보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글들을 나눌 수 있겠네요. 마음은 무겁지만 기대는 됩니다! 채운샘께선 다른 감정은 모두 샘 자신의 몫이니, 기쁘게 자신을 긍정하면서 써 오시라고 말씀을 해주셨어요. 음... 용기가 나시나요?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쓸 수 있는 걸 쓸 뿐이니, 힘닿는 만큼만,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는 힘으로 후회없이 써 와 보아요! 나머지는 모이라 님의 영역이니까요🙂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읽었습니다. 이전 작품들과의 차이 때문에 아이스퀼로스 작품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도 있으나, 저희에게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했던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앞으로 있을 일을 나는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신이 왜 그럼 이렇게 고통당할 짓을 자초했던 걸까? 인간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그건 인간들이 요청했던 걸까? 그리고 정말로 인간들을 더 행복하게 했나? 제우스는 뭐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는 거지? 프로메테우스는 그렇다 치고 이오는 왜 저런 시련을 당해야 하는 걸까? 오갔던 이런저런 의문과 대답들 중에서도 제게 인상 깊게 기억되는 것은 ‘미리 아는 자’ 프로메테우스가 고통을 가볍게 견디는 방식이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계속 말하고자 합니다. 알면서 당하는 이 고통을 계속 표현하고 노래하고자 합니다. 가령 이런 식이죠.
“앞으로 있을 일을 나는 다 알고 있으며, 어떤 고통도 느닷없이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으리라. 내게 정해진 운명을 나는 되도록 가볍게 견뎌내야 해. 필연의 힘에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아니까. 하지만 이런 내 운명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도, 침묵을 지키지 않는 것도 내게는 불가능하구나.(351쪽)
“인간들을 도와줌으로써 나는 고난을 자초했소. 물론 허공에 매달린 바위에서 이웃도 없는 외딴 암벽에서 이런 고문을 당하며 시들게 될 줄은 몰랐소. 하지만 그대들은 지금의 내 처지를 슬퍼하지 마시오. 자, 그대들은 땅에 내려와 다가올 내 미래를 들으시오. 그대들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도록 말이오. 자, 내 말대로 하시오.”(358쪽)
그래서 코로스는 ‘그대의 소원을 기꺼이 이뤄드릴게요’ 라며 그의 고난을 전부 다 들어 줍니다.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해서, 그 때문에 되도록 많은 이들이 고초를 겪기를 원하지는 않”(361쪽)는다는 말로보아 이것은 동정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길 정당화하거나 누굴 원망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럼 왜 굳이 이렇게 결박당한 채로 고래고래 외치고 있는 걸까요? 저는 이 외침을, ‘내게 정해진 운명을 되도록 가볍게 견뎌내는 것’의 구체적 실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긍정이나 가벼움에 대해서 많이 듣고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어떤 태도일지는 잘 상상하지 못합니다. 초연하고 고요한 이미지를 떠올리지요.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서 어쩌면 자기가 당하는 이 고통을 끊임없이 서사를 부여하고 노래하고 이야기로 만들어 전달하는 이 행위가 바로 ‘가볍게 견뎌내기’의 한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와 의미와 사람들 사이의 연결감을 생산시키는 것으로서의 가벼움. 특히 이오의 대사와 비교하면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요?”, “날마다 고통당하며 평생을 사느니 단번에 죽어버리는 편이 더 낫잖아요?”(377쪽)라고 물을 때 이오가 생각하는 고통은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날마다 이 고통과 같은 고통이 반복될 거라고 간주하는 것이죠. ‘평생’과 ‘당한다’만 남고 아무런 의미도 출현시키지 못하는 고통은, 곧바로 그럴 바에야 죽거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실레노스의 지혜로 이어집니다. 저희는 프로메테우스의 침묵을 지킬 수 없다는 그 태도가 허무주의의 한 극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게 니체가 말하는 예술의 한 모습이라고도요. 들뢰즈는 예술을 도주선의 발명이라고 규정했는데,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하기가 딱 그런 것 같습니다.
