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수곤 & 산화비>
3학기 4주차에는 택수곤과 산화비를 공부했습니다. 각 조별로 한 명이 두 괘에 대해 이해하여 써오신 과제의 내용과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토론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선발된 분 외에 다른 분들도 짧게나마 쪽글을 정리해 오셔서 같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진행하니 공통과제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어 마음이 가볍기도 하고, 두 괘의 특정 내용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하게 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조별 토론 내용은 후기로 잘 정리해 주셨네요.
- 다음 주(5차시) 읽어오실 괘 : 수뢰둔, 지화명이
- 다음 주(5차시) 간식 : 미연샘, 은주샘
- 오후 토론 : 각 조별로 글쓰기 진도 체크하면서 진행
<황리-희수 조>
이번 주에 읽은 택수곤괘와 산화비괘는 모든 효사의 음양이 반대인 배합괘입니다. 이렇게 음양이 바뀌는 것은 모든 효가 之卦로 변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지괘는 본괘에서 효爻가 동動하여 변해간다(之)는 뜻으로 음이 극에 이르러 양이 된다고 보았을 때, 비괘의 음양이 모두 변하면 곤괘가 되지요. 꾸밈의 뜻이 있는 비괘가 극에 이르면 곤궁함의 곤괘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화 예술인들은 지금 상황이 어렵다고 하는데요. 지난 정권에서 K컬쳐라는 이름아래 풍족한 지원 속에서 다양한 활동들을 했다면 지금은 제재는 늘고 지원은 줄었다고 합니다. 비괘에서 곤괘의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이런 곤궁한 상황도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의 필요성이나 가치들이 다시 논의되고 소수의 문화운동들을 이어가다 보면 또 다른 시대가 오기도 할테니 그럼 곤이 다시 비로 변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산 아래에 불이 있어 산위의 초목을 비추는 비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산을 떠올리게 하는데 단전에서는 음이 양 가운데로 들어가고, 양이 음의 위로 올라가 서로를 꾸며 무늬(文)을 이룬다고 합니다. 서로를 꾸민다는 말에서 보듯 무늬(꾸밈)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작용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본바탕에 내재한 꾸밈의 요소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겉의 화려함만 보기 쉬우니 비괘에서는 지나치게 외양을 꾸미는 것에 대해 경계합니다. 저는 오히려 꾸밈은 부수적이란 생각이 강했는데 일정한 형식(꾸밈)을 통해서만 본질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아들 백어에게 시와 예를 배웠냐고 물은 공자는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할 것이 없고 예를 배우지 않으면 자신을 바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시와 예는 꼭 필요하다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詩가 인간의 성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주는 형식이기 때문이며 그 형식으로 다른 이를 대하는 것이 禮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비괘 괘사의 소리유유왕小利有攸往의 ‘소’는 양적으로 적다는 의미보다 일상의 미세한 것들에 대해서 밝은 빛을 쏘듯 살핀다는 표현으로 보는 게 어떨까 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연못물이 말라 쩍쩍 갈라지는 형상의 곤괘는 대인의 가치가 잘 드러나는 괘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괘들과 달리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有言不信) 시기의 곤괘는 강중의 덕으로 올바르게 처신해야 길합니다. 미리 방비하고 염려하는 바를 다했음에도 물이 바짝 마를 정도의 곤궁함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 때 군자는 ‘그 형통한 바를 잃지 않을 수 困而不失其所亨’ 있습니다. 곤에 이르게 한 삶의 조건들을 이해하고 이를 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치명致命이고, 이럴 때 수지遂志,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곤궁한 때의 말은 어떤 말도 통하지 못하고 더 막히게 하는데 반해 비괘는 말로써 포장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시기로도 볼 수 있으니 처한 상황마다 군자의 덕목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랑-규창조>
산화비괘와 택수곤괘를 공부했지만, 토론에서 주로 문제가 됐던 것은 비괘였습니다. 주역에서 문명을 사유할 수 있는 괘들이 여럿 있고, 비괘도 그 중 하나죠. 그동안 비괘를 문명을 적극적으로 개혁할 수는 없고 대신 형식적인 것만을 다듬을 수 있는 소극적인 실천으로 이해했는데요.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논어에서 예(禮)에서 중요한 건 마음이고, 마음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사치한 것보다는 검소한 게 낫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괘의 괘명인 ‘꾸밈’은 결국 마음을 논하기보다 형식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예’에 있어서도 말단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토론에서는 도올의 해석을 따라 문명의 발전이 지나치게 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으로 비괘를 읽을 수 있지 않겠냐는 얘기도 있었는데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번에 읽은 비괘는 그동안 이해해왔던 비괘와 좀 달랐습니다. 오히려 비괘가 과연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전제하는지, 비괘가 말하는 꾸밈이란 게 과연 소극적 실천 같지는 않았거든요.
