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3주차(3월 4일) 공지
3주차, 단테의 『신곡』과 함께 하는 1학기가 벌써 중반을 향해 있네요. 이번 주는 ‘명성’에 대한 베르길리우스의 입장과 ‘죄나 지옥’의 경계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명성을 타인의 인정보다는 자신의 당당함이나 떳떳함으로 이해하면서 의문이 좀 풀렸습니다. 그런데 죄와 지옥은 여전히 생각거리로 남았네요. 그리고 내심 궁금했던 신곡의 두 안내자가 의미하는 바를 들을 수 있어서 반가웠구요.
신곡에서 안내자, 왜 베르길리우스에서 베아트리체일까?
저승의 안내자로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지옥, 연옥, 천국으로 나뉘지만 지옥, 연옥과 천국 사이엔 보이지 않는 또다른 경계가 있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차이이기도 하지요. 인간 지성으로도 이해 가능한 세계와 그 너머 신의 은총과 사랑이 아니고서는 다다를 수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예수 탄생이라는 신의 은총(Grace)의 역사가 이뤄지기 전의 인물로 인간 지성의 상징인 그는 지옥과 연옥을 안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신이 육화된 사건, 즉 신의 사랑과 계시를 받지 못한 자이기에 천국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천국의 안내는 사랑이 육화된 존재인 베아트리체가 맡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인간의 지성만으로 본질을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했지요. 반면 4세기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통해 인간의 지성으로는 자유를 얻을 수 없고 신의 계시나 은총과 같은 외부의 힘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즉 인간 지성의 한계를 자각한 것이죠. 종교가 사회에 침윤되어 있던 시대에 인간 지성이란 초월적인 신 존재를 증명하는 역할을 했겠지요. 그러던 것이 10세기 서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연구가 활발해지는데요. 7~8세기,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정복 전쟁 때 아랍어로 쓰인 그리스 철학들이 서유럽으로 역수입됩니다. 이는 기원전 4세기에 페르시아까지 영토를 확장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 전쟁으로 중동 지역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 전해진 덕입니다. 자연을 범주화하고 분류하는 지성의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이교도의 철학으로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이 구원이나 신존재 증명과 같은 기존의 철학을 고수하는 자들과 대립하게 됩니다. 13세기, 단테보다 한 세대 앞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이룬 신학으로 중세철학을 집대성하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주석을 달아 체계화했는데요, 이때 이성은 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서 이성이 신의 질서 안에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지요. 이후 이성은 신앙과 분리되면서 인간과 이성 중심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지만요. 단테의 신곡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룬 지적 풍토에서 탄생합니다. 신곡은 초월적인 존재의 육화된 사건처럼, 신앙과 이성이 분리되지 않은 결합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지요. “신학도 현실 전체의 지평 안에서만 전개될 수 있고, 현실 전체에서 단 한 요소도 신학적 숙고의 대상에서 배제되어서는 안되는” 세계, 베아트리체는 세속과 성이 분리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결합된 세계를 상징합니다. 이 외에도 단테는 이탈리아에서 발흥하는 시쓰기에서도 영향을 받는데요. 신곡은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꾀한 스콜라철학과 이탈리아 문학의 특수성이 종합된 ‘사상적 맥락의 종합’이라던 채운샘의 말이 기억나네요.
「지옥」편 – 죄는 어떤 지점에서 발생할까
「지옥」편에서 죄와 형벌, 지옥의 경계가 아리송해진다는 말에 채운샘은, 단테는 기독교의 교훈이라는 레토릭으로 환원되지 않는 글을 쓴다고 하셨지요. 살인보다 중한 사기나 배신과 같은 죄의 위계나 지옥에 있음에도 당당한 이들이 혼란스러웠고, 때론 이들이 왜 지옥에 있는지 의아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감수성과 달리 살인보다 배신을 중한 죄로 다루는 지옥편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요? 배신이란 명목으로 실정법에서 처벌받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에서 일어난 일은 세계나 삶과 무관한 것일까요? 혹은 마음 먹은 것이 실패했다고 할 때 그렇다면 그것은 발생하지 않은 일이 되는 걸까요? 우리의 마음에서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지요. 그럴 때 행위의 시작이란 어디서부턴지 묻게 됩니다. 죄의 발생 지점을 묻는다는 것은 행위의 시작을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죄가 마음에서 비롯된다면 그것은 속성일까요, 행위일까요?
신곡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희년 – 모든 사람이 죄를 씻을 수 있는 때-으로 선포한 1300년의 부활절 전후 일주일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1307년부터 1320년이란 긴 시간에 걸쳐 쓰였죠. 그중 지옥은 하룻 동안의 여정이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사흘에 걸쳐 펼쳐친 「연옥」편을 읽게 되네요. 심연이라는 지옥을 뚫고 우뚝 솟은 산으로 형상화 된 연옥의 여정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깃거리를 던져줄까요. 다음 주 강의에서는 중세 시대에 ‘영혼’은 무엇으로 이해되었는지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연옥의 탄생』 세미나에서 영혼의 고통이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터라 다음 주 강의에서도 귀를 쫑긋거리게 될 것 같아요.
《공지》
* 신곡, 「연옥」편 18곡까지 읽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중심으로 씨앗문장 필사해서 일요일 밤 12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 아우어바흐의 <단테> 3장 읽어옵니다.
* 2주차 후기는 은옥, 3주차 간식은 경희.
* 『연옥의 탄생』 2~4장, 이번 주 금요일에 줌에서 다시 만나요.
지성과 신앙(은총), 앎과 믿음의 문제도 그렇고, 죄에 대한 문제도 그렇고, 생각해볼 거리가 풍성하네요! 그리고 공지를 읽다보니 문득, 지옥에서의 '하루'와 연옥에서의 '사흘'은 무슨 의미일지도 궁금해지네요. 신곡 읽기의 즐거움~^^
지옥편을 읽으며 '죄'는 여전히 걸리는 문제로 남아있네요. '마음'에서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도 더 생각해 볼 일이구요. 아우어바흐가 텍스트를 읽어내는 태도도 공부하는데 매우 자극이 되네요. 즐거운 읽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