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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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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내편'의 서막격인 '소요유(逍遙遊)'를 읽었습니다. 이 편은, 원래 작은 물고기 알인 '곤(鯤)'이 거대한 물고기가 되어 검푸른 바닷 속을 헤엄치다, '붕(鵬)'이 되어 하늘 연못을 향해 날아가는 그 밑도끝도 없어 보이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 '붕'은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 바닷물 때리기를 삼천리요,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치솟기를 삼천리나 하고, 날기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나서야 숨 한번을 내쉰다고 합니다. 시작부터 장자는 판타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우리를 살짝 놀라게 합니다. 그 허무맹랑함에 중국식 뻥이 이렇지 뭐 하고 넘어가려는 마음이 일기 무섭게, 장자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확인시켜 줍니다. 하늘을 나는 '붕'을 두고, '쓸데없이 구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간다'며 비웃기를 일삼는 '매미나 새끼 비둘기'들 말이지요. <장자> 전편을 통해 드러나는 大와 小, 大知와 小知의 대비가 여기서 선명해집니다. 규범적인 삶에 얽매인 난장이적 삶이 小, 이로부터 벗어나 떨쳐 날아오른 삶이 大로 표상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곤(鯤)'이 '鵬 되는(化而爲鳥)' 이야기를 통해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변신'과 '초월'의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에게 이같은 '변신'이 요구되는가? 왕보는 여기에 초점을 맞춰 <장자>의 편제를 재구성해 '인간세' 편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합니다. 몸을 지닌 존재로서 온갖 사회적 제약에 갇혀 '不得已'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먼저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토론 또한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가 단순히 현실 부정이나 탈속 지향이 아니라 현세의 삶에 대한 긍정의 맥락에서 받아들이고자 옥신각신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붕을 비웃는 보잘것없는 미물들이 분명 우리의 모습이라면, '化'를 통한 변신의 삶 또한 이 물고 뜯고 상처받고 입히는 여기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化할 것인가. 장자는 소지와 대지의 대비 외에, 레벨이 다른 몇 개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권력의 체계 안에 들어 있는 현실 정치인들의 삶, 자기(內)와 바깥 세상(外)을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의 시선에 연연해하지 않는 송영자(비판적 지식인), 바람을 타고 다니지만 여전히 뭔가에 의지하는 바가 있는 열자의 세계(도교적 신선),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지의 정기를 타고 육기(六氣)의 변화를 통어해 가없는 곳에서 노니는 존재'인 지인(至人). 장자가 추구하는 지인은, 功名은 물론이고 자기(己)를 비롯한 일체의 의지처로부터 자유로운, 오로지 氣로서 세계와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다음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요임금으로부터 왕위 선양을 제의받고 헛소리 말고 돌아가 쉬라고 일갈했던 허유 같은 은사(隱士)가 바로 장자적 지인이 아닌가 싶은데, 뒤이어 '피부가 눈같고 바람과 이슬을 마시며, 하늘에 닿은 홍수도 그를 빠트리지 못'한다는 막고야 산의 신인(神人)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한편으로 현실에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른 한편으론 '끝없이 날아올라갈뿐 당최 돌아오지 않는' 황당무계한 궤변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장자는 이런 저같은 사람을 일러 속좁은 '쑥대 같은 마음'의 소유자라 하는데, 그만큼 <장자>는 해석의 스펙트럼이 넓은 텍스트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후의 수용과정을 보더라도, <장자>는 유가와 결합해 현실정치 속으로 들어오기도, 위진 시대에는 현학이나 미학과 결합되기도, 나아가 도교의 사상적 지반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또 어떤 식으로 <장자>와 만나야 할지, 그 뜨거운 접속의 지점을 찾는 일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소요유'의 후반부는, 명가(名家)의 대표주자인 혜시와의 대화를 통해 '무용지용(無用之用)'에 관한 논의를 보여줍니다. 마치 장자의 사유처럼 크기만 학고 속이 텅 비어 보이는 '박'의 쓰임을 놓고 작은 쓸모에 갇혀 큰 쓸모를 알아보지 못하는 혜시를 비판하면서 장자는 큰것의 무용함을 유용함으로 전환하는 역설의 사유를 보여줍니다. 거대한 박을 두고 물을 담는 데 쓸모가 없다고 타박만 할게 아니라, 쪼개서 배를 만들어 물에 띄워 소요하는 용도로 사용할 생각은 왜 못하느냐는 것이지요. 오로지 눈앞의 현실적인 쓸모에 목을 매는 이 자본의 시대에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주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크기만 할 뿐 어떤 인간적 쓸모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大而無用)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는 '가죽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는 繩墨이니 規矩 같은 온갖 인위적 잣대를 들이밀려고만 하지 말고, 차라리 '무하유지향'과 '광막지야'에 이를 심어두고 그 아래에서 '소요'하고 '방황'하라는, 차원이 다른 쓸모의 양상을 제시합니다. 아, 無何有之鄕, 그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니요, 그곳은 어디일까요? 왕보 선생은 그곳이 세속적, 신체적 차원과는 거리를 둔 심적 초월의 지점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이는 우리의 해석 역량의 최대치가 요구되는 개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즐겁게 나아가 보는 걸로요. 다음 시간에는 <장자>의 모든 편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제물론'입니다. 어려운 만큼 더 흥미로운 내용들이 이어질 거라 생각해 봅니다. 발제, 정리는 구혜원 선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