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왜 ‘연옥의 탄생’인가?
연옥의 탄생이 보여주는 역사성
중세 사상의 아름다운 완결편이란 평을 듣고 있는 단테의 『신곡』은 14세기(1308~1320)에 쓰였다. 앞선 13세기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학자들이 중세 유럽의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스콜라철학을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시기다. 신곡에서 여인의 사랑을 통해 신적인 사랑으로 나아간다는 형상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그 중에 사랑의 이론)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으로 형성되는데, ‘연옥’이란 개념이 공간을 칭하는 명사가 된 것은 12세기말에 이르러서다. 그 전에 연옥은 ‘정화하는’과 같이 상태나 상황을 나타내는 형용사적 용법으로 사용됐다. 단테의 신곡은 지난한 과정을 통해 12세기 말과 13세기에 새롭게 탄생한 시공간의 체제가 반영된 책이다.
『연옥의 탄생』은 시공간에 대한 상상체계가 이분법적인 것에서 삼원적 세계로 바뀌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 형용사가 명사화되는 과정, 이런 근본적인 변화의 과정을 읽는 활동이 만만치 않다. 연옥이라는 ‘저승적 지리의 변경’이란 사회가 온통 종교로 침윤되어 있던 시기에 ‘우주의 지리를 변경’하는 일이었다. 또한 연옥이라는 시공간의 탄생은 내세의 시간을 현세의 역사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 사이의 관계를 변모시키는 느리지만 근본적인 정신적 혁명이자 삶을 바꾸는 것이었다. ‘연옥 신앙의 출현과 수세기에 걸쳐 연옥이 형성된 시기’로서 자크 르 고프가 보여주는 중세는 그것의 ‘암흑기’라는 이미지를 탈각한다. 연옥의 형성을 통해 본 중세는 오히려 현대 서구 세계의 근본 지평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중간적 범주’와 ‘제3계급’을 출몰하게 만드는 정신적 혁명이 이뤄진 시기다. 또한 연옥의 탄생을 통해 본 중세는 현대 서구 문명의 체제나 구조, 사고방식이 형성되기까지 작동한 힘 혹은 배제되고 사라진 이질적인 힘들을 동시에 보여준다.
역사적 현상이란 아이가 모태에서 나오듯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자크 르 고프는 말한다. 모든 사회와 시대는 자신의 유산들 가운데서 ‘선택’을 하는데, 연옥은 라틴 기독교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선택’한 ‘중간적 저승’이다. 이때 선택이란 것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역사적 현상을 선택이라고 정의할 때 이 선택을 정체성의 형성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좋겠단 의견이 있었다. 연옥은 4세기부터 - 더 멀게는 기독교 이전 고대부터 – 저승에 관련한 이미지와 관념들 중 어떤 것들은 수용하거나 배제하고 변형하면서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이미지나 관념의 생성과 변형, 해체가 반복됐다. 연옥과 흡사한 개념이 비단 12세기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연옥과 같은 기독교의 저승관이 출몰한 시기로 기독교 기원 전후, 3~7세기, 12~13세기가 언급된다. 이중 연옥이란 개념을 끝까지 밀고가서 체계화 한 시기는 12~13세기였다. 심지어는 연옥에 대한 이단과의 갈등이 연옥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형성된다는 것은 주어진 연옥이라는 개념이 확정되고 그것이 곤고해지는 과정이 아니었다. 연옥은 그것을 출몰시키고자 하는 충동과 그것을 위협하는 이질적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 역사적 현상을 ‘선택’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는 자크 르 고프의 말에서 인간의 능동성을 요청받기도 했는데 역사서를 읽을 때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인 것 같다.
