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화뢰서합괘와 수택절괘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합해지지 않는 때에 형벌을 써서라도 형통하고 합하는 도와 각자의 욕망대로 뻗어나가는 것보다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조금 내려놓고 어떻게 잘 절제하고 조절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크고 멀리 보았을 때는 결국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두 괘였습니다.
우선 8주차 공지 올리고 아래에 각조에서 토론한 후기 올립니다.
<8주차 공지>
* 8주차 읽을 괘는 천뢰무망괘, 뇌천대장괘입니다.
* 팀에세이 준비를 위해 오전-오후 세미나 모두 오후 팀원들과 할 예정입니다. 오후 팀에서 발제 담당하시는 분들은 토요일 밤까지 공통과제를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 이번 주부터는 지난주에 채운샘께 받은 코멘트를 바탕으로 팀별로 많은 논의를 거치셔서 본격적으로 팀에세이 초고를 작성하시면 되겠습니다.
* 간식은 경순, 수미샘 이십니다. 일요일에 만나요!
서양고대팀
지난주에는 화뢰서합과 수택절을 읽었습니다. 저는 두 괘를 읽었을 때, 서합괘는 형벌의 단호한 사용. 수택절을 절제라는 고정적인 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자 읽을 때는 두 괘가 어떻게 엮일 수 있을지 헤맸는데요. 조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두 괘가 연결되는 점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선 두 괘는 괘사에 亨이 들어가 있는데요. 서합괘는 틈이 벌어졌을 때 절괘는 무한히 뻗어나가다가 변화의 마디에 이르럿을 때 어떻게 이것을 조절할 것인가에 대한 괘들입니다. 이 변화의 국면을 中-신중하게 보내면 그것이 형통할 수 있습니다. 또 단사에서는 剛柔分(강유가 나뉜다)라는 구절이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강과 유가 섞여야 어떤 상황이 발생할 것 같은데 나뉜다고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의아했는데요. 나뉘기 때문에 합할 수 있으며, 두 괘 모두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상황을 미세하게 나뉘어 살펴보고 그 상황 속에서 맞는 절제, 형벌을 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강과 유가 나뉘었다는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화뢰서합을 제도와 법률에 관한 괘, 절제가 개인의 수양에 관한 괘라고 생각했는데요. 토론하면서 절괘의 단전에 제도로써 절제하여 재무을 상하게 하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는 구절이 새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물론 개인의 수양의 차원의 절도 있지만, 함께 살기 위해서 절도와 절제하는 것을 의논하고 합의하는 때를 나타낸다는 점이 새롭게 들어왔습니다.
서양현대철학팀
서합(噬嗑)은 입으로 음식을 꼭 꼭 씹어 입을 다문다는 의미라고 한다. 괘의 모양을 보면 초구와 상구사이에 음효들이 있어 산뢰이괘처럼 위 아래 턱 사이에 입을 나타내는데 구사효가 중간에 이물질처럼 있어 이것을 씹어 잘게 부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물리적인 형벌을 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괘사에서 이물질을 옥(獄)에 가두는 것이 이(利)롭고 형(亨)하다고 한다. 또한 서합괘는 하괘는 뇌(雷)괘로 천둥을 의미하고 상괘는 이괘(離卦)로 아래 천둥으로 인한 번개불로도 본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는 천둥과 번개불처럼 빠르고 단호하게 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서합 즉 잘게 씹는 것과 감옥이라는 형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의견을 나눈 끝에 의견을 모았다. 입안에 삼키기 어려운 큰 음식물을 우리 몸에 흡수되어 몸의 일부분으로 동화(同和)되도록 하기 위해 이빨(물리적으로)로 잘게 부수듯이 감옥도 공동체에 반(反)하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억압하여 공동체의 일원으로 교화시키는 역할이라면 서합(噬嗑)괘에서 利用獄 즉 감옥(형벌)에 가두는 것이 이롭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절괘(節卦)는 괘사에서 苦節 不可貞 고통스런 절제는 올바르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절제는 어떤 것을 ‘멈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아가던 것을 멈추는 것은 결단과 감내(堪耐) 등이 수반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 고통스런 절제는 올바르지 않다고 하는 것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런데 육사효는 음효의 자리에서 정(正)을 얻었고 구오를 받들면서 드디어 安節 亨 절제에 편안함을 얻어 형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오효에서 양강하고 중정하며 존귀한 자리에서 드디어 감미로운 절제(甘節)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고절에서 안절로, 안절에서 감절로의 변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괘사에서 고절이 올바르지 않다(苦節 不可貞)는 것은 절제는 고절이 아닌 안절과 감절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견을 모았다. 