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꾸역 꾸역 읽히는 책들을 읽다가 『천일야화』를 읽으면 빠르게 술술 넘어가는 것이 무척 신이 납니다~ 이번 주에는 “과묵남” 이발사의 이야기와 솀셀니하르와 대공의 사랑 이야기, 중국 공주와의 사랑 이야기를 읽고 토론했는데요. 각 권마다 어느 정도 테마가 잡히더라고요. 지난 시간에 읽은 2권은 상인이 키워드라고 한다면, 이번에 읽은 3권은 사랑과 여성이 키워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천일야화』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우리가 표상하고 있는 사랑과는 달랐는데요. 시련을 극복하고 맺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시련과 함께 오는 사랑을 그립니다. 그 어떤 빌드업도 없이 우발적으로, 갑자기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요. 솀셀니하르와 대공도 첫눈에 반하고 사랑이 시작되는 동시에 그것은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시련을 맞닥뜨립니다. 하지만 그 시련을 극복하려고 한다거나, 그 사랑을 잊으려고 하지 않고 그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슬람 사상을 배우면서, 무슬림들은 모든 것을 알라의 뜻이자 심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은 수동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부분과 연결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이라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불행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되는데요.
이발사의 형들은 모두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하게 불행을 겪습니다. 불행에 불행이 겹쳐서 죽음 직전의 상황까지 가기도 합니다. 첫째 형은 방앗간집 마누라에게 홀려 이용당하다가 매질을 당하고, 둘째 형은 수염이 다 밀리고 벌거벗겨진 채로 거리에 버려집니다. 셋째 형은 도둑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추방당하고, 넷째 형은 사기를 당하고……. 하지만 그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거나 불행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그 뒤에 벌어지는 사건이 달라집니다. 만약 이발사의 형들이 불행을 극복하려고 했다면 서사는 『천일야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었겠지요. 하지만 그 불행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답답한 전개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여기서 저희는 사건이라는 객관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사건화하는 속에, 혹은 그 자체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야기’와도 연결되는데요. 이야기를 어떻게 그려내느냐에 따라서 여러 사건들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를 그리는 방식이 달라지면 그 다음에 발생하는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이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곧 사건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거나,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곧 현실이고, 현실을 직조해낸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운데요. 바두르 공주는 불행한 사건으로 상심한 상태에서도 냉철한 판단력을 잃지 않고, 남장을 하고 왕이 되어 한 나라를 지혜롭게 다스리고요. 추파를 보내는 눈빛의 대상이 된 여성들은 그 눈빛을 조롱과 장난으로 맞받아칩니다. 잔인하고 어리석은 술탄에게 이야기로 설득하는 셰에라자드가 이 모든 이야기의 화자이기도 하지요. 여성 작가가 썼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여성을 유혹적이고 간악한 존재로 보면서도 지혜롭고 다스림을 행하는 존재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앞으로의 이야기에서는 여성들이 또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하네요!
『이슬람 문화』 강의 시간에는 이슬람 종교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앞선 토론 시간에 나누었던 이슬람의 독특한 인과율 이야기와 연결지어, 근대의 기계적 인과론이 아주 짧은 시기 동안의 상식일 뿐이라고 하셨는데요. 근대 이전에는 그런 식의 서술이 일반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과는 어떤 기대의 투영이기도 한데요. 인과가 없이 벌어진 일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과를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합리적이라고 믿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었습니다.
독특한 인과율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는 근대의 이야기와 다르게 나타나는데요. 근대의 이야기는 하나의 시점으로 주욱 이어진다면, 그 전의 이야기는 파편들을 엮어낸 것이기에 인과가 맞지도, 인과로 엮여 있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불행이 닥치면 그것이 왜 닥쳤는지 고민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이슬람적 사고에 익숙치 않기 때문입니다. 고뇌하는 인간상도 근대의 인간상의 특징이기도 하다는 점이 기억에 남네요. 다른 세계관을 접하면서 지금 우리의 행동과 사고방식의 기준을 다시 보게 됩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귀신이나 유령의 개념이 없다는 점도 흥미로웠는데요. 죽으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영혼이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그대로 무덤에서 머물게 되는 것이지요. 코란에서는 인간의 삶을 네 단계로 나눈다고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모태로 수태되었을 때의 삶을 말하고요. 두 번째 단계는 현세에서의 삶으로 코란에 준하는 신의 뜻을 따라 살아갈 의무가 있는 시기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무덤에서의 삶으로,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지점인데요. 앞서 말한, 귀신이나 유령이 없는 이유도 무덤에서의 삶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내세의 삶으로, 심판의 날에 현세에서 행했던 모든 잘한 일과 못한 일들이 적힌 장부를 보고, 그것에 입각해서 내세의 삶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배울수록, 이슬람이 너무나 타자화, 악마화되어 있었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와닿습니다. 이단이라는 말은 중심을 취했을 때에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무엇이 이단이고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종교와 자본과 정치가 결탁되어가는 상황에서 왜 사람들이 그런 것에 끌리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도 기억에 남습니다. 앞으로 배우게 될 이슬람의 법과 윤리, 내면 세계의 이야기는 어떨지 무척 궁금하네요~! 내일 뵈어요~
닥쳐온 사건에 대해 '왜'를 묻지 않고, 고뇌도 원망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받아들이는 인물들을 보면서 답답하기도 하고 미개해보이기도 했는데,
이런 저의 반응이 기계적 인과론이라는 상식에 붙들려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게 재밌었습니다.ㅎㅎ 인간은 정말 얼마나 자기가 아는 것 안에 갇히기 쉬운지..
그들은 고뇌가 없으니 지금 닥친 현장에 충실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사건을 정신이 아니라 온몸으로 맞는 느낌이랄까요.ㅎㅎ
살아 있으므로 사건도 겪는 것이기에 일어난 일에 대해 '왜'를 묻기 보다, 어떻게 다음을 살아갈 지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인지 쿨내 진동하는 이들의 태도가 오히려 신기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모두 <천일야화>에 빠지는 이유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