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자탁마Q 1주차 단테 <신곡-지옥편> 후기 현주
1주 차 후기를 쓰게 되었다. 1학기를 옹골차게 <신곡>으로 채울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된다. 세계문학이나 영화를 보면 꼭 <신곡>에서 모티프를 얻어온 작품들이 많아 언젠가 한 번은 읽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첫 장을 펼쳐보니 처음 접한 서사시 형식이 낯설고 당황스러워 제대로 읽기도 전에 덮은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내용이 많다고 느꼈는데, 교회나 성경 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었기에 어떤 식으로 <신곡>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함이 컸다. 그런 의미에서 <신곡>과 함께 읽는 역사교재 <연옥의 탄생>, 철학 교재 <세속을 노래한 시인 단테>를 통해 습득하는 낯선 종교와 역사의 흐름을 함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첫 번째 문학 토론 시간 대화 내용 정리
: 왜 꼭 글이어야 했는가?
단테는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목적을 문학 작품으로써 구현한다.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법이다. 실제로 지옥의, 잘못하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라는 개념은 법 체제와도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 즉 법을 이용해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게 되면 현재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듯 대부분이 군말하지 않고 따르거나 더욱 매끄럽게 통용될 것이다. 단테는 정치가이기도 했으니 본인이 시도했다면 법적, 정치적 방식으로도 구현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테는 글쓰기를 선택했다. 왜 꼭 글이어야 했을까?
법은 어떤 개념이 불변으로 명시되는 체제다. 한 번 정해진 것은 바꾸기 쉽지 않으며 온갖 어렵고 장황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접근성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신곡> 속 화자 단테는 극 초반의 지옥에서 고통받는 존재들을 보며 동정심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모험이 계속될수록 동정심은 잦아들고 그들을 엄격하게 지나쳐간다. 이처럼 계속되는 모험을 통해 변화하는 단테의 모습, 지옥에서 만난 자들과 부딪히며 생기는 여러 에피소드, 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묘사와 단테의 곁에서 언제나 올바른 답을 이끌기 위해 도와주는 길잡이 베르길리우스. 단테의 모험은 모험인 동시에 일상, 즉 장소만 지옥이란 특수한 곳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일상적인 형태를 취한다. 또 법이나 제도로는 풀어내지 못하는, 그것만으로 엄격하게 단죄하지 못하는 심적, 감성적 차원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 위해 글쓰기를 도입한 것은 아닐까? 하는 얘기를 나눴다.
앞서 말했던 일상적 형태에 주목해 보자. <신곡>은 당시 특권층이 쓰던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의 구어체로 쓰여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읽고 나누는 게 가능했다. 즉 단테는 많은 언어 중에서도 이탈리아 구어체를 선택해 글을 썼다. 이것엔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 계층에 상관없이 다양한 국민이 읽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신곡> 속 순례자이자 작가 자신이기도 한 단테에겐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한 뚜렷한 목적이 있다. 그렇기에 지옥에서 만나는 이들의 모습. 즉, 지상에서 배신, 자살, 탐욕, 위선 등의 죄를 저지른 이들 앞에서 더욱 대비된다. 지옥에 떨어진 이들은 어떤 희망도 없다. 그들은 빛도, 구원도 없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다. 단테는 각 고리에 있는 죄인들과 그들이 생전에 저질렀던 죄들,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하나의 표상으로 작용한다. 즉 ‘올바른 길을 가려는 단테’와 ‘올바르게 살지 않아 지옥에 빠진 죄인’들을 비교함으로써 행실과 태도, 믿음 따위의 영역을 스스로 생각해 보게끔 만든다.
: 단테가 말하고자 하는 건 금욕주의인가?
지옥은 희망도, 빛도 없는 곳이다. 그곳에는 신의 방문도, 연옥이나 천국으로의 오름도, 고통의 멎음도 상상할 수 없다. 즉, 지상에서 벌인 죄들에 대한 벌을 죽어서 받는 것이다. 죄질도, 살아온 시대 배경과 나라도, 많은 것이 다른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옳았다는 논리에 빠져 반성하거나 뉘우치는 기색이 없다. 그렇긴 때문에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와 연결되는데, 지상에서 벌인 악행을 죄라고 인식하고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무분별한 상태가 희망 없음과 연결되는 것이다.
