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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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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와 우리는 지옥, 연옥을 거쳐 드디어 천국에 올랐습니다. 천국편을 읽고 만난 우리의 아침 인사는 “너무 어려워~”였지요.ㅎㅎ(구절들을 곱씹게 돼서 재밌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요^^) 천국편은 확실히 페이지가 더디게 넘어갔던 것 같은데요. 곡의 초반부부터 하느님의 우주 작용과 같은 심오한 내용이 나와서 그런 것도 있고, 온갖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하다 보니 그 맥락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기도 했습니다. 어찌나 다양한 인물이 나오던지.. 주석을 뒤적뒤적 읽으면서 이 많은 인물의 특성을 파악하고 자신이 생각한 질서에 맞게 배치한 단테의 지성에 새삼 또 놀랐습니다. 그리고 세미나하면서 알게 됐는데, 지옥/연옥편에는 꽤나 들어있던 삽화들이 천국편에선 아주 많이 줄었다는 사실…^^도 우리의 읽기 속도에 영향을 주었겠지요. 흐릿한 형체의 영혼들, 올라갈수록 점점 더 밝아지는 베아트리체의 빛,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음악 소리 같은 것들을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걸까요? 어쩌면 밝고 흐릿한 이 천국의 세계는 눈의 시력이 아닌 마음의 시력으로만 포착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은옥샘께서 비전 이야기를 잠깐 언급해주셨듯이, 천국에서는 ‘빛’과 ‘봄(vision)’의 문제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후반부에서 좀 더 본격적으로 나오는 것 같으니 귀 기울여 보아야겠습니다.+_+
천국은 어떤 곳인가?
지옥의 징벌과 연옥의 정화를 지나 구원의 영역인 천국에 발 딛은 만큼 이 새로운 세계는 어떤 곳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었지요. 천국은 모든 곳에 빛이 비춥니다. 단테 역시 “하늘에서는 어느 곳이나 천국”(3곡)이라는 것을 느끼지요. 하지만 그 빛이 같은 밝기로 동등하게 비추지는 않습니다. 이에 의문을 품는 순례자를 향해 베아트리체는 빛을 비추는 성질에서는 다를 바가 없지만 하느님의 빛을 반사하는 정도(빛의 양)에 따라 그 밝기가 차이나는 것이라 설명하지요.(2곡) 이는 축복받은 상태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환기하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의지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3곡)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몇 번째 하늘에 있든 하느님의 의지, 하느님의 질서에 합치되는 삶을 산 자들입니다. 천국의 제일 낮은 하늘인 달의 하늘에 있는 자들도 비록 서원을 어겼지만 하느님의 빛을 발하고 있기에 이곳에 있는 것이죠. 이들은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자 하늘의 더 높은 자리로 오르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의지에 거하고 있는 이들은 뭔가를 더 바라는 욕망을 일으키는 대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의지” 속에 머물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천국을 만나며 모든 하늘에서 하느님의 빛을 느낄 수 있지요. 이는 어떤 하늘이 더 낫다고 느끼게 하기 보다 빛의 다양한 빛깔을 음미하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물론 그럼에도 더 정진해야 할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기는 한데 말이죠….)
그런데 그처럼 하느님의 의지 안에 거한다는 게 어떤 걸까요? 단테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주신, 그분이 가장 소중히 여기시고 그분과 가장 닮은 위대한 선물”이 “의지의 자유”라고 말합니다.(5곡) 세미나에서는 이때의 ‘의지의 자유’라는 말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의지’와 비교하여 이해해보고자 했는데요.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의지는 오롯이 나라는 주체에게서 비롯되는 힘이지만, 단테가 말하는 의지의 자유는 신과의 연결 위에서만 가능한 자유입니다. 그것은 ‘지성’이라고도 표현되는데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오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하며, 우리가 그분과 닮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잃게 됩니다. 의지의 자유를 잃은 상태가 곧 죄악의 상태입니다. 탐욕에 빠져들거나 분노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가 지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죠. 단테는 그 상태를 하느님의 의지가 실종된 상태, 부자유의 상태로 보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내 의지로’ 욕망하거나 화를 낸다고 여기는 것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럼 하느님의 의지 안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상황과 내가 분리되지 않는 것’, ‘서원을 지키는 것이란 하느님의 동의와 나의 동의가 합치되는 상태이다’ 등의 이야길 나누었는데 이 부분은 제가 소화가 덜 된 것 같아요. 의지의 자유와 관련하여 에세이를 쓰시게 될 샘의 글을 기다려봅니다.^^
단테 마음의 지옥-연옥-천국
