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절차탁마Q 2주차(2/26) 공지
<신곡>을 읽고 만나는 첫 시간이었습니다. 두둥! 2,30대 상큼한 세 분과 함께 규문각에 둘러앉으니 더욱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구요. <신곡> 지옥편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재미있다, 시로 되어 있는지 몰랐다는 감상과 무엇보다 압권이었던 건 지옥편을 읽으니 일단 ‘연옥에는 꼭 가야겠다’ 생각이 들었다는 제주댁의 발언까지 수다가 이어졌죠. 면죄부 팔면 제일 먼저 살 사람이라는 놀림이 뒤따랐지만 꿋꿋해서 더 웃음을 주었네요. 뽑아온 문장을 돌아가며 읽고 토론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부족하더군요. 할 얘기를 다 쏟아 놓지 못해 답답하셨죠? 다음 주엔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문두에 올려 씨앗문장을 준비해오면 좀 더 풍성하게 얘기 나눌 수 있을 거 같아요.
<신곡>은 지상의 단테가 어두운 숲길을 거쳐 지옥, 연옥, 천국을 순례한 후 돌아와 기록한 것입니다. 왜 지옥에서 출발해 천국으로 갔을까요? 그리고 왜 천국에 머물지 않고 돌아와 목격한 것을 쓸까요? <신곡>에는 순례자 단테와 모험을 마치고 돌아와 글을 쓰는 화자 단테의 소리가 함께 들립니다. 읽다 보면 화자가 누군인지 헷갈리기도 하죠. 단테의 글쓰기는 지옥-연옥-천국의 순서를 거쳐 모험을 마치고 지상으로 돌아오게 되고, 글을 쓰면서 같은 과정을 다시 반복하는 순환성을 가지게 되죠. 토론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왜 꼭 글이여야 했는가’라는 질문이 있었죠. 우리의 삶이, 우리가 한 일이 그 무게만큼 되풀이 되고 순환된다는 의미이겠죠. 또 법률만이 죄를 묻고 단죄하는 기제가 아니라는 단테의 생각이, 대중을 향해 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형태로 쓴 것이 아닐까라는 이야기를 했었죠.
그럼 단테는 무엇을 죄로 보는 걸까요? 단테는 편파적이고 자의적으로 보일 만큼 자기 판단대로 죄를 구분합니다. 죄에 대한 판단이 단테가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애기일텐데요, 중죄와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죄와, 차갑게 합당한 벌을 묘사하는 게 상식적이지 않게 느껴집니다. 폭력, 살인보다 사기, 위선이 더 중죄이고, 배신은 가장 중죄에 해당합니다. 마음을 끊임없이 헤집어 놓아 현실에서도 지옥에 살게 하는 것을 가장 중죄로 보는 것 같아요. 이 지점에서 ‘죄란 무엇인가?’ 계속 질문하게 됩니다. 이 얘기를 토론에서 충분히 못해 조금 아쉬웠는데요, 다음 시간에 더 얘기해보면 좋을 거 같네요.
<신곡>에는 ‘디바인 코메디아 (신성한 희극)’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단테를 너무나 존경한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가 바친 부제라고 하는데요, 샘은 ‘해피엔딩’으로 심플하게 정의 주셨어요. 디바인은 어원으로 보면 ‘신과 인간의 소통과 합일, 천국과 지상의 연결’을 뜻하는데 <신곡>은 성스러운 라틴어 대신에 피렌체 속어, 아녀자도 아는 입말로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구어만큼이나 온갖 사건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지요. 디바인이라는 말 속에 세속성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것만 봐도 지옥편의 이야기들은 실제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사기꾼, 치정, 돈의 분쟁, 고리대금업자, 정치꾼의 거짓말, 성직자의 탐욕 등등 너무나 옆에서 일어나고 있을 법한 얘기들입니다. <신곡>에서는 성속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곳이 지옥인가요? 천국은 어디 있는 걸까요? 지옥과 천국이 다른 곳에 있을까요? 질문이 솟아납니다. 궁금증을 들고 <신곡>을 읽는다면 가장 즐거운 읽기가 될 거 같습니다.
우리는 <신곡>을 또 다른 방법으로도 읽고 있죠. 바로 아우어바흐의 해석과 함께 보는 건데요. 채운샘게선 아우어바흐가 기존의 4가지 독단테법(문자적, 비유적, 도덕적, 영적)을 벗어나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아우어바흐는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터키로 망명해 이스탄불 대학, 미국 예일대 등을 떠돌며 강의를 한 ‘경계인’입니다. 망명자적 위치에 있는 지식인이죠. 이 말은 그의 사유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디에도 온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누구도 온전히 그의 말를 수용하지 못하기에, 늘 주변부에서 정체성이 의문에 붙여지는 존재입니다. 그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며 해석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셨죠. 그의 해석이 그의 정체성이겠죠. ‘자신의 영토를 가진 자가 철학 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했다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에 따르면 그는 진정한 철학자일 겁니다. 이런 아우어바흐가 단테를 택한 이유도 단테의 디아스포라적 삶과 사유에 대한 동질성 때문이라 보여집니다. 단테는 피렌체의 총리까지 지내다가 정치적 소용돌이 말려 37살의 나이에 영구추방령이 내려져, 외지를 떠돌다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신곡>과 ‘신곡 해석’은 자신의 전통에 자기를 두지 않는 자들의 사유이자 ‘자기 만들기’입니다.
