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미나 2주 차 후기 신현주
2주 차 역사 세미나 후기를 쓰게 되었다. 지난 시간 짧게나마 등장했던 ‘정화하는 불’이 무엇인지 궁금하단 질문을 했는데 신기하게 발제를 준비한 4장이 그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정화하는 불의 개념은 묘연하기만 하다.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 자체가 기존의 역사 교재, 하면 생각나던 연표와 개념을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정리해주는 책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르 고프가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은 어떠할까?
저승 개념에 있어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는 이 시대에 왜 관심을 두는가? 그것은 연대적 설명이라는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나는 여기에서 역사의 시간이란 획일적으로 가속화되거나 목적성을 부여받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다. (<연옥의 탄생>197)
르 고프에게 역사는 평소 내가 자주 접하곤 했던 여느 역사책들처럼 명료한 개념으로써 정리되거나 연대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닌 듯하다. 그에게 역사는 무수히 상호 하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개념과 사상이 탄생하고, 사라지며 상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책의 템포는 느리고, 반복적이며 아리송하다. 그러나 책의 호흡을 맞춰나가다 보면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한 시대를 아우르는 체제와 믿음 등이 얼마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지를 말이다. 지옥과 천국뿐인 이원적 세계에 등장한 중간에 속하는 연옥. 완전히 악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선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범주가 고려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변천사가 있었는지를 뒤좇는 것은 길면서도 새로운 여정이 될 듯하다. 아래는 역사 세미나 시간에 다뤘던 주제 몇 가지를 가지고 정리해 풀어본 것이다.
* 죄의 위계화
죄를 위계화하는 게 연옥의 탄생과 연결된다고 한다.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들은 지옥, 죄를 지었지만 대도하면 정화될 수 있는 자는 연옥, 청렴결백하여 죄짓지 않은 자들은 천국. 이처럼 어떤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장소가 나뉘는데 그 과정이 연옥의 탄생과 연결된다. <신곡>에서도 지옥과 연옥에서 또 한 번 세부적으로 죄질에 따라 받는 벌, 속해 있는 장소 따위가 나뉘니 말이다. 죄를 이런 식으로 범주, 위계화하는 게 이 시대에 왜 필요했을까? 이는 중간 지점을 생각했다는 것과 연결될 듯하다. 과거엔 지옥과 천국의 이원적 모델만 있었는데 애매한 사람들 즉 대부분이 그러하듯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사람들은 어느 장소에 갈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 의문에서 촉발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죄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 누가 지옥에 가고, 누가 연옥에 가고, 누가 천국에 가는 것인지에 대한 기준과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까? 그것을 규정하기 위해 먼저 죄를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사실 위 같은 의문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므로 연옥, 중간 지점이 생겨난 것 아닐까? 죄란 무엇일까, 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에 대한 답이 명료하게 떨어졌다면 몇 세기에 걸쳐 연옥 사상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과 상황들, 위치들마다 선과 악, 죄와 무죄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방법도 없다.
죄를 위계화하는 관점 자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일부 한국 기독교인들은 동성애, 자살 같은 걸 명확한 죄로 분류하지만, 그들도 죄를 짓고 산다. 이웃을 미워하거나, 타인을 질투하거나, 오만과 탐욕 같은 것도 지옥에선 전부 씻을 수 없는 죄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동성애나 자살이 본인이 저지르는 죄보다 더 크고, 정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혐오가 심화하고 갈등이 지속된다. 사실 죄를 체계화하고 위계화하여 정리하는 것은 과거보다 현대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오늘날은 죄를 위계화한 후 그것을 일정 기간으로 명시하고 있다. 법 같은 체제 속에서 말이다. 그것은 죄의 무게를 측량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발상이다.
