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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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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3년간 달려왔던 스피노자 대장정이 마무리됩니다! 물론 내년에 스피노자의 개념들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긴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 일정은 다음 주까지입니다. 선생님들과 스피노자를 함께 공부하지 않았으면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텐데,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번 한 주 잘 달리시고 웃는 얼굴로 봬요!
다음 주에는 10시에 시작합니다. 확진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가능하면 오프라인으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간식은 따로 정하지 않을게요. 조금씩 가져와주세요~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본성’, ‘본질’ 같은 개념들이 참 어려웠죠. 아마 essence, nature 등을 번역할 텐데, 번역상의 문제도 있겠죠? 서양에서는 저 단어들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었겠지만, 동양에서도 성(性)이나 정(精) 같은 글자들도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어서 그 자체로 이해하기 쉽지도 않고 번역할 때 딱 들어맞지도 않죠.
하지만 크게 봤을 때, 인간을 자연적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니체, 동양의 맥락을 한 데로 묶어볼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와 니체의 윤리와 도덕은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된 지반을 밟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본성이란 자연이며, 모든 사물에 잠재된 자연으로서의 역량입니다. 이들의 철학은 무엇보다 우리 존재가 자연적 존재임을 이해하고, 그러한 역량이 모두에게 잠재돼 있음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신’에서 출발한 것이나 ‘원인에 의한 인식’을 강조하는 것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죠. 비슷하게 《중용》도 우리가 자연적 존재임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요, 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요, 도를 품절해 놓은 것이 ‘교(敎)’이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 - 《중용》 1장
*번역은 우응순 선생님의 《친절한 강의 중용》을 참고했어요.
‘성’과 ‘도’, ‘교’에 대한 구체적 해석은 일단 접어두고, 대략 인간의 실존과 윤리, 깨닫기 위한 실천 정도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자는 함축적이어서 곱씹을 때도 있지만, 너무 함축적이어서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단 말이죠.^^; 어쨌든 저 세 가지 차원이 같은 문장에 공존한다는 것은 어떤 초월적이고 외부적인 차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전지전능한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선하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신의 뜻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악마가 우리 본성에 잠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금욕과 고행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되는 것도 이런 도덕관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내재된 역량을 믿지 못할 때, 우리는 극도로 수동적인 실천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니체든 스피노자든 다른 어떤 철학이든 그들이 본성(혹은 존재)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질문을 제기하고, 어떻게 분석하는지를 배우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정념에 예속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자신의 해방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자들의 해방을 고민하지 않을 수밖에 없음에 이르렀죠. 니체는 ‘나(자아)’는 충동의 산물이기 어떤 충동에 먹이를 줄 것인지를 강조했죠. 이들은 모두 문제를 제기하고, 실존을 분석한 다음에 자동적으로 어떤 실천을 할 수밖에 없음에 이르렀죠. 결국 핵심은 어떤 문제를 어떻게 제기하냐겠네요.
이번에 모두 문제를 잘 제기해서 각자의 윤리를 발명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