아우어바흐는 ‘리얼리티’의 관점으로 신곡을 해석합니다. <미메시스>는 아우어바흐의 유명한 문학 작품 해석서입니다. 미메시스는 “모방”이라는 의미로 플라톤이 사용한 언어인데요, 이데아라는 원본에 대한 ‘모방’을 말합니다. 플라톤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자연을 신의 모방으로 봅니다. 헌데 예술은 인간의 삶이나 자연을 한 차례 더 모방한 것이죠. 그러니 ‘리얼리티 재현’이 되는 거죠. 플라톤은 예술을 원본을 결여한 모방이라고 아주 폄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우어바흐는 모방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합니다. 모방에는 원본이 가지지 못하는 독특한 ‘고유성’이 있다고 말이죠. 예를 들어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면서, 그게 해바라기를 모방해 그렸다는 걸 알면서도 감탄을 합니다. 거기서 정말 ‘똑같이 그렸다!’는 것 이상의 다른 아우라를 느낍니다. 아우어바흐는 모방이 가진 이 고유성에 주목했고, 그러므로 모든 문학 작품은 ‘리얼리티’ 라고 말합니다. <신곡>의 인물들도 마치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한 곡 한 곡 지나며 만나는 인물들에 우리가 투영되어 같이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읽게 되는 걸 생각하면 그냥 이해가 되네요. 이런 오버랩을 종종 경험합니다.
아우어바흐는 신곡을 “형상 리얼리즘(피규어 리얼리즘)”으로 소개합니다. 형상이란 한 인물에 깃들어 있는 그 인물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고유한 영적 지성이라고 샘은 설명하셨죠. 신곡에서는 이 고유성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까지 그대로 구현됩니다. 이승에서의 삶은 곧 저승에서의 삶을 예고하는 것이 되죠. 카이사르에 맞선 카토는 저승에서도 현세의 모습 그대로를 완성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모든 인물들이 같은 형상을 보여줍니다. 아우어바흐의 해석으로 <신곡>이 더욱 쫄깃해졌습니다. 남아 있는 부분이 더욱 기대가 돼요. 본격적으로 신곡을 해석하기 시작했거든요. 이쯤하고 다음 부분 열심히 읽겠습니다.
다음 주 공지입니다
* <신곡> 지옥편 끝까지 읽습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 중심으로 씨앗문장 필사해서 일요일 밤 12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 아우어바흐의 <단테> 2장 읽어옵니다.
* 1주차 후기는 현주샘, 2주차 간식은 정옥
담주 월요일이 오기 전, ‘금요일 역사 시간’에 줌에서 다시 만나요~~~
저도 신곡이 예상과 다르게 재밌어서 깜짝 놀란 1인입니다.^^ 그렇긴 해도, 쏟아지는 인물들과 이야기들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해석을 시도해야할지 잘 감이 오지 않았는데, 첫 시간에 힌트들을 얻게 된 거 같아요. 얼른 다음부분들을 읽고 싶어지네요~
추방령에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었던 단테, 유대인이라 1930년 독일에서 튀르키예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우어바흐어. 그들을 통해 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물었던 에드워드 사이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유배된 자들 삶으로 단테를 읽을 수 있단 이야기가 정옥샘 후기를 읽다보니 새록새록합니다.
저는 단테가 사기와 배반을 가장 중한 죄로 본 이유가 그것이 인간이 가진 사랑과 믿음을 이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옥편>에서 배반은 "사람만이 지니는 악덕이기에, 하느님이 더욱 싫어하신다"(109p)라고도 하고, 또 그것이 "운명이 맺어 준 사랑의 끈을 끊어"버리며 "타고난 사랑과 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특별한 믿음을 파괴하는 극악"(111p)이라 표현하더라고요. 과연 지옥편 후반부 배신자들의 모습을 보니 처참하더군요.. 그들이 받는 벌도 벌이지만
그 불구덩이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증오만이 남아 물어뜯고 할퀴어대는 모습이요.. 사랑과 믿음을 잃은 그들은 마치 인간의 길을 스스로 끊어버린 자들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단테는 '타고난 사랑'과 '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특별한 믿음'이 인간에게만 주어진 덕이라고 보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연옥을 지나 천국으로 향하는 길에서 순례자가 그 덕을 어떻게 실현하게 될 지 궁금합니다+_+ 아직까진 추상적이게만 느껴져서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