단전에서는 비괘의 성립을 건괘의 양강한 구이효가 중(中)을 버리고 상구효로 올라가고, 곤괘의 상육효가 건괘에 순응함으로써 육이효에 자리하는 걸로 해석하는데요. 왕필과 공영달은 이러한 괘의 운동으로부터 비괘가 말하는 꾸밈 혹은 문명적인 것이란 강건한 기질이 ‘중’을 벗어났을 때, 그것을 보완하는 실천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주역에서 말하는 문명이란 우리의 기질을 부정하지 않고도 적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양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무한한 풍요를 누리게 하는 기술로서의 문명과 애초에 달랐던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비괘도 ‘본질은 건드리지 않고 형식만 다듬는 소극적 실천’이라기보다 치우친 기질이 적합하게 발현될 수 있는 테크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비괘를 통해 문명을 생각해 본다면, 문명이란 단순히 편리한 삶이라기보다 우리의 마음을 진실하게 하는 일상의 양식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과거에 제사를 지내고, 관계에 따른 태도와 실천을 매우 중요시했던 건 이것들이 바로 문명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문명과 매우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반면에 지금 우리에게 ‘과학 기술’과 동의어가 된 문명은 아무리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 한들 상대적으로 격이 떨어지지 않나 싶었습니다. 주역을 따라 우리가 좇을 문명이 무엇인지, 문명인으로서의 삶을 다르게 상상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옥-영주 조>
꾸밈을 나타내는 賁괘와 곤궁함을 나타내는 困괘는 그 뜻이 매우 상반되게 느껴지는데요, 괘상도 음양이 서로 반대인 착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두괘 모두 亨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조는 먼저 이 亨에 주목해 봤습니다.
먼저 賁괘는 음과 양이 서로가 서로를 빛내주는 관계여서 亨한 것이라는데요, 단전에서 柔來而文剛(유가 와서 강을 문식함)이라고 말하는 바, 음이 양을 드러내 주어서 형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分剛上而文柔(강이 나누어 위로 올라가서 유를 문식함)은 강이 유를 꾸미는 것으로 본래 乾괘였던 하괘가 中을 버리고 上九로 올라가서 조금 이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 困괘는 강이 유에 가림을 당하여 곤궁에 빠져 있는데 그 상황이 마치 못에 물이 말라 못의 역할인 윤택함을 베풀지 못하는 곤란한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험한 상황에서도 군자는 기뻐하여 그 형통한 바를 잃지 않으니, 구이와 구오가 모두 剛中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곤궁함에 처하여도 강함을 써서 그 중을 잃지 않고 정도를 행하고 능히 큰 것을 체행하는 것은 오직 군자(대인)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곤의 때에 대인이라야 형통하고 길하고 허물이 없을 수 있는 것입니다.
賁괘의 꾸밈은 文으로서 강과 유가 서로 갈마들어 文을 이룸이 天文이라 할 때 人文은 天文에 의지해서 내 갈 바를 멈추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文은 결국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爻들에서는 모두 지나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편하다 해도 그것이 의롭지 못하면 버리고 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효에 희다는 표현이 많은데, 이것은 내 것이 없다, 분별함이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육사의 匪寇婚媾는 타자를 수용하는 소박함이라고 할 수 있고요. 어쨌든 꾸미기의 기본은 제자리에 잘 있는 것이며, 인간 본성을 잃지 않는 것이겠습니다. 곤의 때는 자기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때가 아니라서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구이의 困于酒食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困于酒食의 서로 다른 의미들에 대해 논의가 좀 필요하였지만요. 그리고 곤괘의 효에서 “徐”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는데요, 곤궁할 때는 급하게 곤궁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곤궁함을 편안히 여겨 서서히 해야 종국에 기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