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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후끈하게 물들인 에세이 발표로, 절차탁마 NY 니체와 글쓰기 프로그램은 매듭을 맺었습니다. <비극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우상의 황혼>까지 읽고 또 읽고, 섞어 읽고 모아 읽어가면서 햇수로는 무려 3년이 되었네요. 많은 분들이 오셨다가 또 나가고 또 오시면서, 이렇게 마지막 해 에세이는 니체와 문학이 만나서 마무리 되었네요! 스물셋, 갓 재대한 촌뜨기인데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저로서는 어마무시한 3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이 기간 동안 니체는 제게 정말 많은 것을 뒤집도록 몰아세운 것 같습니다. 일천한 경험이긴 하지만 그간 좋거나 싫다고 전제하고 있던 생각들이, 암호 같은 텍스트를 읽고 되도 않는 글을 쓰고 세미나를 하고 강의를 들으면서 여기저기 부서지기도 하고 뒤바뀌기도 한 것 같아요. 적다 보니 왠지 아쉽고 맘 시리고 막 그러네요. 샘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시겠죠? 니체와 글쓰기 최종 후기는 가장 뜨거웠던 마지막 1년 갈무리를 함께 하신 선생님들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습니다. 니체와의 여정의 함께한 소감과 따끈따끈한 니체와 문학 에세이 후기, 함께 하시죠!
‘18년에 공부했던 니체를 금년에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도 매력적이었지만, 이번에 마르케스, 루쉰,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소설과 같이한 니체공부는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 느낌입니다. 어떤 책 어떤 페이지를 봐도 살아 숨쉬고 있는 구절들을 읽으며 저와 니체는 계속 변주되고 있었네요. 특히 저의 큰 고민이었던 관계, 그 중에서도 우정에 대해 니체와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고, 좋아하는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 대한 평론을 쓰면서 내가 믿고 있는 현실과 감각에 대해 조금이나마 사유를 펼쳐봤습니다.
이번 마지막 에세이에서 채운샘은 왜 마르케스가 현실을 이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 서구 근대에서 강요하는 현실은 무엇인지 등 구체적인 얘기가 빠졌다고 평을 해주셨는데, 현실 얘기를 다루면서 좁은 내 자리와 감각만 들여다보느라 이 현실의 역사성, 시대성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못해봤네요. 콜롬비아의 식민지 경험, 정치적 불안 등을 통한 마르케스의 현실에 대한 고민이 없는 마술적 현실주의에 대한 재해석은 “현실은 나를 통해 드러난 가상인데,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니체는 어떤 행위에든 모든 생성의 축약된 역사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번 글에서는 단편적인 면만 보고 말았는데요. 니체의 “우리가 얼마나 이상하게 사물과 인간을 단순화하는 가운데 살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이 일을 했고, 감각에는 피상적인 관찰을 위한 자유 출입증을, 그리고 사고에는 가장 말도 안 되고 경솔한 비약과 오판을 위한 자유 출입증을 만들어주었는지!” 구절을 가슴에 새기면서 심연과 표면을 같이 볼 수 있도록 도반들과 함께 연마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채운샘, 도반님들 덕분에 금년 너무나 행복하게 공부했고 내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빌어요.^^(박주영 선생님)
에세이 코멘트를 들으면서 이번에도 나의 문제의식을 제대로 파고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근본적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스스로 질문하고 그 순간에 머물면서 글을 쓰기보다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몇 개의 키워드로 글을 구성하려는 욕망이 더 컸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질문을 밀고 나갈 힘은 사라지고, 글을 그럴싸하게 쓰고 싶다는 허영만이 남는다. 그런 허영심으로 단어를 선택한 결과 코멘트에서 용어 관련 질문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허영심을 걷어내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재차 느꼈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 과정이자 자기 극복 과정이 아닐까 싶다.(이현주 선생님)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을 외치며 신청글을 적었던 게 엊그제인 거 같은데 이렇게 한 해 공부를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그 마지막 시간, 전날까지 글을 마무리하고 아침 일찍 나오느라 몸은 피곤했지만, 선생님들의 글을 하나하나 재미있게 읽어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물론 중간에 살짝(아주 살짝!) 졸기도 했지만요^^;) 저는 선생님들 글이 모두 좋았어요. 끝까지 다듬어 잘 마무리한 같은 조 선생님들 글도, 잊고 있던 작품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었던 다른 조 선생님들 글도... 이제 각자 새로운 공부의 장에서 새로운 공부와 만나게 될 샘들과 저, 올해처럼 함께 찬찬히 가보아요!
