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을 읽고 있습니다. 지옥 여행에 이어 우리는 연옥 여행까지 마쳤습니다. 지난해 일리치를 재독해하면서 저는 중세에 푹 빠졌었지요. 중세를 어느 시기까지로 볼 것인가에 있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습니다. 기독교의 지배, 스콜라 철학을 빙자한 신학이 지배했던 세계, 기도하고 싸우고 일하는 삼분 체계가 확실했던 세계. 이 정도가 중세에 대한 저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리치를 찬찬히 읽으면서 그가 말하는 아스케시스, 즉 자기 훈련이 중세의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 다른 말로 어떻게 우리는 삶의 의미를 구축할 수 있는가. 저의 공부의 전반적인 베이스는 이 문제를 벗어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13세기 중세 시인 단테의 신곡도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저에겐 그저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중 한 권일 뿐이었는데, 중세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단테에게로 손을 뻗게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체계를 시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고서는 중세인들의 심성 구조 속에 녹아들기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모든 고전이 그런 것처럼 밍밍하다는 느낌은 예측을 벗어나지 않았죠. 모든 지적 저작물들이 라틴어로 쓰였던 시대, 민중의 언어로 쓰여진 신곡은 아마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흥미진진한 드라마였겠죠.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삶을 정돈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켰던 단테 언어의 위력을 솔직히 단번에 느끼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감성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단테가 왜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까. 그가 형상화했던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지도를 그려가며 접속해보고자 하는 열망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제에 썼던 바, 실존의 목마름에 따른 필연적인 접속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소 거창한 말로 ‘영혼의 이끌림’에 따른 마주침이 아닐까요.
지난 세미나에서는 연옥 25곡을 중심에 두고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영혼이라..이 말처럼 범범한 자루가 있을까 싶습니다. 코에 걸고 귀에 걸고 온갖 맥락에 동원되는 말, 하지만 결국 텅 빈 말. 채운샘께서는 강의를 시작하시며 학인들에게 “저승을 믿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질문인지요. 각자가 마치 ‘부처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답했던 선문답의 차원으로 확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을 겁니다. 저한테는 그랬어요. 지옥을 다루는 드라마를 그렇게나 소비하면서도 우리는 정작 실존적 차원에서 저승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을 자기를 향해 던진 적이 있는지. 태내 신앙이었고 태어나보니 벌써 불교집안이었던 제게 저승관은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던 시공간이었습니다. 현세적 행동거지가 모두 동서양적 신앙이 뒤범벅된 육도 윤회의 세계에 대해 재단되었으니까요. 있다, 믿어라. 이건 소위 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의 언사로는 나태한 입장이겠지요. 그래서 요리조리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틈을 찾아 대답하느라 진땀이 났습니다. 제게 저승세계는 있다 없다의 차원을 떠나 (경험적으로, 모를 뿐이죠) 요청되어야 하는 세계라고 답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개체의 신체적 시간인 이 현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전생이 있어야 하고 내생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답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뭔 말을 했는지, 아리송해지네요.
필요에 따라서 가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꾸물거릴 수 없고/ 끝까지 자기 길을 곧게 간다. (연옥 25곡)
연옥의 이미지를 말로 조탁하는 단테의 의지는 부침을 겪었던 그의 개인사를 우주의 질서 안에서 해석하고자 했던 그 열망의 산물이었습니다. 개인사를 보편사에 일치시키려고 했던 열망, 그것을 읽는 독자의 의지가 연결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요. 그는 왜 지옥 연옥 천국을 형상화하는데 생애를 걸었을까요. 그리고 독자는 왜 그의 길을 같이 걷고 있을까요. 21세기에 13세기 중세 시인의 시를 불러오는 우리의 필요는 무엇일까요?
중세를 공부하면서 이 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산다는 것이 신의 질서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고 그에 대한 부단한 질문이 살아있는 분위기로 느껴졌습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은 그런 의문들에 대한 나름의 종합 체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에게 신앙과 이해의 차원은 분리불가한 차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중세철학을 신앙의 시녀라는 말로 폄하하면서 정작 그 내용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저로서는 단테를 읽으면서 그 무지의 천박함이 다분히 역사적으로 형성된 무지라는 것을 알았죠. 우리는 이 한시적인 실존의 삶이 어떻게 의미화될 수 있는지 그 구조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나, 나 혼자 잘 산다고 내 삶이 그 자체로 의미있어지는가, 잘 산다고 할 때 그 ‘잘’을 증명해주는 기준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가 다시 중세 공동체의 ‘에피스테메’로 돌아가자는 말은 어불설성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기는 그 중세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것일까요? 저는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무한은 이미지화된 우주공간의 무한함 정도에 그치지 않나요. 무한이란 뭘까에 대한 사유는 현세적 삶의 구원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다분히 중층적이죠. 한 세계의 가치체계가 허물어졌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다시 거기엔 새로운 가치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읽히죠. 우리에게 영혼은 어떻게 다시 형상화되어야 하는 걸까요. 단테는 신곡의 첫 구절에서 이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지옥1곡)
이 구절은 읽을수록 마음을 울립니다. 냉정도 열정도 없는, 어떤 이끌림에도 무반응인 사람들, 림보에 거하는 존재들이 아니라면 이 상황은 바로 나의 상황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말이죠.
그러게요, 우리의 세기는 중세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것인지, 어디서 어떻게 길을 잃은 건지 궁금해집니다..!
21세기에 사는 저는 왜 죽음에 대해 별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건지, 신의 질서 속에 살던 이들을 경시하고 우리가 얻은 건 뭔지, 이승과 저승의 관계가 희미해진 시대에 삶은 어떻게 의미화될 수 있을지..
추방 후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의 필연성이 세기를 지나 우리에게로 돌아와 질문을 생성시키는 것으로 이어지네요. 궁금해지고 또 궁금해지고 싶습니다.
후기 잘 읽었어요!! 나니샘 중세 공부 계속 같이 해요 >.<
영혼 혹은 저승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왜 이리 생뚱맞게 들리는 건지, 이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도 듭니다. 그러다 문득 영혼이나 저승에 대한 질문에 답하다 보면 무한히 확장되는 시공간을 자연스레 펼쳐내는 저를 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계를 살고 있는 저를 발견하지요. 단테의 신곡을 통해 자연스레 그려지는 확장된 시공간에 대한 감각은 즐거운 경험입니다.
정말 단테는 왜 지옥 연옥 천국을 형상화하는 데 생애를 걸었을까요? 우리는 그의 여정을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요? 단테의 여정을 따라가며 계속 떠올리게 되는 질문입니다. **샘의 에세이 주제와도 연결되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