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2학기. ‘천일야화’ 두 번째 수업 후기.
2권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신드바드의 모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유명세답게 신드바드가 보여준 ‘상인’과 ‘부’의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었던 것 같습니다. 신드바드는 매번 장사를 통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꼭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고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부를 쉽게 나눠주곤 합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데도 오늘날에는 그렇지않으므로 이 점에서 우리는 좀~ 감동한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도 기쁘게 재물을 베풀어 내놓는 ‘희사’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슬람 문화에서도 ‘부자’는 재화의 축척을 하는 자가 아니라 ‘희사’도 같이 행하는 자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우리는 ‘부자’는 돈이 많은 것만을 의미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배움을 신드바드의 이야기를 통해 얻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도 ‘이야기’란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천일야화에서 ‘천’은 무한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무한성의 이야기라…. 수량적 의미도 있지만, 질적(?) 측면의 의미를 중점에 놓아야겠죠! 사실 저는 이 ‘무한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천일야화가 낯설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이야기의 시공간이 무한함을 보여준다는 것으로 접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사람들의 세상살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사건의 개연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요정과 정령이 인간의 사건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고 있어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인간 세상에 요정과 정령이 어울려져 같이 살았던 것이 사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니까요. 그런데…. 이 순간 새삼스럽게 내가 한계 짓고 있는 세상의 경계선이 선명하게 지각됐습니다. 사실 조그만 생각해봐도 세상의 경계선이란 것은 실제가 아닌 것이 대부분이죠. 또한, 그 분할 선들의 대부분은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 놓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죠. 이는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세상의 경계선을 확장하기도 하고 반대로 축소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천일야화는 이런 점에서 세상의 경계선이 없는 것처럼 무한의 인간 세상살이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허구적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real 한 이야기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보일까요? 도덕도 어떤 교훈도 없는 이야기, 천일야화의 주제가 뭐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밑도 끝도 없는 기상천외한 놀라움만을 안겨주는 것이 이야기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화자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청자가) 살인에 대한 죄도 사면해준다는 패턴으로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는데요. 인간이란 일차원적으로 지루하면 못 사는 존재이기에 뻔하고 예상되는 이야기는 지루하게 생각되겠죠. 그러므로 놀라움을 안겨주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놀라움이 우리에게 단지 지루함만을 해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채운 선생님의 말씀을 가져와 보자면, 인간의 본성 중에는 자신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과 닫아버리려는 욕망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권태가 찾아오면 미지의 세계로 떠나게 되고, 떠나가 있다가도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반드시 돌아오려 한다는 것이죠. (이야기 속의 신드바드도 매번 죽을 고비 앞에서 집 떠나온 자신을 원망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지만 이내 집에서 좀 쉬고 나면 다시 모험을 떠나는 것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본성 때문에 문명이 발전될 수 있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즉 새로운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서 인간은 낯선 것을 문명화시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놀라운 이야기에 매료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확장하고자 하는 긍정적 신호였던 것이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남아있을까, 이런 책을 왜 읽어야 할까 하는 것이 첫 시간부터 갖게 된 저의 궁금증이었는데, 나름 해결되었습니다.
천일야화의 이야기는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는 모든 면에서 아주 다름을 느낍니다. 무한성을 의미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슬람의) 세계관이 너무 독특하여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같이 읽은 ‘이슬람 문화’에서 그 낯섦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이 책에서는 아라비아인의 세계 인식을 ‘인과율(그리고 인간의 경우에는 자유의지)을 부정하는 비연속적 존재관이 이슬람 전통파의 근본적 철학’이라고 말하는데요. 사실 이들의 삶은 종교와 분리되지 않았기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이슬람 종교를 이해해야 합니다. ‘제 자신의 존재에 관해서 조차 완전히 무력한 사물이 있고서야 신의 의지가 자유자재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 신이 한 번의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세상살이 모든 것을 계속해서 관장한다는 의미라고 하는데요. 이 때문에 이슬람 사람들에게는 ‘인식된 사물이 모두 원자 상태로 사물이 모여 있다고 보는 특징 있는 세계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는 사건들이란 따로따로 떨어져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할 뿐, 그들의 사이에 어떤 내적 연결성이 없다는 전제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잘 이해 안 되시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ᄏᄏ 2주 동안 책 두 권 읽고 어떻게 이슬람을 잘 이해할 수 있겠어요!) 여하튼 분명한 것은 하나 알 것 같습니다. 천일야화 이야기 구조에서도 연결성 없이 계속되어 펼쳐지는 사건으로 이야기를 드러내는데, 이는 이슬람 문화에서 나온 이야기 구성의 특징 같습니다. 또한, 신드바드가 매번 장사를 통해 많은 돈을 벌고 난 다음에 가난한 자들에게도 충분히 베풀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적 기반이 크게 작동된 것 같습니다. 이슬람 종교는 ‘돈은 알라가 신드바드에게 시험을 들게 하고 이를 잘 헤쳐나갔기에 알라가 베풀어 준 것이지, 신드바드가 운이 좋아서 혹은 똑똑해서 돈을 번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자신에게 베풀어 준 신의 감사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사를 베풀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우왕~~~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심플한 삶의 윤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이상으로 후기를 마칩니다. 2학기 수업이 끝날 때쯤에는 천일야화의 놀라움에 모든 학인의 세상이 확장돼 있을 것 같네요.
이슬람의 세계가 우리에게 놀라움을 줍니다. 서유럽이 만든 근대문명에 안주하고 있는 터라 이슬람이라는 세계는 신드바드가 겪었던 놀라움처럼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세계, 은옥샘이 말한 천일야화 속 정령과 판타지적 요소처럼 우리의 지평을 넓혀주네요.
이슬람의 사유는 '인과율을 부정하는 비연속적 존재관'에 기반한다는 것이 가장 독특한 지점인 것 같습니다. 불교는 한 점에 수 많은 인연 조건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과도 다르고, 신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하는 기독교와도 다른,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한 없는 긍정성이 인과율의 부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알라의 뜻' 일 뿐이라는. 이 사유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어지네요.
ㅎㅎ우왕~~ 은옥샘의 목소리가 들리는 후기 잼께 잘 읽었습니다. 🙏 재밌는 부분들 콕콕 짚어주셔서 생각거리들 얻어가게 되네요.^^
지루함-놀라움, 머무름-떠남, 닫음-확장의 욕망을 동시에 갖고 있는 우리 존재는 정말 희한하고도 재밌게 느껴져요.
어제 같이 이야기 한 이슬람의 세계사도 그런 욕망들의 역사 그 자체인 것 같고요.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도 확장의 욕망이 작동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천일야화의 놀라움을 통해 모두 어떤 문 하나를 열게 될지 기대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