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 읽은 괘는 택풍대과(澤風大過)와 뇌산소과(雷山小過)였습니다. 둘 다 과(過)라는 찔리는^^ 이름을 달고 있지요. 과(過)라고 하면 과오(過誤), 과실(過失) 같은 '잘못'을 뜻하는 말이 떠오르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주역>에서는 그냥 잘못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과(過)는 정도를 지나치는 것이기에 분명 문제가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다 해서 과(過)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하진 않거든요. 오히려 때에 따라서는 지나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대과와 소과입니다. 다만 그 지나쳐야 하는 때의 양상이 다를 뿐이죠.
그런데 왜 그냥 과(過)가 아니라 대과(大過)와 소과(小過)일까요? 문제면 문제고, 지나치면 지나친 거지 왜 거기에 크고 작음을 뜻하는 글자를 붙였을까요? 그건 단지 상황의 스케일 문제가 아니라, 정말 종류가 다른 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과는 소과의 문제가 더 커진, 그런 종류의 때가 아니라는 것이죠. 문제가 다르면 대처하는 방식도 달라야 하기에 <주역>은 두 괘를 나누어 본 것 같습니다. 단전에서는 두 괘의 특징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대과는 강과이중(剛過而中), 소과는 유득중/강실위이부중(柔得中/剛失位而不中). 한 괘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힘이 양이냐 음이냐에 따라 과(過)의 종류가 다르다고요. 그렇다면, 대과는 '큰 지나침'이라기보다는 양적인 지나침, 소과는 '작은 지나침'이라기보다는 음적인 지나침의 문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뭔가 상황이 정도를 넘어선 것도 맞고, 그에 대처하는 태도도 정도를 넘어서야 하지만, 상황 자체는 다른 것이죠.
대과, 좋은 것의 범람
그럼 대과와 소과의 차이는 뭘까요? 우선 대과와 소과는 괘 자체만 놓고 보면 소성괘보다는 효가 어떻게 배열되어 있느냐에 따라 이름이 이름이 붙었습니다. 대과는 딱 봐도 양이 중간에서 팽팽한데 그에 비해 맨 아래와 맨 위는 음효로 그것들을 지탱할 수 없을 것만 같죠. 단전에서는 이를 두고 본말이 약하다[本末弱也]라고 합니다. 괘사는 들보 기둥이 휘어짐[棟撓]이라고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주죠. 지붕을 지탱해야 하는 들보가 휘어졌으니 그냥 연장(?)으로 뚝딱거려서는 해결이 안 될 것입니다. 아예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하겠죠. 이전과 똑같이 했다가는 다시 같은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설계 자체를 다시 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기초부터 다시 쌓아올리는 정성을 보여주는 게 초육효의 자용백모(藉用白茅)입니다. 흰 띠풀은 하찮은 물건이지만, 그걸 까느냐 여부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지죠. 이 과도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정말 자각한 사람이 완전 달라지겠다는 태도를 과도하게 표시한 게 이 자용백모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전과 똑같이 할 공산이 크니까요. 그럼 계속, 아니면 더 큰 일이 일어나겠죠. 효사에서는 이전처럼 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정응하는 효들은 응하기 때문에 편협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높이 올라가기보다는 계속 자신을 낮추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효들을 좋게 해석하죠. 그 이유는, 대과의 과도함이란 큰 것의 과도함[大者過也],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야말로 도가 지나칠 정도로 강조된 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지금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상식이라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어쩌면 비상식적인 행보를 보여야 할 때인 거죠. 가령, 작년 팀 주역에서는(^^) 대과괘를 붓다의 깨달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붓다는 일국의 왕자로 태어나 그야말로 삶의 슬픔이라고는 없는 삶을 살았는데, 이 좋은 것들의 과도함이 생의 구원으로 이끌어주지 못할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정말 비상식적인 과단성으로 그 쾌락을 끊어버리고 고행과 구도의 길로 들어서지요. 저희 조에서 그 글을 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해보니, 붓다야말로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无悶.]한 영웅적(!)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이 어느 순간 재난이 될 때, 이때 영웅이란 단순히 힘이 세거나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 다른 방식으로 위험을 헤쳐나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소과, 일상의 틈
반면 소과는 음효가 위아래로 가득해서 양효들이 괘 안쪽으로 감춰지기라고 한 것 같습니다. 단전에서는 양이 중(中)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큰 일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失位而不中, 是以不可大事也]. 왕부지는 음들이 제 한계를 벗어남이 심한 상황이라고 했죠. 단전에 따르면 나는 새의 모양을 한 괘인데[有飛鳥之象], 여기서 새의 날개(음효들)가 몸통(양효들)을 압도했다고요. 그런데 새는 날개를 펴고 날아다녀야 하지 않나? 어떻게 보면 정상적인 새의 모습을 보고 왜 음들의 지나침이라고 했을까요? 소과는 이렇게 말합니다. 새가 날아다니는 것은 결국 날개를 접고 쉴 곳을 찾기 위해서라고. '나는 새'만 떠올린다면, 그것의 본질을 잊고 만 것이죠. 때문에 새는 마땅히 내려와야 크게 길합니다[宜下, 大吉].
대과가 좋고 필수적인 것들의 역습(^^)이라면, 소과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지나침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규칙을 따릅니다. 인사도 하고, 감정을 표하기도 하고, 검소함이나 겸손함 같은 것을 주워섬기기도 하죠. 인간 관계에서도 대하는 사람에 따라 말을 달리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들을 다 생각하면서 하진 않죠.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일일이 생각하기보다는 그것이 체화된 습관대로 행동합니다. 평소에는 그런 습관과 상식대로 행동해도 큰 잘못이 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것이 겉치레가 되거나, 무시되는 때가 있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쌓였을 때, 문제는 발생하는 거지요. 이것은 들보 기둥이 휘어지는 정도로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재난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가끔 인간 관계에서 이런 소과의 때를 만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 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화를 내거나 소원한 관계가 되는 경우, 그 싸-한 순간. 그럴 때 우리는 당황하거나, 문제가 뭔지도 모른 채 넘어가버리고 맙니다. <주역>은 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을 음적인 과(過)라는 이름으로 포착한 게 아닐까요? 소과는 그 읽기도 어려운 때를 경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바로 그 습관적인 생각과 행동을 과도할 정도로 하라는 겁니다. 평소 행동도, 상례라는 비일상도, 각종 씀씀이도 지나칠 정도로 그에 맞는 공손함, 슬픔, 검소함을 발휘하라는 겁니다[行過乎恭 喪過乎哀 用過乎儉]. 이것들은 어떻게 보면 다 상식적인 조목들입니다. 하지만 무시하거나 습관적으로, 겉치레로 하기 쉬운 것들이죠. 그게 있는 이유도 의미도 모른 채 습관대로 행하는 것들. 그런데 이런 규약이 있는 이유는 사실 오랜 역사와 경험이 쌓인 결과이기도 합니다. 가령, 비행기를 탈 때 온갖 절차가 있는 이유는, 그게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죠. 그 틈을 타 많이 떨어졌다(!)고요. 하지만 그 역사나 의미를 모르면 우리에게는 그저 불편한 일일 뿐입니다. 시간이나 예산을 이유로 하나둘씩 빼버리고 싶기도 하고요. 소과는 이런 마음, 일상의 균형이 지켜지는 것을 우습게 보는 마음을 경계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일수록 작은 것에 지나쳐야 한다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