영혼은 물질인가, 비물질인가
답이 너무 뻔한 질문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에 거의 모두가 한 마디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당연해서 일말의 의심조차 없었던 부분이 무너지는 즐거움 때문이었을까. “징계의 장소로서의 연옥을 믿는다는 것은 영혼과 육체의 관계가 규명되었음을 전제로 하고(...) 육체와 분리된 영혼들은 그 나름의 물질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래서 연옥의 형벌들은 그들에게 마치 육체적인 것과 같은 고통을 줄 수 있었다” 대목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는다. 며칠 전 단테의 「지옥」편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이 느끼는 고통은 당연히 육체적인 형벌이라고만 생각했다. 기독교적 저승관에 의하면 최종심판에 이르러서야 육체를 되찾는다. 그렇다면 지옥에는 영혼들만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물질성을 지니지 않은 것, 영혼에 고통을 가할 수 있는 것일까,하는 혼란이 찾아왔다. 고통이나 감각을 육체적 감각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나로서는 영혼에 고통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물질과 비물질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물질이고 무엇이 비물질, 혹은 정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연옥을 의미하는 ‘정화하는 불’, 이 불의 성격도 다의적이었다. 사소한 죄를 태워 사면하는 역할을 하는데, 고통을 주는 형벌의 도구이기도 하다. 또는 이것을 통과할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한 시험대의 역할로 그려진다. 정화의 불이라면 고통을 주는 형벌의 역할을 해서는 안될 것 같은데, 불을 지나는 과정은 너무 고통스런 과정이 아닌가. 그렇다면 물질적인 불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정화하는 불에 대해 갖는 혼란은 연옥이 형성되던 시기에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런 혼란을 『연옥의 탄생』을 읽는 과정 중에 계속 겪으면서 자신의 구분선이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이 외에도 중간적 장소의 필요성을 왜 지식인들이 느끼게 됐는지, ‘대도’가 연옥의 탄생과 관련해서 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는지, 르네상스 이후 연옥이라는 개념이 희미해진 것은 아닌지 등 질문들이 있었다. 이 질문 중 일부는 연옥을 교회가 권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지어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 질문들은 놓지 않고 이후 읽으면서 좀더 알아갔으면 좋겠다.
왜 중세를 공부하는 것일까. 지금 우리에게 암흑기라는 중세의 이미지를 변형하고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활동은 ‘연옥의 탄생’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새로운 토대를 만드는 과정이다. 느리지만 근본적인 혁명. 기독교 이전, 고대 이교도 저승관의 요소들의 의미를 변형시켜 연옥이라는 새로운 시공간과 사고방식을 만들어낸 역사가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론 괜히 가치를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중세라는 시기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는 바람도 있다. 배제의 감각이 무의식적으로 작동되는 중세를 알아감으로써 배제와 혐오의 영역을 줄여가기.
한 학인이 바보가 죽으면 고래가 된다고 했다. 거북이는 바다에서 죽은 영혼을 태워 나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먹을 것을 준다고 한다. 이런 사고방식과 행위가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우스개로 듣는 나를 보면서 내 삶에서 저승이나 죽음 이후란 시공간이 점점 배제되고 있음을 느꼈다. 자크 르 고프는 단테의 신곡을 이렇게 평한다. 지옥에서 연옥, 연옥에서 천국으로 인간의 사고로 공간화할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되고 팽창됐다고. 단테의 신곡에 부여된 의미를 따라 우리도 점점 축소되는 관계성 혹은 우주의 지리를 확장하는 여정으로 연옥의 탄생을 공부해 보면 어떨까.
* 다음 번 발제는 2장-정아, 3장-정옥, 4장-현주입니다.
* 다음 역사 세미나는 3월의 첫날이네요. 3월 1일 금요일 10시 30분에 줌에서 만나요.
이제 신곡도 연옥편으로 들어가니 곧 '정화하는 불'과 만나게 되겠네요.^^ 영혼과 육신, 영혼의 물질성 문제는 생각할수록 알쏭달쏭합니다. 이번 강의에서 샘께서 던져주신 화두, 지옥에서 영혼들이 당하는 고통은 어떤 고통인가,와도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겠고요. 잘 읽었습니다!
“연옥의 형성을 통해 본 중세는 오히려 현대 서구 세계의 근본 지평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연옥은 그것을 출몰시키고자 하는 충동과 그것을 위협하는 이질적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
중세는 너어무 옛날이라는 생각에 당대인들에게 이입도 쉽지 않을 것 같고 재미도 별로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편견이 있었는데요. 이번에 같이 책 읽고 샘 후기 읽으면서 “새로운 토대를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중세 공부가 무척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설레네요. 충동들과 그것들 간의 얽힘에서 탄생하게 되는 지평을 만나며 우린 또 어떤 충동을 작동시키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