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연옥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지옥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지요. 책의 삽화에도 그런 분위기가 반영되어 화사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빛’ 때문일 겁니다. 지옥은 역청 같은 끈적한 어둠이 내려앉은 곳, 빛이라곤 한 줄기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죠. 반면 연옥편에서는 처음부터 ‘빛’에 관한 묘사가 눈에 띕니다. 그 빛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통과해 비추고, 그런 묘사들 때문에 연옥의 영혼들은 조금 가벼워 보이기도 합니다.
육체와 영혼의 문제
오전의 토론에서도 그 문제가 잠깐 언급되었습니다. 연옥을 여행하는 순례자는 이마에 새겨진, 죄를 뜻하는 글자가 하나씩 지워질 때마다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낍니다.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는 오를수록 몸이 가볍고 오르는 길이 즐거워질 거라고 알려주지요. 연옥의 영혼들은 지옥의 영혼들보다 가벼워진 모습입니다. 왜일까요? 정화의 과정을 겪는 동안 죄가 씻겨나갔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육체가 없는 영혼들이 느끼는 가벼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런 물음들은 다시 육체와 영혼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육체와 영혼의 문제는 첫 시간부터 토론이 이어지고 있지만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주제죠. 작품 속에서 영혼들은 마치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벌을 받으며 육체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건 단순히 비유일 뿐일까요? 그렇다면 영혼이 당하는 고통이란 어떤 것일까요? 육체적 고통과는 다른 걸까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명확해지기는커녕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분법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샘께서는 강의에서 중요한 점을 짚어주셨죠. 이분법이 단순히 무언가를 둘로 나눠 생각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 그러고 보면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분리된 채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분법으로 본다는 건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게 생각하는 것, 즉 위계 속에서 보는 걸 말합니다. 그러니까 육체와 영혼을 나눠 생각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둘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인 거죠. 중세 철학에서도 이 둘의 관계에 관한 논의가 내내 이어졌다고 합니다. 육체는 영혼의 지배를 받는가? 둘 중 무엇이 먼저 창조되는가? 영혼이 먼저 창조되는 게 아니라면, 육체는 영혼이 들어가 있는 상태로 창조되는가?
단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아퀴나스는 영혼을 ‘생명활동의 원리’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개별적인 신체가 죽는다고 해도 원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동양의 理와도 비슷한데, 동양에서도 理와 氣가 둘인가 하나인가의 문제를 놓고 논의가 이어졌다고 하지요. 아퀴나스는 기독교의 교리 내에서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나름대로 잘 종합해낸 사람이라고 하고, 그런 아퀴나스의 영혼론을 단테도 거의 비슷하게 가져오고 있습니다. 단테의 영혼론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연옥편 25곡이라고 합니다. 잘 읽어보고 단테가 영혼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정리해보라는 숙제도 받았고요.
이해한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샘께서는 첫 시간부터 에세이 주제가 될 만 한 것들을 짚어주고 계십니다. 세속의 존재이면서 천상의 존재이기도 한 베아트리체와 사랑(은총, 신)의 문제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단테는 “당신의 이해력으로 제3천을 움직이는 당신”이라는 칸초네에서 철학을 찬양하기도 했는데요(아우어바흐 <단테>, 156쪽) 단테에게는 이해의 문제가 믿음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샘께서는 단테에게 신이란 ‘이 세상의 원리이자 자비’라고 말씀하셨죠. 달리 말하면, 사랑 자체, 이해 자체, 모든 걸 그러한 방식으로 있게 하는 원리 자체이기도 하고요. 단테에게는 이 모든 게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리적인 차원이 이해력으로 움직이는 차원과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샘께서는 지성을 극대화하여 신적인 것에 이르는 것과도 같다고 설명해주셨지요. 그렇기에 단테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원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였고, 이는 바꿔 말하면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단테뿐 아니라 중세 철학은 이해의 문제와 믿음의 문제를 분리해서 보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샘께서도 여러 질문을 하셨죠. 이해한다는 것과 믿는다는 건 어떻게 다른가. 믿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가, 거꾸로, 이해하지 않는데 믿을 수 있는가. 생각하다보니, 애초에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계속 생각의 끈을 이어가면서 남은 부분도 읽어나가야겠습니다.
* 다음 시간 공지입니다.
- <신곡> 연옥편을 끝까지 읽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문장을 필사해 숙제방에 올립니다.
- 아우어바흐의 <단테> 4장을 읽어옵니다.
- 3주차 후기는 지원샘, 4주차 간식은 경희샘
내일 역사 세미나에서 만나요!
여전히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영혼과 육체, 믿음과 지성의 관계는 이분법적 지평에서 산다는 것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지. 채운샘이 말씀하셨던 위계가 내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지성의 한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ㅎ
신앙과 이성을 어떻게 조화시킬까라는 것이 단테의 큰 고민이었던 것 같은데요, 진리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찾는데, 이성이 반드시 동원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겠죠. 연옥은 이성으로 가는 이행의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