2교시에는 채운샘이 준비해주신 불교의 우주 지도, 신곡 3세계의 지도와 그림들을 보며 불교와 신곡의 우주관을 생생히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양대산맥 두 종교의 우주관을 같이 놓고 보니 더 흥미로웠습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그러나 본질은 같은. 종교라는 게 인간이 이 삶을 어떻게든 견뎌내려고 만들어낸 담론이기에 시대가 변해도 없어질 수가 없다는 샘의 말씀처럼, 우리 삶의 조건과 우리의 상상력을 반영한 게 종교이기에 어떤 종교건 본질은 결국 같을 수밖에 없겠지요. 한편으론 우리는 왜 종교라는 걸 상상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왜 그냥 살 수는 없었을까? 어떤 식의 믿음이 왜 그토록 필요했던 걸까? 그게 바로 우리의 마음을 말해준다는 것. 층층이 쌓여 체계화를 이루고 있는 불교와 신곡의 거대한 세계가 말해주는 건 이것이 다 우리 마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정말 뜨헉 하게 되는 거 같아요. 마음은 얼마나 거대하며, 나름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가…. 신곡에서 ‘하느님의 질서’라는 게 잘 와 닿지 않았었는데, 여러 지도들을 보고나니 왜 ‘질서’라는 표현을 쓰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지옥-연옥-천국을 쓰고 있는 단테는 그 공간에 실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일은 곧 자기 마음의 세계를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채운샘은 그렇게 보면 천국도 연옥도 지옥도 다 같은 곳이지 않겠냐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꼭 죽음 이후의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것도요. 저는 그 3계가 저승만이 아닌 이승 자체를 말하는 걸 수도 있다는 건 좀 알 것 같은데, 지옥 연옥 천국이 같은 곳일 수 있다라는 건 아직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신에게서 구원 받는 것과 버려지는 것은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차이가 차이가 아닌 것인지..? 마음 하나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점에서 같은 곳인건지? 흠.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단테의 여정을 볼 때 그가 살았던 13-14세기 앞과 뒤를 보면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이전을 보면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이 이어지면서 혼란의 소용돌이가 내내 휘몰아쳤고, 그 암울한 상황들 속에서 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더이상 이전의 가치로는 그 상황들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가 힘들어졌지요. 한편 이 시대는 조금 뒤인 15-16세기에 피렌체가 경제적·정치적·문화적으로 강성한 도시로 자라나게 될 씨앗을 품고 있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전후 사이에 있는 격동의 시기, ‘경첩의 시기’에 살았던 단테는 그곳에서 비탄과 환멸을 경험했고, 추방되어 떠돌았습니다. 길 잃음에서 출발한 그의 떠도는 삶, 떠도는 공간을 그는 어떻게 허구화하려 했을까요? 어떤 여정을 그려내고 싶었을까요? 아마 길을 잃은 상태에서도 다시금 자기 비전을 찾는 여정이지 않았을지. 그 길 위에서 단테는 죽기 직전까지 십 여년 넘는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절실히 고민하며, 그것을 어떤 시공간으로 펼쳐낼지에 몰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펼쳐낸 지옥의 고통에는 단테 자신의 삶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지요.
여러 샘들께서 뽑아오신 단테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을 되새기며 단테 마음의 지옥-연옥-천국을 상상해 봐야겠습니다.
너는 네가 가장 사랑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것이니, 이것이 곧 너의 추방의 활이
처음으로 쏘게 될 화살이다.
남의 빵을 먹고사는 맛이 얼마나 짠지,
또 남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너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를 가장 무겁게 누를 것은
그 슬픈 계곡에서 네가 겪어 내야 할
둔감하고 비열한 자들이다.
(…)
그러니 선견지명으로 내게 힘을 주세요.
그리고 내게 소중한 장소를 잃을지언정,
내 시만큼은 다른 모든것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천국편, 17곡)
선의 왜곡, 빛을 보지않고자 함이 지성의 결핍이자 부자유라고 했는데도. 주어졌으니 그것을 보고 행하기만 하면 된다는데 그걸 믿기가 그렇게 어렵네요. 보지도 못하겠고 볼 수 있을만큼의 노력도 부족하고. ㅎㅎ. 신의 질서가 저에게 보장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탐욕에 빠져들거나 분노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가 지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샘의 말씀에 적극 공감합니다. 느껴지기는 커녕 그 힘에 휘말려 정신을 잃는다 말이죠.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밀려오는 자괴감. 부끄러움 수치심이 들죠. 지난 크크랩 강의에서 샘께서 "자기 자신이 존엄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언제냐?"고 질문하셨을 때가 생각납니다. 인간은 존엄하다는 매우 통속적인 표현이 그 자체로 빈말이라는 걸 체험할 때가 바로 탐진치의 힘에 휘둘릴 때가 아닌가 싶어요. 지성이란 일종의 눈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다른 세게가 아니라 동일한 세계에 대한 각기 다른 체험의 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에세이 쓸 걱정은 태산이지만 단테와 함께한 신곡 순례는 최고였습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천국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어서 더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연옥과도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래서 지옥, 연옥, 천국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곳들은 결국 단테가 살면서 경험한 마음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샘의 말씀이 공감이 되었어요. 빛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순수한 영적 세계... 우리는 이곳, 혹은 이 상태를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지... 어렵지만 그래서 또 재밌기도 한 거 같아요^^
천국조차 위계가 설정되고 혼돈이 있는 상태라는 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거 같은데요. 최고의 상태는 고통과 혼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란 걸 단테가 말하는 거겠죠. 인용한 시는 지옥이나 연옥에 있어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 지옥-연옥-천국이 공간이 아니라 상태라는 것,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 담주 얘기거리로 남겨 놓아요. 우린 답을 찾는 게 아니니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