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탁Q 문사철 2학기 4주차 (5/6) 공지
이야기의 분기
<천일야화>는 읽으려고 한 번 손에 들면, 묘하게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별 일관된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서스펜스를 유발하여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작법도 아닌데,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해 계속 책장을 넘깁니다. 이야기는 그저 계속된 흐름만이 있을 뿐입니다. 꼭 앞의 이야기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읽다 보면 앞의 무슨 이야기에서 출발했는지도 잊어버리게 되죠. 그런데도 계속 읽게 되죠. 신기방기합니다.
천일야‘화’라는 제목처럼 첫 시간부터 매시간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답니다. 천일야화에서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빚도 갚아주고, 벌도 경감해 주고, 세헤라자드처럼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는 게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이번 토론에서 주목한 것은 이야기의 중첩과 분기에 관한 것이었어요. 이야기하는 화자와 청자에 따라 하나의 이야기가 계속 분기하고 재구성된다는 부분입니다. 솀셀니하르와 페르시아 대공의 이야기도 여종과 이븐 타헤르, 보석상을 통해 다르게 전달됩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시간을 겪는 것이라고 한다면, 맥락이 달라지고 이야기가 재구성되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시간이 겹겹이 붙는 일이고 또 각기 다른 길을 가는 시간이 되는 것이죠. 세계는 결코 하나의 시간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 존재론적으로 보면, 맥락의 재구성은 한 존재의 독특성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화자는 독특한 존재로써 이야기의 맥락을 재구성하는 것이 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동일한 사건은 화자에 따라 조금씩 비틀어집니다. 이야기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기대를 담기도 하고, 현실이 전부라고 알고 있는 우리에게 비현실성을 제시하면서 우리의 행위 방식을 흩트립니다. 상식적인 이야기가 연속된다면 들을 이유가 없겠죠. 천일야화만의 열린 결말, 예상 밖의 상황 전개 등이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천일야화>의 독특함이 청자에 있다는 점도 이야기했는데요. 세헤라자드와 술탄, 세헤라자드와 디나르자드, 신드바드와 힌드바드의 관계도 그렇고, 어떤 것의 댓가로 이야기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야기는 요청하는 사람에 의해, 즉 들어주는 사람을 통해 완성됩니다. 청자는 요청함으로써 잠재되어 있을 이야기를 출현하게 만들고, 그러면서 새로운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존재가 됩니다. 3권에서, 세헤라자드에게 이야기를 요청하는 술탄도 죽음의 세계에서 사랑의 세계로 문을 여는 변화를 보여줍니다. 이야기의 요청은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슬람 사유와 연관해 저에게 가장 주목되는 지점은 인과율을 부정하는 사유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비연속적으로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뿐 어떤 내적 연결도 없다고 보는 관점 말입니다. 동양의 기본적 사유가 우주 자연과 인간의 내재적 연결성이라고 하는 것에 비추어보면, 매우 독특하게 보입니다. 물론 페르시아 문화권은 시공간적 내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요. <천일야화>에는 이 두 사유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과 서사구조를 보면 딱히 인과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죄에 대한 규정, 죄에 따라 기대되는 벌, 행위의 결과 등이 모두 어긋납니다. 인과는 우리 기대의 투영이라고 샘은 말씀하셨는데, 그들의 인과 구성이 이상하다고 보기 이전에 우리는 왜 인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먼저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겠죠. 가치를 양화하는 태도 말입니다.
법=종교=정치
이슬람은 먹고 생활하는 부분에 금기가 많습니다. 이 모든 행위의 근거는 당연히 꾸란과 하디스입니다. 이에 근거해 법학자들이 구체적 행동강령을 만든 것이 법이고, 이 법을 ‘샤리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집행하는 것이 정치이죠. 종교와 법과 정치가 하나의 선상에 놓입니다. 이슬람에는 중요한 종교적 다섯 기둥이 있는데, 신앙고백, 단식(라마단), 희사, 예배, 순례가 그것이죠. 이 다섯가지를 잘 지키는 한에서 무슬림으로 인정됩니다.
