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공지라니..! 죄송합니다! 이미 다음날 준비를 다 끝내셨겠지만, 아주 뒤늦은 공지를 올립니다. ㅠㅠ
주역 에세이 발표(9월 24일)까지 한 주 남았습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개인 에세이도 쉽지 않지만 팀 작업으로 함께 글을 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각 조의 주제는 다르지만 모든 조가 '함께 글쓰기의 어려움'이란 문제를 공유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중지를 모은다는 건 단순히 '더하기'가 아니었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담긴 글을 쓰려면 개인 에세이에 코멘트를 하는 것 이상으로 덜어내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 모두의 생각이 담긴 글을 쓴다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요? 남은 한 주 동안에도 계속 생각해야 할 질문인 것 같습니다.
내일은 지수사괘와 택뢰수괘를 공부하고요. 간식은 영주쌤과 은정쌤께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이번에는 현주쌤께서 질문을 갖고 잘 정리해주셔서 그걸로 다른 두 조의 후기까지 대신하겠습니다!
천지의 운동은 무망한데, 인간은 왜 유망한 것인지에 대해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망无妄”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허세나 위선이 없는 진실한 그대로의 자연의 도리라는 의미와, 기대하지도 않았던 망외望外의 복福이라는 의미”(도올, 『도올주역강의』)가 있다. 다시 말해 무망은 허망虛妄이 없는 상태로, 우리가 정도를 지키지 않으면 망령된 행위로 인해 재난이 잇따르게 된다. 그래서 군자는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고 했다(大壯, 君子以非禮弗履).
우리 인간은 종종 망령되고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으며, 때론 그것을 단행하고자 무모한 시도조차 해댄다. 그런 행위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 욕망을 통제하기가 어렵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다. 물론 다른 물物들도 욕망이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본성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인간을 제외한 만물은 천지운행에 순응하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닐 뿐이다. 꽃, 나무 등의 자연물은 우리 인간처럼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시비의 감정 또한 없다. 생장소멸의 운동을 자연스럽게 해나갈 뿐이다.
그런데 이런 순환이 인간에게 다가오면 브레이크가 걸리고 만다. 우리는 순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순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거기에 덧붙이는 것들이 많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망외의 복’이 오듯이 영원한 생명이 덤으로 지속되기를 망상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유망은 이러한 것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스피노자는 그러한 유망을 ‘부적합한 인식’이라고 명명했고 푸코는 ‘인식형이상학적 자기’라고 명명했다. 이 두 가지 인식의 유형 모두 초월적 일자를 상정하고 있다. 초월적 일자(신)는 항상 고정되어 있고 변화가 없는 그 무엇이다. 우리의 인식이 그 일자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때 비로소 우리는 불멸의 신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변의 신체를 욕망한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획득하고 그것이 소멸하지 않기를 욕망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유망이다. 인간만이 소멸을 부정하고 배척한다. 인간이 소멸한다는 것은 변형의 차원이다. 변형의 삶을 살기 위해선 자신의 자리位에 맞게 행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윤리적 문제가 개입하는 것이고 그 방법의 하나를 대장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장괘는 陽이 장성할 때이다. 이 시기는 대인들이 소인들을 밀어낼 수 있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과도한 힘의 과시로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힘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사실 힘을 숭상하여 건장함을 쓰는 자는 소인(小人勇壯)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君子以非禮弗履)고 했다. “건장하면서 예를 어기면 흉하니, 흉하면 건장함을 잃는다. 그러므로 군자가 대장을 응용하여 예를 순히 하는 것이다”(왕필, 『주역정의』). 그렇다면 예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예는 극기복례를 실천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 같다. 우리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고 천지운행에 따른 삶의 양식을 조형하는 일이 극기복례가 아닐까.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처럼 사욕에 대한 경계를 대장에서 말하고 있다. 강성한 힘의 때에 오히려 예를 갖추고 우리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렇듯 대장괘에서는 물리적 힘보다는 윤리적 가치와 때에 맞게 변형할 수 있는 역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이 우리가 천지지정天地之情을 획득하는 일이자 무망의 도를 함양하는 일이다. 언급했듯이 소멸을 물리적 힘의 약화로 판단해서 그것을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의 때에 맞게 행한다는 것에 대한 사유가 무망의 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