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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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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과제에 대한 코멘트로 ‘니체의 도덕과 스피노자의 윤리’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일반적으로 윤리란 인간본성을 잠재우는 차원으로 말해지는 것에 반해 스피노자와 니체는 인간본성을 나쁜 것으로 전제하고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적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본성에 기초해서 도덕을 정초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습니다.
스피노자는 존재와 윤리를 보장하는 다른 절대적 존재를 요청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의 윤리를 구성할 수 있을까? 또한 ‘인간은 왜 자신의 예속을 욕망하는가?’과 같은 문제제기를 통해 정념에 예속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유롭게 될 수 있을까를 사색합니다. 즉, 자신의 본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성을 발휘하여 자신의 윤리를 구성해나갑니다.
니체가 ‘자기윤리를 입법하는 자가 되라’ 말한 뜻도 우리자신을 통해 구현되고 있는 변화하는 힘의 세계에서 출발하라는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충동(본성, 힘)의 차원에서 도덕이 정초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것이 부정되는 방식으로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윤리의 규칙을 가지고 살아야하는가?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도덕을 넘어간다고 말할 때, 그것은 비도덕이나 부도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단히 도덕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덕을 도출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를 지배한 도덕은 무엇인가? 왜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왜 그리 무거운 일이 되었는가? 어떻게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덕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등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번 주 강의내용은 「선악의 저편」 1~2장에 관한 것입니다. 그 중 일부를 정리하였습니다.
「선악의 저편」의 부제가 미래철학을 위한 서곡입니다. 여기서 미래철학은 다른 인식체계가 필요한데, 이러한 인식조차도 충동, 힘의 문제이기 때문에 윤리가 힘의 문제와 같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선악의 저편」은 어떻게 우리가 기존의 선악을 벗어날 것인가? 하는 현실적 질문이며, 그것의 삶의 실현 속에 미래적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재 속에서 펼쳐지는 것, ‘이행’의 느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의지
‘의지란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복합적인 것이며, 단어로서만 단일체일 뿐이다. ... 모든 의지에는 첫째로 다수의 감정이 있다고. (...) 다양한 감정이 의지의 구성요소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처럼, 두 번째로 사유도 의지의 구성요소로 인정되어야 한다. (...) 셋째로 의지는 감정과 사유의 복합체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의 정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명령의 정념이다. ’의지의 자유‘라고 불리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갖는 우월감이다.’ (선악의 저편 19./박찬국 옮김/아카넷)
위의 구절, 19절 나오는 의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모든 의지란 힘의 작용이고 복합적인 것이며, 모든 의지작용에는 감정의 다양함이 있습니다. 니체에게서 감정도 힘의 관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이렇듯 의지의 작용은 감정의 발생으로, 신체의 변용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신체의 변용에 따라서 관념을 형성하고 관념이 우리의 역량을 증감시키면서 정서를 발생시킨다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감정(정념에 가까운)과 사고의 복합체. 정서(명령- 자기에게 내리는 명령) 이 모든 것들은 하나로 묶여있습니다. 행위 하는 순간에 모든 것들 감정과 사고와 충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란 따로 없습니다. 그것은 행위 하는 순간에 집약되는 감정과 사고와 근육들의 힘들입니다. 의지하는 인간은 자기에게 명령하고 스스로 복종합니다. 이성이 명령하고 욕망이 복종한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명령하는 자이자 복종하는 자이며, 이것은 대립적이지 않습니다. 푸코가 말하듯 외부의 억압하는 자와 억압 받는 자의 외재적 구도를 깨야합니다. 우리는 행위 하는 것(결과)만 의지라고 굳게 믿게 되는데 그렇게 행위 하도록 어떤 힘들이 추동하는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서 본성과 다른 무엇을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합적인 힘들의 결과로서 나타나는데, 우리가 명령하는 것에서 오는 쾌(快)때문에 그 중 명령하는 자에만 동일시하여 자유의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명령하는 것 속에는 복종하는 것도 같이 들어있습니다.
도덕의 발생도 힘의지의 느낌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도 의지작용이 복합적인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명령하는 자와 동일시하다보니 이것을 도덕의 관점에서만 파악하게 됐습니다. 도덕 이전에 힘의지가 있는 것인데 철학자들은 과정을 생략하고 도덕의 관점으로 환원시켜버린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도덕이라는 것도 생명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발생하는 힘에 정초하고 있으며. 도덕은 자유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어떤 힘이 지배하는지, 힘의 문제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기계론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원인’과 ‘결과’를 그릇되게 사물화해서는 안된다.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들을 단지 순수한 개념들, 다시 말해 기술하고 이해하기 위한 인습적인 허구로서 이용해야지 사실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현실 그자체에는 어떤 인과적 결합도 필연성도 심리적인 부자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 실제의 삶에 존재하는 것은 단지 강한 의지와 약한 의지뿐이다.’ (선악의 저편 21./박찬국 옮김/아카넷)
자유의지든 부자유의지든 이것들은 모두 허구이며. 오로지 강한 의지인가 약한 의지인가만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인간 주체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의 관계에 대한 설명입니다. 어떤 관계 속에 강한 의지(포지티브한 힘의지- 차이자체를 긍정하는 것: 들뢰즈)일 것인가 약한 의지일 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스피노자에게도 능동과 수동이 대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겪는데 어떻게 능동화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겪음을 능동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던 대로 본다는 것은 역량이 하나도 안 커진다는 것입니다.(수동)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동일한 경험을 다르게 전환하는 사람도 있는데, 다르게 해석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 역량이 커지는 것입니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고 스피노자에게는 능동입니다. 이렇듯 스피노자에게서 능동이 된다고 하는 것, 니체에게서 포지티브한 힘의지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유사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포지티브- 네거티브,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능동-수동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능동과 수동이 대립이 아니듯이 니체에게도 강하다 약하다를 상대적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힘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강함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 차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기존의 해석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머물러있는 것을 약한 의지라고 이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