처음에는 절제하는 것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어색하고 불편(苦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겨내다 보면 점차 익숙해지는 평절로 변화하지 않을까? 그래서 절제에서 편안함을 느끼다 보면 감미로운 절제를 경험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동양철학팀
서합괘에서 ‘서합’은 ‘깨물어 합함’의 뜻입니다. 직관적으로 서합괘상을 봐도 구사효인 딱딱한 것이 입 안에 있는 모양으로 이로 인해 틈이 생기고 다른 것들과 합치되지 않는 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절괘는 잡괘전에서 ‘그침(止)’이라고 합니다. 한자 節이 대나무의 마디를 의미하듯 대나무가 위로 쭉 뻗어 올라가기 위해서라도 규칙적으로 마디(節)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서합과 절 두 괘는 모두 어떤 시점에서 틈이 벌어지거나 혹은 무작정 뻗어가기만 하는 궁한 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어떻게 형통함을 통해 변화의 리듬을 탈 것인가에 대한 괘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합과 절의 괘사 모두 ‘형통하다(亨)’로 시작하는데요. 주역의 세계에는 변화만이 변치 않는 진실이라고 말해주지만 이 변화는 음양음양이 그저 무한정 반복된다고 만물이 생성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계절처럼 반드시 일정한 리듬, 주기를 따르고 그런 기운을 받아 만물도 생을 변화 속에서 지속할 수 있습니다.(久則窮 窮則通) 그런 의미에서 서합은 옥사나 형별를 써서라도 딱딱하고 단단한 것을 깨물어 합치하는 뜻이고, 절도 무절제함을 제도(制度)하고 절제(節制)하여 다듬는 뜻이라 언뜻 보면 단호하고 과도함을 쓰는 것으로만 읽힐 수 있지만 옥사나 절을 쓸 때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中을 얻음을 강조하며 또한 서합이든 절이든 이것을 쓸 때는 신중할 것을 강조하는 것들이 보이는데요.
먼저 서합괘는 괘사가 噬嗑 亨 利用獄 (서합은 형통하니 형옥을 씀이 이롭다.)라고 하는데 왕필은 이에 대해 물건이 친근하지 않아 틈이 있고, 물건이 가지런하지 않음(不齊)은 허물이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틈과 허물이 있을 때 깨물어 합침은 통하게 하는 것(通)이라 형벌로 이겨 통함은 형옥의 이로움이다(刑克之通)라고 풀고 있습니다. 형옥을 씀이 이로움이 여전히 거부감으로 여겨진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는데요. 뭔가 단단한 것이 사이에 껴서 틈이 벌어진다는 서합의 때가 어떤 상황일까 좀더 상상해 본다면, 소수의 집단에게만 지나치게 혜택이 돌아가는데 반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들로 인해 궁핍하게 살아가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때를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물건이 간격이 벌어져 있을 때는 깨물어 합함을 사용하지 않으면 형통할 수 없다고 왕필은 말하죠. 즉, 서합의 때에는 간격이 있을 때는 이들을 설득하거나 그냥 두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깨물어 합함을 사용하는 것이 통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괘상이 위에 밝음을 상징하는 리괘가 있고, 아래에는 강한 운동성을 상징하는 진괘가 있어서 옥사를 현명하고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이를 단전에는 강유가 나뉘어 동하여 밝고, 우레와 번개가 합하여 드러난다.(剛柔分 動而明 雷電 合而章)고 했습니다. 공영달 왕필의 주석을 보면 서합이 가능한 이유는 우레와 동함의 역량이 옥사를 명백하게 판단할 수 있는 때이므로 깨물어 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렇게 명명백백 옥사를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라는 거부감이 들기는 합니다. 단전 마지막 부분 ‘유가 중을 얻고 위로 가니 비록 자리에 마땅하지 않으나 형옥을 씀이 이롭다(柔得中而上行 雖不當位 利用獄也)는 옥사의 판단 주체인 육오효에 대한 언급이다. 