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절탁Q (신곡) 2주차 후기. 은옥
〈신곡〉 ‘지옥’ 편을 2주에 걸쳐 다 읽었습니다. 이번 주도 지난주에 이어서 단테가 보여준 ‘죄의 기준이 뭐냐’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학인들도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심지어 ‘죄’가 무엇인지 그마저도 헷갈리는데요, 아마도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죄가 ‘도덕’(선/악)적으로나 ‘법’(죄와 처벌)적으로나 저의 기준에서는 부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호메로스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 성인들이 지옥의 첫 단계 ‘림보’에 있는 것과 오디세우스 같은 전쟁 영웅들이 죄의 경중이 무거운 여덟 번째 지옥에 있는 것을 보고 단테가 지닌 시대적 한계성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단테 〈신곡〉의 탁월함은 그의 삶이 기독교를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리에 맞게 모든 것을 교훈적으로 환원하여 신곡을 쓰지 않았다는 점, 그래서 지금까지도 ‘지옥’편의 어떤 지점을 가져오더라도 다양한 층위로 ‘죄’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죄의 기준’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면 각자가 규정한 ‘죄’의 정의, 그 이성적 사고에 틈을 만드는 것이었네요.
토론 중에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풀어 보자면, 한 학인은 죄를 짓는 행위의 순간과 지옥에서 그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되는 순간, 이 두 가지 순간의 동시성을 생성의 관점으로 이야기했는데요, 지옥은 시간의 개념이 없고 영원하므로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동시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행위에 사후의 판결까지도 가해지는 것이므로 이런 삶의 태도야말로 완전 천국행이지 않을까요? 행위와 함께 자동적으로 지옥에서 벌 받는 모습이 동시에 그려진다면 나쁜 짓을 할 수 없겠죠. 또 다른 학인은, 우리가 모르고 저지른 죄들도 수두룩 하다는 말과 연관해서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다’라는 예를 가져왔는데요. 사기 친 친구도 죄가 있지만 쉽게 돈을 벌고자 했던 사기당한 자의 욕심도 죄라는 것이죠. 이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 주위에 발생 되는 사건들은 매번 다르게 선/악으로 분열되고 그 선/악은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선생님 말씀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토론의 마지막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의 질문이 등장하게 되죠. 저는 이번 주 강의와 연관 져서 이 질문을 생각해 보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시대가 ‘새롭다’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드러나는 영역이 글이나 시 음악과 같은 예술 분야라고 합니다. 예술은 감수성을 의미하는데 단테의 신곡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성 너머’로 자신을 고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신곡은 기존의 주지적인 내용의 글이 아니라 ‘영적으로 고양되면서도 그 바탕은 세속적’이라는 새로움이 있다고 평가하셨는데요(저도 이렇게 ‘신곡’을 읽을 수 있다면 참 좋겠네요^^)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설명해보자면.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만 세상을 설명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러기에 지성적 인간은 ‘이성 너머’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성 너머’는 반드시 우리의 지반 위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질문은 생로병사가 있는 지옥을 겪는 현실에서 ‘고양된 삶’을 펼친다는 것이 뭘까를 고민하는 것이겠죠. 결국 ‘이성 너머’의 질문을 해결해야만 고양된 삶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이성 너머’가 무엇인지 상상조차도 안 됩니다. 강의를 통해 느껴진 막연한 것을 나불나불해본다면. 세속과 영혼(신과 이성, 믿음과 앎)이라는 것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분리될 수 없게 됩니다. 상반된 이들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사유하느냐에 따라 현실을 구현해 내는 우리의 모습도 달라지겠죠. 그렇다면 각자가 살아가는 real의 세계, 자신들이 규정한 그 세계의 경계선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real로 정의된 무수히 많은 분할 선을 찾아내어 그 기원을 찾아보고, 지워나가며 real을 확장해나가는 것, 이것이 ‘이성 너머’를 사유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적으로 고양되면서도 그 바탕은 세속적, 우리에게 분리나 분별의 감각을 쉽게 불러 일으키는 관계쌍들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노력이 단테의 신곡이 쓰여진 시대에 지적풍토로있었다고 저는 이해했는데요.
교류와 만남이 잦은만큼 경계나 분리선이 너무 쉽게 그어지는 요즘 새로운 관계를 신곡을 통해 들여다보고 싶어지네요.
베아트리체로 불리는 "이성 너머"가 무엇일지 저도 궁금합니다. 단테는 그것이 우리 바깥에 있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천국편까지 읽으며 더 찾아보기로 해요 ~
영성과 세속성을 결합시키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단테~ 신곡과 아우어바흐의 단테를 읽어갈수록 팬심이 깊어지네요ㅎㅎ 에세이 주제들도 조금씩 나오고 있어서 더 눈길이 머무는 부분들도 생기고요. 지옥편과는 사뭇 다른 연옥편을 읽고 있자니 천국편도 궁금해집니다. 우선 남은 연옥편부터 먼저 꼼꼼히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