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신곡>을 모두 읽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천국편의 후반부를 마저 읽고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에세이를 앞두고 있는 만큼 자신의 에세이 주제와 관련되는 내용들이 더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천국편은, 본문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지만,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의 섭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추상적이고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토론에서도 결론에 이르지 못한 이야기가 원점으로 되돌아오곤 했어요.
천국편 후반부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믿음’의 문제도 그랬습니다. 샘께서도 강의에서 질문하신 적이 있지만, 믿음의 문제는 이해의 문제와 어떻게 다르며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더 헷갈려졌습니다. 이번 부분에서는 ‘보는 행위’와 ‘사랑의 행위’로 변주되어 이야기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결국 지성과 사랑(은총)의 문제이기도 하죠. 단테는 저승 여행의 길잡이로 지성을 상징하는 베르길리우스와 사랑을 상징하는 베아트리체를 등장시킵니다. 아우어바흐는 이 두 사람을 “그의 내부에 있는 커다란 힘”(<단테>, 206쪽)으로 표현하며, “단테를 신적 질서에 대한 직관적 지식 쪽으로 인도”(206쪽)하는 존재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신곡>에서는 이 두 가지 힘, 이 두 가지 행위가 순차적으로 발휘되는 것처럼 묘사되는데, 그러면서도 또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에세이에서도 여러 샘들이 이 문제를 언급하게 될 듯한데요, 각자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지.. 기대되네요.^^
오후에는 강의 대신, 에세이 주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확한 주제가 나온 분들은 이야기의 방향을 함께 논의했고, 주제가 명확하지 않은 분들은 주제를 뽑는 작업을 했습니다. 확실히 혼자 생각할 때보다는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나오기는 했는데, 작품과 연결할 세부적인 부분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막막하기도 합니다. 일단 이번 시간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품을 다시 읽어보며 문제를 구체화해 초고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 나누었던 주제들을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지원샘은 <신곡>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에 관해 풀어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단테는 우리가 알고 있고 경험한 것과는 많이 다른 사랑을 이야기하지요. 이 사랑은 모든 존재가 부족함 없이 지니고 있으며, 지성이기도 하고, 자유이기도 하며, 죄악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작품을 따라가며 지원샘은 어떤 ‘논증’을 거쳐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은옥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다는 것’에 관해 써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은옥샘은 처음에는 <신곡>의 종교적 관점에 거부감이 들었다고 하셨죠. 보이지 않는 저승 세계를 존재하는 세계인 것처럼 믿고 시작한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으셨다고요. 하지만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저승은 아니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런 믿음이 무엇인지 에세이로 풀어보고 싶어지셨다고 합니다.
해민샘도 비슷한 궁금증에서 출발합니다. 저승 세계에 대한 믿음은 법이나 국경선처럼 실체가 없지만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믿음과도 비슷합니다. 이런 믿음은 감정적인 차원에서 발동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죠. 토론에서 명확히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지성이 단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보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해민샘은 감정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고 하셨고요.
경희샘은 <신곡>에서 말하고 있는 ‘죄의 사면’을 과연 존재의 변화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를 중심으로 써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종교적 사면과 현실에서의 법적 사면에 대한 샘의 생각이 혼재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는데요. 이 둘을 분리해서 보고 신의 정의 안에서의 사면이 무엇인지, 정화란 어떤 과정인지, 뉘우친다는 것, 발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정화와 사면의 문제인만큼 연옥편을 중심으로 보시게 될 것 같고요.
저도 공부하며 계속 생각하게 되는 '앎'의 문제에 관해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아는 것과 행위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여전히 저는 굳건하게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단테의 여정, 그 여정을 글로 써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지, 여정 속에서 변화하는 단테의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문제를 좁혀볼 수 있을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호정샘은 길을 잃은 단테에게 왜 지옥부터 보게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합니다.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자에게 그냥 천국부터 보여주면 간단할 것을 왜 고통스러운 지옥부터 마주하게 했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샘 역시 길 잃은 단테처럼 길을 찾고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런 것 같다고도 하셨고요. 토론에서는 샘이 어떤 면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지, 어떤 마음에서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옥편을 중심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정옥샘은 글쓰기와 관련해서 <신곡>을 풀어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어디로도 이행하지 못하고 고여 있다는 점에서 샘은 자신의 글을 지옥에 비유하셨죠. 발밑의 구체적인 문제에서 시작해서 신적 질서와 정의의 문제로 이야기를 확장하는 단테의 글쓰기가 매우 인상적이었고, 천국편에서 다시 지상의 문제를 가져와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단테의 마음을 비롯해 처음 읽을 때는 들어오지 않았던 부분들이 많이 마음에 와닿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토론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갈지는 좀더 생각해보기로 하셨고요.
정리하고 보니, 저를 비롯해 아직 갈길들이 멀어 보이네요.^^; 토론에서도, 자신의 문제에서 시작해 작품을 해석하는 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짚어보았는데요, 이번 학기에 읽은 책들을 모두 참고해서 <신곡>이 어떤 작품인지 이야기하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고 채운샘께서도 다시 당부하셨습니다. 일단 써보고, 금요일에 다시 이야기해보아요!
- 에세이 발표는 10시 30분에 시작합니다.
- 간식은 난희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금요일에 초고 들고 만나요!
ㅋㅋㅋ. 정아샘이 정리해주신 에세이 주제를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벌써 콩닥거리네요. 이러다 심장병 걸리는 것은 아닌지.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정아샘 정리 속에서 모아져 있네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