그런 점에서 마지막에 채운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티벳의 시험’ 이야기는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공부할지에 대한 커다란 힌트가 되었습니다. 부정적인 공부가 되지 않도록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는 티벳의 시험. 성적과 상관없이 공부를 한다는 것만으로,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한 공부. 가르침을 주신 분, 그리고 함께 공부한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치르는 시험. 이것이야말로 모두가 자기를 긍정하게 되는 세계라고요. 그리고 이런 세계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는 세계라고요. 우리가 배운 것들을 우리가 겪는 사건 속에서 얼마나 현실적으로 해석해내느냐의 문제라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또 걸어가보자고요, 샘들!ㅎㅎ(오정아 선생님)
어느 때부터인지 그 해를 그 해에 공부한 텍스트로 기억하게 되더라고요. 제게 2021년은 명실공히 코로나와 더불어(?) '니체'의 해였습니다. 가장 감격스러운 일은 제가 니체의 그 어마어마한 책들을 이렇게 여러 권이나 읽었다는 점!인데요. 사실 저는 니체에 대해 막연히, 흔히 연상되는 그 '전도나 파괴'의 이미지가 부담스러웠어요. 그런데 제가 직접 선생님들과 채운선생님과 함께 1년간 읽은 바로는, 전도나 파괴 모두 니체를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지만, 진짜 니체의 위대한 점은 바로 '전도나 파괴'라는 개념 그 자체를 우리에게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죠. 무엇이 전도인가. 정말 무엇을 전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한 번 깨달은 것. 니체가 말하는 '철학의 역사성'.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철학에 대해서 잘못 생각해왔는가 느낀 지점인데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등학생 때였을 거예요. 저는 전반적으로 사회탐구영역(백 년 만에 말해 봅니다만 ^^)을 가장 좋아하지 않았는데 유독 윤리의 '동/서양 철학사' 부분은 굉장히 좋아했어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 철학이 세계에 대해 어떤 고정 불변의 진리를 말해준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니체가 줄곧 말하듯, 철학조차도 늘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태어난다는 점을 완전히 간과한 것이었죠. 그런 점에서 에세이 코멘트 때 채운선생님께서 글을 쓸 때 시대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확실히 제가 가진 문제를 다시 볼 수 있었어요. 돌이켜보니 제가 니체와 '백년의 고독' 소설 자체에 너무 빠져들다 보니 그들이 가진 시대적 맥락 더불어 나의 시대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음을 깨닫네요.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늦게 니체와 만난 까닭에,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즐비하네요. 모든 책들이 감동이지만, 특히 니체의 유고들은 어떻게 생각을 전개해 나가고, 어떻게 써 나가는지를 배울 수 있는 보고(寶庫)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아직 읽지 않은 책들, 읽었지만 잊어버릴 것이기에 또 새로울 ^^ 많은 글들이 있어 마음 든든합니다. 언젠간 그렇게 힘이 넘치는 글을 쓸 수 있길 소망하며, 함께 한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손지안 선생님)
작년 이맘때 처음 규문 절차탁마 수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내가 정말 이걸 끝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신청했던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또 1년이 지나서 프로그램을 마치는 날이 오네요. 다른 것들은 모두 차치하고라도 우선 1년을 무탈하게 마쳤다는 것이 너무나 기쁩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고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일단 규문에 와서 강의도 듣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는 것은 항상 재미났던 것 같아요. 올 때마다 맛있는 음식도 많아서 좋았습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즐거움을 많이 발견한 1년이었습니다. 글 쓰는 건 어째 더 어려워진 것 같은데, 그래도 그만큼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생각도 많이 달라지고 예전에는 몰랐던 즐거움을 새롭게 찾은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절차탁마 수업을 시작하고 나서 술을 훨씬 덜 마시게 됐어요. 살도 좀 빠졌구요. 1년 동안 생각에도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지만, 다시 보니 몸도 그만큼 많이 달라져 있네요. 끝난 날에는 이제 놀 생각에 마냥 신나기만 했는데, 후기를 쓰면서 생각해보니 달라진 게 참 많은 한 해였음을 새삼 느낍니다!(윤수연 선생님)
간만에 만난 학인들과 채운샘이 반가웠다. 도시 한가운데 있는데도 번다하지 않은, 특이한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규문의 공기가 그리웠구나 싶었다. 화장실을 갈 때 즐겨 신던 공용인지 주인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슬리퍼도 반가웠다.