그런데 이에 근거해 행위도 다섯 단계로 구분을 하는데요, 의무에 해당하는 것이 단식, 희사 예배이구요, 순례는 두 번째 ‘권장하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그 다음 보통의 ‘대수롭지 않은 행위’가 있구요, 가벼운 처벌이 따르는 ‘하면 안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절대로 하면 안되는 행위’를 “하람”이라고 하는데, 음주, 도둑질, 돼지고기 금식입니다. 상인 문화에 입각해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슬림들은 도둑질, 거짓말을 매우 중대한 범죄로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쾌락에 대해 절대적 금욕을 기본 생활 양식으로 삼고 있는 것도 독특합니다. 년 중 아홉 번째 달에 행하는 라마단은 집단적 금식, 금욕을 통해 영적 에너지를 고양시키는 방식이죠. 견뎌내기 쉽지 않은 육체적 유혹을 뚫고, 자신의 신체를 바꾸는 일을 모두가 집단적으로 행한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성스러운 과정으로 느껴집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규정하는 이슬람인들은 일상에서도 3~5회 기도를 올리죠. 기도란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행위라는 말씀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이슬람법은 신의 언어를 지성적, 합리적으로 재해석하여 이룩되어진 것입니다. 샤리아가 ‘신이 인간을 위해 연 길’ 이라는 뜻인데, 현세는 찰라이고 영원한 내세를 위해 지금을 잘 산다는 이슬람의 사유의 결정판이라 봐도 좋을 거 같습니다. 인근 유럽이 근대화, 산업화로 성장한 지금, 무슬림이 보여주는 삶의 양식에서 우리가 도입할 수 있는 윤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금식, 금욕, 희사, 기도를 내 삶에 들이는 것 말입니다. 궁리해 봐야겠습니다. <천일야화>도 <이슬람 문화>도 우리의 관념들을 헤집고 있습니다. 2학기에 3번째 수업을 했는데, 벌써 3주 앞으로 에세이가 다가와 있네요. 읽으면서 글감 잘 모아놓아야 할텐데요..... 내일 역사 세미나에서 뵙겠습니다.
***2학기 4주차(5/6) 공지입니다***
* 읽을 책 : <천일야화> 4권 읽고 나누고 싶은 문장과 그 이유를 적어 숙제방에 올립니다.
<이슬람 문명> 2장 끝까지 읽어옵니다
* 3주차 후기는 해민샘
* 4주차 간식은 정아샘
오...샘. ”금식, 금욕, 희사, 기도를 내 삶에 들이는” 것에 대한 궁리에 저도 한 마음 보태고 싶어집니다. 재화와 서비스의 집단적 낭비가 일상화된 우리의 세계에서 그런 윤리를 집단적으로 지킬 수 있다면. 강제적 의무의 무거움보다는 함께 하고 있음에서 오는 어떤 좋음이 더 강할 것 같아요. 무슬림들의 삶이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시간을 겪는 것이라고 한다면, 맥락이 달라지고 이야기가 재구성되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시간이 겹겹이 붙는 일이고 또 각기 다른 길을 가는 시간이 되는 것이죠. 세계는 결코 하나의 시간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라는 부분 흥미롭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읽어도 각기 다른 시간을 가져왔던 세미나가 떠오르네요. 시간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천일야화가 어딘가 무척 현실적이라고 느껴진 건 삶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천일야화는 정말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할 수 없는 비균질적이고 독특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이 재미를 느끼게 되는 포인트 중 하나인 것 같고요. 예상할 수 없는 흐름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예상이 깨어지는 즐거움... 우리가 반전이 있는 소설이나 영화에 열광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아는 인과가 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는 거 같네요...ㅎㅎ
천일야화에서 인과율을 부정한다고 할 때 그 인과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이 규정한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의 도덕율 같은 것은 아닐런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