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공부한 괘는 뇌상소과, 수화기제, 화수미제입니다. 화수미제를 끝으로 드디어 64괘를 다 돌았군요. 다음 주부터는 두께와 무게를 자랑하는 주역선해를 들고 오지 않아도 된답니다. 가벼워진 책가방의 무게만큼 에세이에 대한 무게가 추가되는 것인가요? 후후, 시덥지 않은 농담을 던지며 4학기 3주차 후기를 열어봅니다.
주역의 핵심은 중(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말로 평정심, 균형 감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서 서핑을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서핑을 할 때 자기 중심을 잡으려고 하면 바로 넘어진다고 합니다. 보드와 나의 관계만을 생각한다면 바로 넘어지게 되는데, 이는 매번 다르게 오는 파도 때문이며, 파도에 따라 매번 중심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핑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때마다 다른 파도로 인해 모든 곳이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고 힘을 다 빼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때를 서핑에서의 파도에 대입해서 생각해본다면 매번 다른 파도에 따라 중심이 바뀌듯, 때에 따라 중이 의미하는 바도 다를 수 있겠습니다. 파도를 잘 타려면 힘을 다 빼야하는 것처럼 주역에서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마음을 비우라는 말은 선험적인 중심을 갖지 말라는 말로 읽을 수 있겠습니다. 소과괘나 대과괘에 나오는 지나칠 과(過)는 주역이 항시 강조하는 중과 다른 의미로 보여서 해석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핑을 할 때 어떤 파도가 오느냐에 따라 계속 중심을 바꿔야 하듯이 주역에서도 과해도 괜찮은 때가 있는 것이라고, 오히려 이런 때에는 과한 것이 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때에는 지나치다 생각하게 행동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이 크게 휘어졌을 때는 큰 힘을 써서 크게 바로잡아야 하고,(대과괘) 음이 더 많아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을 때는 근본부터 크게 바로잡을 수가 없으니 일상을 탄탄하게 가지는 수밖에 없습니다.(소과괘) 소과괘는 나와 내 삶을 좀 더 견실하게 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자기 단도리에 힘쓰면서 사소한 일상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조금 더 성실하게, 조금 더 오버스럽게 살아야 하는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대소(大小)의 개념에 대해 한번 짚고 갑니다. 지금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대소는 비교의 개념이지만 주역이나 대학 등에서 얘기하는 대(大)는 다른 무엇인가에 대해 큰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큰 것이라고 합니다. 외부 가치 기준에 따라 크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법도에 가치기준을 맞춘 것으로 척도를 허락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척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시간 또한 외적인 균질한 척도의 길이가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는 동시에 과거가 되고 동시에 미래가 되지 않으면 현재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는 공존하는 것입니다. 현재가 되자마자 미래는 사라지고, 현재가 되자마자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흐르지 않는 시간은 흐르는 시간의 반대가 아니라 흐르는 시간의 다른 차원인 것입니다. 동정(動靜)이 사물의 동시적 측면인 것처럼 어떤 지평 속에서 보느냐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에서 항시 강조하는 경계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매사에 걱정하며 전전긍긍 불안해하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경계하면서 만족하고 긍정할 수 있는가,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채운샘께서는 경계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누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바라던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만족을 느끼는데 이 만족감 때문에 오히려 불안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보통 투사한 기대가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쾌감을 만족이라고 생각하는데,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결여라고 인식하니 불안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파도가 어떻게 오든, 무엇을 겪든 저 파도가 오는 속에 내가 있었구나, 비록 바다에 빠지더라도 적어도 파도를 맞이하려고 했구나 생각하며 계속 연마하다 보면 어떤 파도가 올까 불안한 것이 아니라 모든 파도가 즐거워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번에도 어떤 파도가 올 것이라는 기대의 투사 없이 매번 새로운 파도를 맞이하는 것이 경계이며, 경계를 해야만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제괘, 미제괘로 넘어갑니다. 물은 험난함을 뜻합니다. 일종의 장애물인 것이지요. 그러나 어떤 길이 내 앞에 놓여도 건너가는 것입니다. 이미 건너갔든, 아직 건너가지 않았든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우주의 기운 속에서 내 역량을 내 실존 속에서 발휘해서 어제를 살고 오늘로 건너 왔습니다. 기제괘에서는 소형이 아니라 형소를 이야기합니다. 소형은 작게 형통하다는 뜻이나 형소는 형한 게 작은 데까지 닿아 형통하다는 뜻입니다. 우주 안에 어떤 미물도 매일 매일 자기 삶을 펼쳐내어 사는 것이 형소입니다. 초길종란. 시작이 없으면 완료도 없고 완료가 없으면 시작도 없으니 초와 종은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길과 란도 붙어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타났다 스러집니다. 스러지는 세계에는 늘 새롭게 생겨남이 있습니다. 모든 운동에는 하나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는 힘이 동시적으로 늘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초길종란은 하나의 방향, 관념, 상태, 목적지 등을 삶의 지평에서 쳐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미제가 계속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기제는 차이가 발생하는 와중에 반복하는 것입니다. 기제 속에 미제가, 미제 속에 기제가 있습니다. 기제와 미제는 초효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꼬리를 적시는 여우처럼 경계하는 것은 같지만, 어떤 때는 가야 하고, 어떤 때는 가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제와 미제와의 관계는 대립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괘 안에 다른 괘가 함축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기제, 미제 모두 어떤 상황에도 처음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에 대해서 신중함을 강조합니다. 다만, 기제는 바깥에 위험이 있으니 바깥에 대해 경계하면서 가라고 하고, 미제는 안에 위험이 있으니 분별을 잘하라고 말합니다.
채운샘께서는 과거가 지금을 살고 있고 지금은 미래를 살고 있으니, 미래와 과거에 대해 기대할 것도 없고 후회할 것도 없다며, 신중하게 자기 진실성을 가지고 살면 된다고 하시면서 이것이 미제괘이며 삶의 과정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늘 삶의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보여주면서 미제괘로 64괘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가 기제와 미제에 함축돼 있는 것 같고, 아직도 알듯말듯한 수준이지만 참, 감동적이더라고요!
초길종란 같은 부분에서는 베르그손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사유, 들뢰즈의 잠재와 현재의 동시성 같은 것들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아직은 연결이 안 됩니다.ㅋㅋ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주역이 내포하는 사유의 크기가 정말 大라는 걸 실감합니다. 몇 번을 더 읽어도 부족하겠어요~~
처음이자 마지막 후기인가요? 중간에 합류하셨지만 꿋꿋하게 배움을 이어가는 샘을 보며 내면의 강건함을 보았습니다.. 후기도 역쉬!! 미제와 기제를 동시에 사유할 수 있다면 을매나 좋을까요? ㅋㅋ 늘 삶은 과정속에 있다!! 항상 명심해야 하는데.. 그게 어떤 과정인지 헷갈릴때가 많단 말이죠... 생각들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해서~ 이것 또한 공부의 과정이겠지요? 심혈을 기울여 쓰신 후기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