니체공부 3학기 도중에 규문행이 멈췄다. 100일이라는 공백. 그리고 니체공부 4학기의 9,10주차에 출석했다. 오랫동안 분투하며 써내린 니체팀 학인들의 에세이가 마무리되는 시기였다. 마지막에 슬쩍 끼여서 열매만 취하는 것 같았다. 자의식이 발동하면서 여러 감정이 일었다. 그래도 니체를 공부하는 자리에 오고 싶었다. 그렇게 학인들의 에세이를 들을 수 있었다. 어쨌든 정리하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글쓰기를 통해 니체와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무엇보다 기쁘기도 했다.
니체를 공부하면서 감히 글감으로 삼을 수 없었던 개념들을 돌파하려는 학인들의 글에 깜짝 놀랐다. 영원회귀, 가상, 힘의지, 운명애, 생성과 차이, 실체, 도덕, 이상, 오류 등. 공부하는 내내 니체가 말하는 개념들 주위를 빙빙 돌며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밀어두는 것을 나의 겸손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개념들이 학인들의 손을 통해 살을 얻어 내 눈에 펼쳐지고 있었다. 결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 안에는 자기만족과 두려움, 게으름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음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인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일년의 공부가 마무리 된 시점이다. 물리적 시간이 주는 끝을 마냥 즐기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글을 쓰지 못한 자신에 대한 책망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글을 쓰지 않은 혹은 아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미련의 감정들을 아Q의 정신승리법으로 두리뭉실 넘기고 싶은 모습이 보인다. ‘우리의 현재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미래’(<인간적인 Ⅰ>, 서문) 라고 니체는 말한다. 100일이라는 공백과 이 찜찜한 감정은 이후 행보를 통해 규정될 것이다. 정신승리법이 아닌 니체의 긍정으로 만들기 위한 다음 행보. 그 행보를 통해 지금이 나에게 어떤 시간이었는지 해석될 것이다. 지금 겪는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서로 도와가며 글을 써보자는 난희샘과의 약속을 잘 이행하는 힘으로 이어지게 하리라, 다짐해본다.(이경희 선생님)
2018년 겨울, S학습관에서 채운샘의 강의 통해 니체를 처음 만난 인연으로 2019년 규문의 절차탁마NY에 참여했죠. 2021년 겨울, 3년 과정을 마친 지금 니체와의 만남은 운명이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교양인으로 철학을 공부한다는 어렴풋한 이미지만 가지고 난생처음 도전했으나, 어렵기만 했던 니체. 그를 읽고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고군분투했던 3년, 나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만 처절하게 마주했죠. 지금까지 읽는 법도 쓰는 법도 아예 몰랐구나. 하지만 그 시간이 제게 남긴 것은 감사와 배움에 대한 새로운 출발이에요. ‘규문’이라는 공간과 함께 공부했던 니체팀 학인들이 없었다면 이 과정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타자를 통해 자기를 되돌아보고 타자를 통해 이전과 다른 자기 배움을 시도할 수 있었기에 니체팀 학인들에게 감사드려요! 특히 3년간 제 머리를 쥐어뜯게 만들고 결국 긴 머리를 단번에 자르게 만든 니체에게 보내는 감사! 그의 ‘운명애가 나의 마지막 사랑이리라’라는 그 한 구절을 마지막 에세이에서 해석하기 위해 두 달 동안 사투를 벌였던 시간이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무엇으로도 가질 수 없는 기쁨이었고, 그것은 감사의 마음으로 영원히 간직하게 될 것 같아요. 두 달간 수없이 쓰고 다시 고치면서 덕분에 매 순간 제 생각을 담은 문장들로부터 떠나보려 시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전에 채운샘이 수업 중에 ‘study’라는 뜻에는 ‘습작’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는데, 얼마 전 고흐의 초기 습작을 보면서 니체팀에서 3년간의 공부가 그런 습작의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업이 완전한 이해와 완벽한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철학 공부란 이전과는 전혀 방식으로 보는 법, 생각하는 법,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고, ‘어떻게 읽고,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자기 질문으로부터 새로운 출발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이 배움은 더 나은 생각, 더 나은 삶이라는 막연한 목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적인 고민과 문제로부터 떠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힘이 될 거예요. 