육오효는 정위가 아닌 것이 오히려 명철하게 옥사를 쓸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옥사를 단호하게 결단하는 것은 동시에 이를 신중하게 함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서합괘에서 신중함을 쓰는 것은 대상전에도 잘 나타나는데요. 雷電 噬嗑 先王以 明罰勅法(우레와 번개가 서합괘이니 선왕이 이를 보고 형벌을 밝히고 법을 신칙한다.) 여기서도 옥사의 신중함을 찾아본다면 공영달의 소에서 옥사를 단호하게 결단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형벌을 밝히고 법을 신칙하는 것은 그것이 옥사를 사용하기 위함도 있으나 ‘두려워할 만한 뜻을 취’하고 있는 것에 방점을 두고 읽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으로 절괘는 괘사가 節 亨 苦節 不可貞 (절은 형통하니 괴로운 절제(節制)는 바르게 할 수가 없다.)입니다. 절제함은 방만하게 그 상태로 계속되기만 하는 것은 결국 막히게 될 것임을 이해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의 때는 지속하는 상황에 제동을 걸고 가지치기를 하여 다른 리듬을 만들어 막힘을 뚫고 형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괘사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변화를 살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지 변하고 바뀌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죠. 지금까지의 리듬이나 해오던 것이 바뀌거나 태클이 들어오면 거부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절의 때는 그 절이 괴로움(苦)으로 느껴지기가 너무나 쉽죠. 그래서 괘사에서도 ‘괴로운 절(苦節)’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공영달도 ‘절은 모름지기 중을 얻어야 한다. 절을 하기를 지나치게 괴롭게 해서 각박함에 상하면 사람들이 견뎌내지 못하니, 다시 바르게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즉, 절의 때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절이라기보다는 공동체나 국가의 차원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도를 구하기 위해서 절도와 절제하는 것들을 의논하고 합의점을 구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단전에서 절이 형통함은 강유가 나뉘고 강이 중을 얻었기 때문(節亨 剛柔分而 剛得中)처럼 절괘에는 과함을 단속하고 경계하는 강중한 역량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절은 한번 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때와 상황에 따라 매번 새로 중을 잡는 신중하고 깨어있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대상전 수도를 제정하고 덕행을 의논한다(制數度 議德行)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당장 나에게만 좋고 즐거운 것만 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만 그렇게 각자 그렇게 한다면 결국 다 같이 살지 못하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서로의 즐거움을 절제하고 내놓는 것이 더 크고 멀리 볼 때는 개인적으로 더 큰 기쁨이 되고 결국 형통(亨通)할 수 있다는 이해와 합의가 필합니다. 그래서 단전에서는 이를 제도로써 절제하여 재물을 상하게 하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節以制度 不傷材 不害民)고 합니다. 따라서 이럴 때는 절이 괴롭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고 함께 살기 위한 것이 결국 나를 위해 좋음을 이해한 상태이므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절은 절도와 절제를 제정한다고 해서 쭉 계속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매번 중을 잡아가야만 기쁨(兌)으로 괴로움/험함(坎)을 겪어나갈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단전에서는 기쁨으로 험함을 행하고 자리에 마땅하게 절제하여 중정하여 형통하다(說以行險 當位以節 中正以通)고 합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과함에 벗어나지 않도록 제도를 손보지 않고 그 상태로 두어 그저 따라야 하는 것으로 되면 법이나 규칙이 형식만 남고 처벌하는 것으로만 남아 사람들을 옥죄고 괴롭게 만드는 것(苦節)으로밖에 될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조는 지난 주 서합괘 절괘 읽으면서 교사 연가투쟁 불인정을 포함해 교사 투쟁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는데요. 두 괘 모두 '전체 우주 속의 나'라는 관점을 놓치지 않고 있는데, "어떤 일의 매듭이 있고 , 자기 규율을 세우는 것" 을 배움과 관련해 생각해봐도 좋겠다 싶었어요 . 우리 시대의 교육현실과 '배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