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차(3/8) 역사 세미나
후기가 늦어 급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루 미뤄 열흘 간다더니 딱 그 꼴입니다. 사족 떼고 저희가 재미있게 나눈 이야기들 중심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간 연옥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요, 질문이 생겨나는 걸 보니 이제 조금 이야기가 풀리는 느낌입니다. 질문의 핵심은 연옥을 어떻게 다양하게 사유해볼까? 하는 것과, 왜 지식을 다루는 사람들이 연옥을 적극적으로 사유했을까? 로 요약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인간의 실존이 흔들릴 때마다 사유가 폭발했다는 걸 역사가 보여주는데요, 더불어 우리는 풀리지 않는 질문을 안고 살아갑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실존에 관한 질문이죠. 삶과 죽음의 문제는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11세기 말 시작돼, 약 2세기 동안 지속된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12-13세기는 칭키스칸이 유럽을 휩쓸며 몽골 제국을 건설하던 시기였습니다. 유럽에서도 도시가 건설되고 전문가 계급이 생겨나면서 공동체를 잃은 사람들이 유동하는 시대였죠. 이 고통을 한 사람의 훌륭한 영웅이 구원할 수 없으며, 중세가 제시하는 천국만으로는 이 생의 고통을 다 담아내지 못하게 되었죠. 연옥이라는 메타포는 이런 조건 안에서 주입된 시대적 무의식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하는 시대였던 거죠. 이번 주에 읽은 5,6장에서는 연옥이 ‘공간화’되는 과정을 보았는데요, 그간 연옥은 천국과 지옥에 붙어 있거나 관념에 있었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계속 미정되어 있던 연옥은 ‘정화되는’이라는 형용사에서 푸르가토리움(연옥)이라는 명사가 되면서 특정한 장소로서의 연옥으로 자리 잡습니다. 연옥이라는 공간의 확장은 시간의 확장이자 사유의 확장과 함께 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왜 지식을 다루는 사람들이 특히 연옥을 고민했을까요? 이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전문가의 탄생입니다. 수도원의 수도사로 있던 성직자에서 처음으로 교리를 전문적으로 탐구하는 “신학자”가 탄생하죠. 첫 신학자가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던데요, 지식인은 질문을 다루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질문을 던지는 자, 질문하고 모색하는 자를 지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대적 현상에서 배태된 질문, 그에 대한 모색이 연옥이 아니었을까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처럼 죄와 상이 고정된 공간이 아닙니다. 붙박힌 존재가 아니라 자기 죄를 정화하며 이행이 가능한 곳, 이행하는 존재가 있는 곳이죠. 이행은 계속해서 자기 정체성을 바꾸는 한에서 가능하죠. 어쩌면 연옥은 그런 이행만이 있는 공간이기도 한 거죠.
그렇다면 ‘대도’도 자기 확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대도는 이승의 산 자가 죽은 자에게 간섭하는 것이자, 존재가 넓어지는 시도이기도 한 거죠. 침투 불가능한 곳까지 자신을 확장하기, 그럼으로써 유한한 우리의 삶의 지평을 넘어가 보기, 시대의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무의식의 열망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되네요. 언제나 모호성은 우리를 사유로 이끄는 것 같습니다. 연옥은 틈새의 발견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즐거운 토론이었습니다.
7장 지원샘, 8장 호정샘 발제하고 계시죠? 낼 뵈어요!!
연옥의 공간화가 유동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모색과 사유가 확장되는 과정으로서 등장한 것이란 정옥샘의 후기 잘 읽었습니다. 연옥을 선과 악이 뒤섞인 제 3의 지대로 볼 때 선과 악이 뒤섞인 존재의 수용과 더불어 생긴 그들의 거처를 정하는 노력이 쉽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경계를 그을 수 없는 모호함이 질문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겠지요. 모호성, 우리를 사유로 이끄는 것임에도 그 모호함은 왜 견디기 어려운 건지. ㅎㅎ
결국 시공의 확장과 사유의 확장, 자기의 확장은 함께 갈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연옥의 탄생은 그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고요.
모호함은 견디기 어렵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사유로 이끄는 게 아닐까요.ㅎㅎ 덕분에 세미나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요~
천국과 지옥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배치와 욕망이 출현했다는 게 재밌었습니다. ㅎㅎ
'우리는'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했고, '일하는' 계급이 생겨나고, 선과 악의 중간 지대인 애매한 영역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때..
이런 것들이 불만족과 필요에 의해 생겨난 거라면, 지금 우리도 어떤 불만족과 필요를 느끼느냐에 따라 다른 저승을 그려낼 수 있을까용?
연속 2후기.. 고생하셔씁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