공부란 그 과정을 아프고 기쁘게 겪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가 되리라 믿으며, 어느 곳에서든 공부의 인연을 이어가는 이들과 함께 응원하고 싶어요! 규문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모든 인연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후기를 마칩니다^^ (나인영 선생님)
저는 마지막 에세이의 주제를 '사랑'에 관한 것으로 선택했습니다. 대상이 사람이든, 공부든, 일이든 그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삶이기에 한번쯤은 고민해보고 싶은 주제였거든요. 4월 강의 중 채운 선생님께서 '사랑은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헤어짐을 각오하고 사랑하라고, 그리고 상대의 매력을 자기것으로 만들라고. 영향을 받는 것이 사랑이라면 저는 니체를 사랑하기 시작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올 한 해 공부하면서 '내 생각 바닥에 깔린 가치는 뭐지? 이 불편함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대신 이 불편함을 어떻게 바라보고 활용해야 하지?' 같은 질문을 조금씩 던져 보기 시작했거든요. 예민하게 느끼고, 관찰하고, 질문하는 것이 무엇인지 니체에게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배웠다고 해야 할까요. 에세이 때 가장 문제시 되었던 '새로운 욕망과 소유욕' = '그들을 초월해 있는 이상을 향한 보다 높은 갈망'을 앞으로 좀더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에세이를 수정하며 이것을 '자기극복'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정의 관계가 '자기극복'이라는 공동의 갈망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니체팀은 모두 찐한 우정의 관계인 거 맞죠?^^ 내년에도 우정을 같이 만들어 가고 싶네요! 채운 선생님, 그리고 니체팀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고승현 선생님)
니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인정욕망, 허영심, 자만심에 찌들어 있는 왜소한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독불장군, 안하무인으로 살았겠죠. 아직도 니체를 잘 모르겠지만 니체를 공부하게되면 자꾸 저를 보게 되네요. 제대로 한번 나의 문제들과 싸움을 해야하는데, 적당히 안주하면서 넘어가려고 하는 습관을 이번 에세이에서도 들키고 말았네요. 그럼에도 니체와 함께 도반들과 함께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뿐...(유승연 선생님)
절탁ny 2년간 수업을 마치며. 어느덧 절차탁마 니체과정을 2년이나 공부했네요. 작년 1학기 때 처음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거짓말 좀 보태서 정말 모래를 씹는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 ‘이 공부를 끝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답니다. 그 뒤로 ‘그만둘까’라는 생각을 공부하는 2년 내내 했네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만두지 않고 매 학기마다 에세이를 쓰는 내 자신을 보고,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서 포기하지 않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공부하는 과정에서 몇몇 도반들 도움이 없었더라면 금세 ‘그만 두었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죠. 하지만 마지막 채운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끝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인 공부에 대한 의지, 몇몇 도반의 도움과 애정, 채운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때문만으로 한정 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2년간 같은 시공간에 있던 모든 사람들 덕분에 끝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거더라구요.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귀결됩니다.
