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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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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 후반부와 니체의 『선악의 저편』 제9장(고귀함이란 무엇인가)을 중심으로 채운 샘의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니체에 대한 강의를 중심으로 간단히 요약하겠습니다.
니체의 ‘힘’은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근원적 차원의 에너지다. 들뢰즈는 니체의 ‘힘’을 active한 힘과 reactive한 힘으로 구분한다. active한 힘이란 자신의 실존과 역량을 분리시키지 않는 힘이고 reactive한 힘은 그 반대, 즉 자신의 실존과 역량을 분리시키는 힘이다. 이 구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활동적, 소극적이라는 구분과 다른 것이다.
active한 힘이 존재의 기본적 본성임에도, 인간은 존재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가 인과를 해석하고 구성하기도 한다. 니체의 ‘맹금과 양’의 우화에 나오는 맹금은 양을 잡아먹는 것이 자신의 본성인 반면, 양은 풀을 뜯고 맹금을 잡아먹지 않는 것이 자신의 본성이다. 맹금과 양은 각자의 본성대로 존재한다.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간다. 본성에 더 합치하고, 덜 합치하는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양은 맹금을 잡아먹을 수 없기 때문에 잡아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치 양이 ‘맹금은 양을 잡아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존재의 본성에 반하는 방식으로 인과와 판단을 구성하곤 한다. 즉 자신의 좋고 나쁨을 가지고,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누군가의 행위를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생명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과 좀 더 약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침해하고 제압하고 억압하는 것이며 냉혹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형식을 강요하며 동화시키는 것이며,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 해도 적어도 착취이다.”(니체, 『선악의 저편』, §259)
‘무엇인가를 함’ 속에서 자기 존재를 긍정할 수 있어야 역량이 증대된다. 즉 역량은 자신의 현행적 실존을 긍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존재는 자기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외부 세계를 향해 열어야 한다. 니체의 ‘힘’은 존재에 내재된 근원적 능동성, 즉 ‘살아가려 함’이라 할 수 있다. 살아가려 함이란 신체든 사유든 똑같은 방식으로 있지 않으려는 힘이다. 존재들의 필연성은 무한 연쇄에 있으며, 이것이 곧 진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존재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다른 것과 마주쳐서 변이를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면역력이 길러지는 법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생명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존재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모든 존재는 ‘자기화’하려고 한다. 생명의 본질은 active한 것이고, 생명은 자신의 역량만큼 존재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힘의지’에서 ‘의지’란 힘과 힘의 관계, 힘과 힘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체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 힘과 힘의 관계가 끊임없이 연쇄되면서 우주에는 차이가 발생하는데, 차이가 매번 다르면 카오스밖에 없게 된다. 힘들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일정한 방식으로 형성되어야 개체가 발생할 수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란 차이의 발생과 차이의 조직화,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신체도 충동도 힘이다. 신체나 정신은 힘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것이다. 이성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힘들의 관계 속에서 이성이 나아가게끔 충동이 동의한다는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이성이 충동의 힘에 복종하는 방식으로 작동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체계라면, 후자는 ‘무지함’, 즉 충동에 따르는 것 외에 사건을 달리 해석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현재적 이익에 따라 즉흥적 행동에만 나선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렇게 행동하는 하나의 충동에만 먹이를 준 결과이다. 힘이 그렇게만 구조화된 것이다. 섭생, 사유의 훈련, 단기적 습관이 필요한 이유는 같은 충동이나, 같은 생각에 계속 먹이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도덕적 가치 표시가 어디에서나 먼저 인간에게 붙여지고 그리고 비로소 파생되어서 후에 행위에 붙여졌다는 사실은 명백하다......고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를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에게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이러한 도덕은 자기 예찬이다. 그 전경에는 충만한 감정과 넘쳐흐르고자 하는 힘의 느낌, 고도로 긴장된 행복과 베풀어주고 싶어 하는 부유함의 의식이 있다.”(니체, 『선악의 저편』, §260)
‘선’을 행해야 선한 것이지,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다. 악을 비판함으로써 선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reactive한 힘이다. 비판하고 저주하는 것은 자신의 역량과는 상관이 없다. 자신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 뭔가를 함으로써만 자신이 긍정되며, ‘선’이란 자신을 긍정하는 자, 강한 자가 하는 행위이다. ‘선’이란 어떤 것을 행하는 자의 존재방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어떤 행위로부터 구분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도덕이 만들어질 수 있다.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은 어떻게 다른가? 도덕의 선악문제는 자신의 존재 방식, 자기와 맺고 있는 힘의 느낌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주인, 귀족은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지 않으며, 자기의 판단과 선택으로 행위하는 자, 자신의 명령에만 따르는 자이다. 귀족이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스스로 자기의 모든 삶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노예는 명령을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귀족은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판단한다.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고 느끼는 행위는 안하면 그만이다. 강자는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상황에 맞선다. 반면 약자는 자신의 상황을 나쁘게 보기 때문에 상처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려 하며,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 따라서 약자에게는 자신을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이 악이다. 노후도 가난도 악이 될 뿐이다. 노예의 사유방식에서는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 인간이 바로 선한 인간이 된다.
가치의 발명은 사회적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존의 상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연습, 자신이 짓고 있는 좋고 나쁨의 편협한 인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거리의 파토스란 그러한 훈련을 통해 무리들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자부심, 스스로 자족,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자부심, 이성적 명예심 같은 것이다. 이는 남이 알아주는 것과 상관없는, 자신의 고유한 느낌이자 감정이다. 자신을 긍정하는 만큼, 기쁘게 되는 만큼이 자유이며, 거리의 파토스를 만드는 만큼이 역량이다. 강자는 자기를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강자에게 삶은 이미 행복이고 구원이다. 따라서 행복과 구원을 갈망할 필요가 없다. 반면 약자는 자기의 결여에서 출발해 자유와 행복을 갈망하지만, 자유와 행복을 꿈꾸기만 할 뿐 결코 그곳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힘의 구조화 혹은 정동의 체계 같은 말들을 곱씹게 되네요. 즉흥적과 편협함이란 말도 어느 지점에서는 통하는 것 같고요. '할 수 있음'을 따지는 게 아니라 '무언인가를 함'이 왜 중요한지 곰곰이 따져봐야 겠어요. 후...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멋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