* 연옥의 세련됨
연옥의 상상을 표현할 때 인간 사고의 세련됨이라고 얘기한다. 왜일까? 그것은 모호성에 대한 사유가 시작된 것으로써 사유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영생, 영벌, 선과 악이 명확하게 떨어졌던 과거와는 다른 의문. 즉 과연 그것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 중간범주, 무수하게 얽힌 관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그 애매함 속에서 연옥이 탄생했다. 사회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영주와 농노뿐이던 사회에 장인, 상인 등이 생겨난다. 그런 사회적 변동과 사유적 변화가 같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연옥이란 개념은 죄를 내면화시킨다. 즉 연옥의 탄생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태를 살피고, 돌아보게 된다. 선악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하는 이 애매함이 양심과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까지 불허할 것인가. 어디까지가 지옥이고, 어디까지가 연옥에 갈 죄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연옥에 갈 것인가. 그런 차원에서 세련화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죄를 내면화시킴으로써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동시에 양심과 성찰을 통해서 자기를 되돌아보고 자신을 구원시킬 수 있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 그런 차원에서 세련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중세의 시선으로 현대를 바라보기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연옥이 요청되지 않는 시대일까? 우선 연옥이 요청된다는 것부터 풀어보자면 그것은 중간적 범주. 즉 애매함과 모호함이 불러일으키는 사유의 지점과 자기 성찰,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현대는 연옥이 요청되지 않는다기보다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더하여 연옥뿐 아니라 종교에 대한 권위 자체도 많이 떨어졌다. 이분법적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난 애매함, 새로운 어떤 것을 찾고자 할 때 연옥은 탄생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떤 체제, 사고 자체가 이분법에 익숙해 있고 거기서의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면 연옥은 불필요할 것. 그런 사고에 길들어 있다면 연옥에 대한 욕망은 없을 것. 그러나 끊임없이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이는 시대를 산다면 연옥에 대한 욕구가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와 연옥이 함께 갈 수 있을까? 아마 불가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연옥에 관한 생각을 안 하는 것 아닐까? 죄의 사면, 죄의 정화라는 관점은 일단 죄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더불어, 죄짓는 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하는 작용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어떠한가? 이 시대는 팽창과 성장의 욕구가 선이자 삶 자체가 된 시대다. 그런 욕구를 성찰하거나 죄로써 단죄할 필요가 없는 오히려 당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연옥이 있다는 건 정의가 뭔지, 죄와 선은 뭔지를 끊임없이 상기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인간의 육체 자체가 죄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있었고, 인간은 필연적으로 지옥에 갈만한 죄를 저지르면서 사니까. 하지만 무언가를 당연히 여기는 게 당연하게 되어버린 시대에 그런 애매함과 모호함에 대한 성찰이 발 디딜 곳이 있을까?
중세 이후부터는 연옥이라는 이상보다 사법적 영역에 매달리며 정의는 희석되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살아있을 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아 부자가 되었다면 죽은 뒤 지옥에서는 그 부정함에 걸맞은 벌을 받는 것으로 정의는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대는 어떠한가? 오늘날 사회는 법치 사회다. 법이 최고의 권위이자, 쉽게 말해서 법 = 정의라고 생각된다. 이는 명료하고 단단한 울타리로써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법은, 그것이 담지 못하는 정의 혹은 악의가 넘쳐나지만, 그것을 감지할 어떠한 다른 방도도 존재하지 않는 허점이 존재한다. 중세는 이처럼 명확히 구분 짓거나 체계화할 수 없는 어떤 애매성, 정의까지 담아내고 고려하는 게 가능했던 시대였다.
글을 마무리하며, 중세와 현대는 차별화된 시대일까? 물론 그런 점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중세는 신을 믿었고, 현대는 자본을 믿는다. 각자의 믿음에 따라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고 따르며 산다. 그런 시대의 거대한 흐름 속에 살 때는 자신이 어떤 흐름에 속해 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이것은 지옥이 말하는 어둠, 나도 보이지 않고 남도 보이지 않아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살고는 있는 무명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런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문득 세미나 때 나눈 얘기를 정리하며 르 고프가 이런 식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다. 한 시대에 발생한 유명한 사건 위주로 기술된 책이 아닌, 그들의 생활 방식, 다른 사고들이 부딪히며 융합하고 떨어져 나가는 지점들, 신을 믿던 사람들이 중간적 범주를 고려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이 발화하며 만들어낸 개념. 그런 느린 템포 속에서 책을 읽다 보니 촉발하는 우리 시대는 어떠한가? 하는 질문들. 그런 질문들을 끌어모으다 보면 저승에서 연옥으로 올라갈 희미한 빛 끄트머리 정도는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행가셔도 계속 수업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아니... 이렇게 좋은 후기로 계속 보시를 하셔야 연옥갈 수 있습니다!!
죄의 위계. 나는 어떤 이들을 지옥, 연옥, 천국에 두는걸까, 막상 생각해보자니 어렵네요. 뒤엉켜 있어서. 저의 가치판단 기준이 분명 작동할텐데, 이런 무지 속에 있는 사람은 지옥을 살아갈 듯요. ㅎ. 이원적 세계를 넘어서는 연옥에 대한 사유를 사고의 셰련됨이라 표현한 부분 저도 재밌었어요.
<연옥의 탄생>은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사를 만들어가는지 보여주어서 흥미로웠어요. 또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게 만들어서 여러 생각을 하게 하고요. 정화와 정화하는 불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해보게 되네요~
그건 그렇고, 저도 은옥샘 생각에 동의~ㅎㅎ
죽은 자를 위한 대대적 기도회가 사람들에게 연옥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품행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과정인 거 같아요. 최소한 연옥 개념이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인식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만한 토론을 조목조목 정리해주셨네요.... 빠른 귀국 기원~~!!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