니체의 필연성, 영원회귀 그 윤리적 차원의 삶의 감사, 니체가 말한 긍정이 뭐였는지 정확하게 잘 몰랐는데 이제야 좀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은옥 선생님)
항상 무슨 소감을 말하라고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어져요. 2년간 니체를 만나고, 그것도 혼자가 아니고 여러 도반들과 같이 이야기 나누고 글을 쓰면서 만난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데, 서울 혜화동 규문이라는 공부공동체에서 매주 니체를 공부한다는 게 어찌 특별하지 않을까요. 그 시간에 가족과 지지고볶을 수도 있고 허한 가슴을 부여잡고 쇼핑을 하거나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자기 자랑 내지는 남의 뒷담화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많은 존재양식들, 뭉뚱거리면 공부 안 하거나 못하는 존재양식과는 다른 존재양식을 우리들이 누렸다는 것에 긍지를 느껴요.
니체는 정말 100년 전 사람일까요? 저한테는 니체가 바로 곁에서 나날이 새롭게 도래하는 매일을 살라고 고구정녕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깨알같이 무엇을 안 하는 방향이 아니라 꿈속에서도 그것을 열망하는 쪽으로 나의 일상을 밀고 가고 싶습니다. 내가 가야 하는 곳과 가고 싶은 곳이 같고 내가 만나야 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은 사람이 같고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같은 일상. 좀 멋진 말을 한 것 같은데, 이거 말이 되나요? 아무튼 니체팀 샘들, 좋은 길벗들이 되어주셔서 진심 감사드려요. 매주 성실히, 충실히 후기 같은 공지를 남겨주신 민호샘, 덕분에 공부가 한결 수월했습니다. 법보시하신 거예요. 채운쌤께는 어떻게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지, 그저 고개 숙여,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행동하는 것이 감사인사겠지요.(최난희 선생님)
**이것으로 절차탁마NY 팀의 후기를 마칩니다. 매듭이 하나 지어졌다면, 또 하나가 시작되는 법! 니체의 정신을 닮아 각자의 자리에서 배움을 이어가길 바라며 공지 및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운명애'적인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이번 에세이를 마치며 배움이라는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배우는 자는 자기 농사짓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어요. 배움을 이어가는 이들 모두 씨를 뿌리는 농부가 되는 것! 고흐의 [씨뿌리는 농부] 그림처럼요. 그 그림 속 농부의 표정과 발걸음, 손놀림이 어찌나 가벼운지, 농부가 부농을 꿈꾸고, 대박을 꿈꾸고 있어 보이지는 않아요. 또 그 손에서 뿌려지는 씨앗들이 모두 건강하게 자랄지 모르죠. 땅과 날씨가 허락해 주는 불확실함과 상관없이 농부는 때에 맞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자신의 원함을 다하여 씨를 뿌리죠. 배우려는 자는 자신의 조건에서 열심히 자기 농사를 짓기를 계속 시도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씨앗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하늘과 자기 뜻이 함께할 뿐, 결과는 원함과 달리 좌절될 수도 더 기쁨으로 돌아올지 모르죠. 더 잘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후회가 아니라 그 아쉬움에 붙들리지 않고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번 수확이 흡족하지 않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농사를 그만둬서는 안 되겠지요. 다음 해 불확실한 결과까지 긍정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자기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삶에서 우리는 농부와 같고, 삶이 농사와 같고, 우리는 농부처럼 이 순간 씨를 뿌리듯 배움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해, 새봄을 맞이하기 위해 모두 이 겨울을 충분히 잘 지내길! 인내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배움을 통해 우리 삶의 농부가 되기를!
와아 폭풍 감동이 밀려오는 후기네요 🙂 모두 감사합니다. 곧 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