강의시간에는 디케와 휘브리스라는 인간의 두 근원적 본능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에서는 황금의 시대와 청동의 시대가 가고, 인간 종족의 노동이 시작되는 철의 시대가 소개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모순과 부조리가 등장합니다. 인간은 풍요로워지기 위해 노동을 하지만 노동은 그 자체로 인간 신체를 풍요롭지 않게 하는 활동입니다. 생식 또한 그렇죠. 자신을 이어가기 위한 행위이지만 스스로를 병과 스러짐에 내어줘야 합니다. 바로 이런 역설들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감지하며, 이것이 바로 사유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이런 우주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 기준으로 출현하는 것이 바로 ‘디케’이지요. 올바름, 윤리, 법, 정의가 문제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자는 바로 도시 국가 그리스의 시스템을 마련했다고 하는 솔론입니다. 그리스는 이제 질서와 안정이 중요해집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본능은 아무리 훌륭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저러한 당위명제들을 따르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구심력을 이탈하고 넘쳐흐르는 과잉들이 있지요. 그런 경향, 운동, 힘들이 바로 ‘휘브리스’입니다.
디케와 휘브리스. 채운샘은 이 둘의 관계를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관계로 설명해주셨습니다. 영토화는 구심적 작용입니다. 예측불가한 카오스에서 어떻게든 나와바리를 만드는 일이 영토화입니다. 나의 냄새가 퍼지는 구역을 만드는 작업이지요. 그러나 영토는 언제나 그 생성과 동시에 외부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외부는 늘 침입하고 내부는 외부로 이탈하지요. 탈영토화는 그 영토를 벗어나는 힘들입니다. 원형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구심력과 더불어 장력이 있어야 합니다. 즉 당기는 힘에 상응하는 잡아끄는 힘이 있어야만 뭔가가 꼴을 갖추고 형성될 수 있지요. 하나만 있어서는 무엇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보적 관계에 대해서 니체가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한사람은 항상 오류다. 두 사람과 더불어 진리가 시작된다.”(<즐거운 학문>, 260절) 모든 것은 힘과 힘의 마주침입니다. 드러난 것은 언제나 자기 뒤에 수수께끼 같은 이면을 갖추고 있지요. 영토화 탈영토화는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하나만 너무 성해서는 언제나 치우치고 말지요.
그런 점에서 프로메테우스의 ‘호의’도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가 훔쳐다준 불로부터 인간은 전에 없는 문명의 시대를 열었지요. 불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둠과의 관계,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를 역전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엄청난 기술을 갖추고 승승장구하는 동시에 인간은 무언가를 잃어버렸습니다. 자라난 것은 휘브리스였지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구원자일 수도 있지만 분명 하나의 거대한 문제를 선물한 자이기도 합니다. 이때의 ‘문제’는 놓다 나쁘다로 환원되지 않지요.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것은 이 문제들을 비난하는 것도, 절망하는 것도, 그렇다고 ‘해뜰 날’을 바라며 고통에 대한 보상과 기대로서의 희망을 품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판도라의 처지와도 같은 우리가 희망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건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희망은 대가나 귀결이나 해피엔딩도 아닙니다. 문제는 또 다시 오지요. 다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저질러온 그 문제들을 돌아보며 함께 고민하고 논의하고 손잡는 것입니다. 그런 나눔과 연결 자체가 희망이라는 것이죠.
마지막 공지가 주절주절 길어졌네요. 샘들 올 한 해, 문학과 니체를 뒤적여가며 함께 씨름해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에세이를 공들여서 갈무리해서 토요일에 웃는 얼굴로 뵈어요!
*에세이는 금요일 저녁 10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오전 9시에 시간 맞춰 시작할 수 있도록 미리 프린트를 해주시거나 연구실에서 프린트 하실 분들은 30분 일찍 와주세요!
민호샘의 마지막 절차탁마NY 공지 글을 마주하니 진짜 마지막 한 주를 남겼네요. 왠지 기분이 묘합니다. 지난 3년간 니체팀에서 함께 공부했던 시간이 운명이었음을 느낍니다 ㅎㅎ 모이라 여신님들의 덕분에 죽지 않고 3년을 잘 보내온 것이기도ㅋ 올 한 해 매주 공지글 올려줘 니체팀 모두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함께 기운 잃지 않고 끝까지 민호샘의 몫을 해줘서 저를 포함한 팀체팀 모두 힘낼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문학 에세이를 우리의 운명으로 만들어 보자구여~~ 모든 문장이 필연적임을 느낄 때까지 열나게 쓰고 또 고치고 거기서 떠나고... 잘 실패하고 잘 넘어갈 수 있기를. 그런 긍정에 이르기를 모두 함께 힘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