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산화비와 택수곤괘를 읽었습니다. 비괘는 '꾸밈', 곤괘는 '곤궁함'을 뜻합니다. 둘은 배합괘(配合卦)의 관계입니다. 음양이 서로 반대여서 서로 상대되는 입장을 반영하지요. 혹은 서로의 이면을 비추는 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꾸밈'이 극에 달해 바탕을 압도하면 허식만 남은 곤궁한 상태가 되고, 곤궁함이 극에 달하면 어떤 식으로든 통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때를 맞는 것입니다.
문명과 상징
꾸밈, 장식은 어쩐지 말단처럼 느껴집니다. 중요한 일은 따로 있고, 꾸밈은 마지막에 살짝 손보는 것 정도로 생각되지요. 하지만 꾸미고 드러내는 것 없이 일이 성사되지는 않습니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그럼에도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꾸밈의 형식이지요. 그런 꾸밈이라는 괘명을 달고 있는 비괘는 읽어내기 어려운 괘 중 하나입니다. 뭔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관계의 최전선이니 중요한 괘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본(本)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요.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자는 주유를 나서기에 앞서 비괘를 뽑아 꽤 실망했다고 합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국무총리를 노렸는데 문광부장관이 될 거라는 점괘를 본 것이니까요. 실제로 있던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에는 공자를 문화의 아이콘으로 보는 한편 문화적 힘은 실세가 되기 어렵다는 인식을 반영되어 있습니다.
괘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음이 양을 꾸며주는 관계입니다. 음이 양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어 서로의 대비를 이루고 있지요. 공영달은 이를 강과 유가 나뉘어야 무늬가 생긴다고 말합니다. 서로 대비되어 서로를 돋보이게 하고 꾸며주는 조화로운 관계를 '꾸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이효와 오효는 둘 다 음효로, 음유함이 중(中)을 얻은 상태이지요. 이럴 때 음유함은 강을 탔다며 망동하지 않고, 형통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괘사에서는 이를 형통하지만 가는 바를 두는 건 작게 이롭다고 하지요. 음유함의 힘은 거대한 원칙을 세우거나 밀고 나가는 건 아니지만 미세하게 조정하고 세련되게 다듬는 데 효과적입니다. 때문에 그런 음유함의 이로움을 소리(小利)라고 한 것이죠. 그리고 작다[小]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리(離)괘를 품고 있는 비괘는 문명의 상징 체계이기도 하니까요. 상징을 통해 인간은 천문을 읽고, 세상에 적용하고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주의할 점은 꾸밈이 바탕을 벗어날 때 허식이 된다는 것이죠. 이때 중요한 건 바탕과 꾸밈의 조화[文質彬彬]입니다. 꾸밈이 넘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 이것이 비괘에서 가장 경계할 태도입니다. 때문에 비괘의 효사는 극으로 갈수록 소박함을 강조합니다.
곤궁함은 군자가 드러나는 기회
곤괘의 괘사는 '곤궁함'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형통함[亨]으로 시작합니다. <주역>에는 곤라함을 뜻하는 괘가 여럿 있지만 가장 절망적인 상황은 역시 곤괘일 것입니다. 연못에 물이 말라버린[澤无水], 도대체 어떻게 손써야 할지 모르는, 고갈의 상황이니까요. 그런데 곤괘는 형통함을 말하는데, 그 다음 하는 말이 어쩐지 호쾌합니다. "바르고 대인이라면 길하다[貞 大人 吉]" 다시 말해 곤궁하다고 형통하지 못하면 소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대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괘사는 "말이 있으면 믿지 않는다[有言不信]"로 끝나며 대인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합니다. 곤궁할 때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거나 이 곤궁함이 누구 탓인지 말하는 건 소용이 없을뿐더러 믿음을 주지도 못합니다. 상황이 곤궁하니 말을 하기 시작하면 괜히 덧붙이고 교묘하게 꾸미게 되지요. 곤괘의 대인은 곤궁할할수록 자기 덕을 닦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곤궁함에서도 형통할 수 있는 거고요. 그런 곤괘의 대인이 취할 태도를 잘 설명해주는 게 대상전의 "명을 지극히 하여 뜻을 이룸[致命遂志]"입니다. 명(命)은 아무리 방비하고 염려하는 바를 다 해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고갈되어 곤궁해진 곤괘의 상황도 일종의 명(命)이라 할 수 있지요. 명을 지극히 한 군자는 징징거리지 않고 다만 자신의 뜻을 행할 뿐입니다. 이때의 명(命)은 천지자연의 원리, 혹은 때[時]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곤괘의 효사는 곤궁함 앞에서 군자와 소인의 모습이 어떠한지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음유한 효들은 물러서거나 그야말로 바닥을 친 모습을 보입니다. 아니면 후회하고 있지요. 이는 곤궁한 상황에서 자기 역량을 펼치지 못하는 소인의 모습 같습니다. 반면 양효들은 제사를 지내거나 자신의 속도를 늦추는 등 곤궁한 때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나 대비하는 태도를 취하지요. 이렇게 보면 곤괘는 어려운 때이기도 하지만 대인이 자신을 드러낼 혹은 대인이 될 절호의 찬스이기도 합니다. 고갈이 된 상황에서 움츠러들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점검하고 능동성을 발휘할 기회로 삼을지, 그 선택에 따라 소인과 대인이 나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