단테는 그런 죄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각자의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표출하여 저지른 죄들. 불륜, 배신, 사기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면 매우 체계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고리 속에서 벌을 받는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금욕주의를 권장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욕망이란 때로 삶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고, 그것을 억누르고 참는 것이 가능할까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과연 단테는 금욕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지옥은 어둡고 눈먼 세계다. 빛이 없기 때문에 나도 보이지 않고, 상대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곳에서는 서로가 어떻게 행위 하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이 두 가지, 즉 희망이 없고 빛이 없는 곳인 지옥은 ‘이성이 욕망의 멍에에 완전히 씌워져버렸’기에 벗어날 수 없다. 지옥이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로써 다가오는 순간이다. 그럴 때, 즉 무언가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순간 우리는 여태까지의 행실을 돌아보게 된다. 설령 지옥에 갈까 두려워 발심했더라도, 나는 어떤 욕망을 갖고 사는지, 혹시 저런 죄를 짓고 살진 않는지 따위를 말이다. 그렇다면 앞서 말했듯 단테가 지옥의 죄인들이 받는 고통을 보여주는 이유는 금욕주의를 권장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즉 고통받는 죄인과 그들의 죄질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이런 식의 욕망의 노예가 된 삶을 경계하고, 경멸하라고 알려주는 것일지 모른다.
물론 이 또한 금욕주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은 욕망에 따르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욕망을 하나의 범주로 완전히 묶어 그 개념 자체가 나쁘다고 억누르는 것과,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분별하자고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단테는 앞서 말했듯 지옥의 초반 고통받는 모습들을 보며 동정심을 비추지만 더 깊은 고리로 들어갈수록 그들을 대하는 것이 냉담해진다. 길잡이 또한 단테의 이런 변화를 칭찬하니 단테가 직접 마주하고 생각한 끝에 나온 결론, 즉 욕망의 멍에에 갇힌 것으로 지옥의 영원성을 입증해버린 죄인들에게 줄 것이 냉기뿐임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의 욕망이 어떤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건지를 알아차리는 것과 금욕주의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단테는 순례자의 변화를 통해, 또 지옥을 영원히 배회할 죄인들의 어쩌면 진정한 죄, 무명을 비판하는 것 같다고 정리해 본다.
사실 1주 차였던 만큼 이번에는 토론보다는 단테에 대한, 또 지옥이나 <신곡>의 전체적인 배경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신곡-지옥편>을 읽으면서 지옥의 느낌이 불교의 지옥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신곡의 지옥은 림보를 제외한 곳에 있는 죄인들은 절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윤회 사상 또한 상당히 경계하는 등의 차이가 있었다.
두 번째 채운샘 철학 시간 정리
: <신곡>, 어떻게 독해해야 할까?
<신곡>은 지옥,연옥,천국 편을 전부 다 읽고 이 공간을 어떤 식으로 구조화, 시각화할 수 있을지 염두에 봐야 한다. 샘은 단테의 여정을 지도화한다면 어떤 식으로 그릴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셨다. 또한 구조화와 함께 우리는 단테가 구성한 시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지옥, 연옥, 천국은 이미 죽은 자들의 공간이다. 죽은 자들이 있다는 것은 과거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전부 현재의 단테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고 연결되어 있는 자들이다. 즉 과거의 인물들이나 현재와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지옥의 자들은 미래를 볼 수 있다. 2주 차 분량에 미래를 본 한 죄인이 단테에게 그가 겪을 미래를 예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지옥이 죽은 자들의 장소이기 때문에 과거에만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 샘은, 신곡을 읽을 때는 시간과 공간의 전체적인 구조를 그려가면서 읽으며 철학 교재에서 제시하는 철학적 배경을 적절히 섞어 이해해야 한다고 하셨다.
+ 신곡을 영어로 하면 디바인 코메디아(신성한 희극, 해피엔딩)다. 번역판에도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라고 부제목이 붙어있다. 코메디아, 희극, 하면 웃기고 익살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샘은 해피엔딩을 뜻한다고 하셨다. 지옥에서 시작하지만 천국에서 끝나는 것. 그렇기에 신곡은 코메디아다.
: 아우어바흐의 읽기
보통 중세 문학을 읽을 때는 4가지 방식 ‘문자적, 비유적, 도덕적, 신비적 해석’을 전부 동원해 읽어야 한다. 이는 문자에도 능통해야 하고, 종교적 맥락도 이해해야 되고, 도덕적인 부분과 내용에 깃들어 있는 영성까지 모두 파악해야 진정으로 ‘읽는’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우어바흐는 이 4가지 방식을 과감하게 벗어나 단테를 재해석한다. 그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단테를 독해하고, 풀어냈는지에 앞서 아우어바흐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들었다.
