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서양 근대철학팀은 3학기 텍스트로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를 읽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1강 전반부와 후반부 강의를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푸코의 논의가 촘촘하고, 복잡하기에 이번 주에는 내용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세미나를 이어갔습니다. 개인적으로 <주체의 해석학>은 이전에 읽어봤는데, 다시 읽으니 새롭게 다가오고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주체의 해석학> 1강을 전반부를 먼저 정리해보면, 푸코는 친절하게도 자신이 어떤 주제로 강의를 진행할 것인지 알려주고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체’와 ‘진실’의 관계들이 어떤 형태의 역사 내에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입니다. 푸코는 이번 책을 통해 ‘주체’와 ‘진실’ 이 두 관계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변천했는지 탐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변화를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푸코는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 개념을 가져옵니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 배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푸코는 ‘주체와 진실’의 문제에 있어서, 서양철학사에서는 ‘자기 인식’(=‘너 자신을 알라’ = gnothi seauton)의 개념을 빼놓을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서양철학사에서는 주체와 진실의 관계에 ‘자기 인식’을 중심에 두지만, 푸코는 그것을 의심하고 전복하려 합니다.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해 온 것일까요?
푸코는 역사를 헤집습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격언이 출현할 때, ‘자기 인식’은 어떠한 앎을 인식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망각하지 말고 돌보며 배려해야 한다는 말”로. 즉,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다잡는 격언으로 쓰였음을 발견합니다. 고로, 고대 그리스에서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에 종속된 상태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 플라톤의 텍스트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의 예로 들며, ‘자기 인식’이 아닌 ‘자기 배려’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야기합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에피쿠로스, 견유학파, 스토아주의자, 기독교 등등에서도 ‘자기 배려’의 개념이 중요하게 이용됐음을 말해줍니다. 푸코는 이러한 ‘자기 배려’의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확장되고, 그 의미가 변화되었는지 탐구하려는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면서 푸코는 ‘자기 배려’ 개념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할 세 가지를 알려줍니다. 첫째로 ‘자기 배려’는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태도”라는 것. 그리고 둘째로, ‘자기 배려’는 “주의 시선의 일정한 형식이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배려한다는 것은 자신의 시선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고, 말하자면 시선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이동시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자기 배려’는 “항시 자신에게 가하는 다수의 행위를 지칭합니다. 이 행동들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변형하고 정화하며 변형하고 변모시킵니다.”
마지막으로 푸코는 ‘철학’과 ‘영성’의 차이를 말합니다. ‘철학’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질의하고, 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거나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사유의 형식”이라면, ‘영성’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자기 배려’는 “정확히 영성의 조건 전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기 변형의 총체를 지시합니다.” 반면에 근대 시기부터 ‘자기 인식’은 “끝을 알 수 없고 진보의 무한한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 배려’가 힘을 잃고, ‘자기 인식’이 힘을 획득한 것은 ‘데카르트의 순간’이라 일컫습니다. 푸코는 이때부터 진실이 그 자체로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강의에서 쭉- 이야기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1982년 1월 6일 강의 후반부
후반부 강의에서는 ‘자기 배려’ 개념이 ‘데카르트의 순간’에 갑작스럽게 철학적 사유와 관심으로부터 배제된 게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진실 접근의 문제에서 주체의 자기 변형 요청이 끊어지고, 인식의 독자적인 전개가 되어버린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천천히 변화되어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번 챕터에서 이 모든 것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우선, 과학의 발전 이전에 신학과 영성 간의 분쟁에 그 힌트가 있음을 예고합니다.
그러면서 이번 강의에서는 ‘고대 그리스’로 갑니다. 철학사에 있어서 ‘자기 배려’가 처음으로 출현한 ‘소크라테스-플라톤’ 시기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자기 배려’ 개념이 처음부터 지식인(철학자)가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 배려’라는 용어는 스파르타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는 말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특권’과 관련이 있는 원리였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노예를 소유하고 있고 토지를 우리 손으로 경작하지 않으며, 이 모든 물질적 배려를 타인들에게 맡기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시작으로 ‘자기 배려’는 신분적 특권을 표현하는 용어에서 벗어납니다. 플라톤이 저술한 <알키비아데스>에서 ‘자기 배려는’ “자기 자신을 배려하지 않으면 타자들을 잘 지배할 수 없고 자신의 특권들을 타인에 가하는 정치 행위로 변환시킬 수 없으며, 합리적 행위로 변환시킬”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신분적 개념에서 윤리적 개념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이 시기에 자기 배려의 문제는 교육의 결함, 교육의 시기, 무지의 자각과 관련이 있음을 이야기해줍니다. 이러한 논의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아직 파악이 안 되지만, 마지막에 푸코는 재미난 질문을 던지고 강의를 마무리합니다. “자기를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우리가 배려해야 할 자기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을 붙잡고, 또 다음 강의에는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하며, 이번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정리를 정말 잘해주셨네요.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아 토론 시간 때 많이 헤매었는데 빈샘의 정리한 글 읽으니 그래도 많이 이해가 됩니다.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의 의미, 철학과 영성의 차이와 자기배려의 관계. 앞으로 <주체의 해석학>을 공부하기 위해 빈샘이 정리한 내용을 꼭 담고 있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정리를 정말 잘해주셨네요.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아 토론 시간 때 많이 헤매었는데 빈샘의 정리한 글 읽으니 그래도 많이 이해가 됩니다.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의 의미, 철학과 영성의 차이와 자기배려의 관계. 앞으로 <주체의 해석학>을 공부하기 위해 빈샘이 정리한 내용을 꼭 담고 있어야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