아우어바흐는 독일 출신의 유대인 학자로 대학에서 로망스어학(중세 라틴어 시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간 프로이센 도서관에서 일하며 번역도 하고 책을 집필하기도 하나 나치 정권 등장으로 독일에서 쫓겨나 이스탄불, 예일대 등을 떠돈다. 시대의 역사성 속에서 망명인이 된 것이다. 즉 아우어바흐는 디아스포라로써 자기가 떠나온 곳에서도, 자기가 현재 있는 곳에서도 타자로써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경계인이 되었다.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에 그 시선과 관점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존재한다. 단테 또한 정치적 문제와 얽히며 자기가 있던 자리, 나라에서 추방당한 뒤 죽을 때까지 돌아가지 못했다. 아우어바흐가 단테를 선택한 것에 이렇게 정체성과 결핍에서 비롯되는 공통점에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영토를 가진 자가 철학을 할 수 있을까?’란 에드워드 사이드의 질문은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의 중심(역사, 정보, 네트워크, 전통 등)에서 밀려나 주변부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위치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문학을 해석할 때 중심에 있는 자들은 바로 그 위치 때문에 전통적 사고, 해석의 계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경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위치로부터 발생하는 의문과 질문을 유지하며 텍스트를 읽는다. 즉 이들에게 텍스트를 독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풀어가고, 자기 말하기의 노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아우어바흐의 <신곡> 독해는 어떤 전통이나 계보에도 자신을 위치 시키지 않는 저항성과, 그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적립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 아우어바흐가 해석한 <신곡>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개념은 ‘미메시스(모방, 묘사)’이다. 이는 플라톤이 제시한 개념으로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으로서 쓰였다. 플라톤에 따르면 예술은 모방의 모방이자 하찮은 것이었다. 한 화가가 울창한 나무를 그렸다고 가정하자. 그럼 그림의 모델이 된 실제 나무가 있을 것이다. 화가가 그린 나무 그림은 절대로 원래 나무에 도달하지 못한다. 즉 모방물인 나무 그림은 아무리 노력해도 원본인 나무가 가진 것들을 다 담아낼 수 없다.
그러나 아우어바흐는 원본과 모방은 비교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원본은 원본대로, 또 원본을 토대로 그린 회화는 회화대로 새롭게 생겨난 고유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원본을 따라 그린 모방본 나무 회화 또한 그만의 리얼리티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우허바흐는 문학 작품 또한 그런 고유성, 그 작품만의 리얼리티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문학의 관점에서 예를 들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는 가공의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마치 실재하는 사람처럼, 그가 꾀를 내는 장면 따위를 보면 그 행위에 설득이 되고 이어지는 사건들을 예측해보기도 한다. 그 인물이 슬퍼하고, 기뻐하는 감정에 설득력을 느끼고 동화되는 것이 바로 리얼리티이다. 또한 아우어바흐에게 중요했던 것은 피규어(형상적) 리얼리즘이다. 그에게 형상은 각 인물 마다 존재하는 고유성, 그 인물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행위성과 영성을 의미한다. <신곡>의 주인공 단테도 형상적 리얼리즘을 갖고 있다. 단테는 죄인들을 만날 때마다 동정하고 연민을 느끼며 의문을 가지면서도 냉담하게 대하기도 한다. 이런 단테만의 반응과 고뇌와 질문들을 따라가면 그 인물 고유의 어떤 영적인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후기를 마무리하며. 나에게는 모든 책들이 그렇지만 <신곡>은 특히 처음 몇 장 넘어가는 게 너무 어려웠던 것 같다. 서사시 형식도 낯설고, 책 안에서 잘 알지도 못하겠는 의미를 찾아야 될 것 같아서 전전긍긍하는가 하면 거의 몇 곡 분량 합친 것 같은 주석은 약간의 스트레스를 증폭시켰다. 그런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1주 차 분량을 읽어나가다 보니 낯설던 시스템에 적응하고, 내가 알고 있는 종교의 지옥관과 신곡 속 지옥의 모습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었다. 물론 겉만 핥고 있겠지만…. 어려웠던 개념들도 다른 샘들과 얘기 나누는 과정에서 조금씩 풀어지는 것 같다.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나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들이 지옥을 만드는 것일지도요. 지난 세미나에서 '이성이 욕망의 멍에에 완전히 씌워진'이란 말을 들었을 때 욕망의 멍에와 대별되는 이성이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궁금증이 생겼어요. 이번 후기를 읽으며 '지옥이 말 그대로 지옥 자체로 다가오는 순간'이란 무엇인지 또 하나의 궁금증이 더해지네요.
공들여 써주신 후기 잘 읽었습니다~! 첫 시간의 토론과 강의 내용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확실히 신곡만 읽었다면 이 정도로 재밌지 않았을 거 같아요. 아우어바흐와 연옥의 탄생, 그리고 채운샘의 강의와 우리의 토론이 어우러져서 어떤 신곡이 완성될지 궁금해집니다.ㅎㅎ 담주엔 샘도 함께 둘러앉아 얘기나눌 수 있길 기대해보아요!😊
옹골찬 후기 잘 읽었습니다 현주샘!^^
연옥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현주샘 말씀처럼 지옥이 얼마나 완전한 어둠, 무명의 세계인지가 새롭게 느껴집니다.
어둡고 눈 먼, 뉘우침이 없는,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고 있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들의 세계... 채운샘 말씀처럼 신곡을 마음의 문제로 읽어본다면 우리가 저런 상태일 때가 곧 지옥 속에 있는 거겠구나란 생각에 아찔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