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철학 3학기 3주차(8/6) 공지
남이 한 해석을 익히는 것을 넘어 자기 해석이 필요한 것이 공부인 건 맞지만, 새로운 해석을 만날 때마다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번 주 읽은 공영달의 대과괘와 소과괘 해석은 대,소를 음양으로 한정하지 않고, 과(過)도 과오나 잘못이 아닌 과월(過越)로 해석하지요. 덕분에 토론하는 우리도 대과괘에서는 시종의 문제를, 소과에서는 실천적 지점들을 보며, 어떻게 과도하지 않고 중을 잡아 갈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걸 발판 삼아 우리 시대의 담론들과 만날 수 있는 훈련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그래서 다음 주부터 좀 더 깊은 토론을 위해 과제의 형식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 주역 과제는 “발제자”를 정하기로 했습니다. 조별로 한 명씩 돌아가면서, 단순한 괘 설명이 아니라 그 괘를 통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 중심으로 발제를 해오면 되겠습니다. 물론 발제가 아니어도 나눌 질문을 만들어 와야겠지요.
▶ 3학기 조별 발표도 형식이 정해졌는데요, 각 조별로 중심 주제 5개가 제시되었고, 조에서 하나를 선택해 개념을 해석하고 주역의 괘와 연결해 보는 것입니다. 괘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 조별로 선택한 개념을 잘 설명하는 걸 중심에 두고 합당한 괘 하나를 정해 연결하면 되겠습니다. 세부 사항은 조별로 정하면 될 것 같아요.
▶ 다음 주 읽을 괘는 ‘수천수괘’와 ‘뇌지예괘’입니다.
▶ 간식은 문빈과 지영샘께 부탁드릴께요.
조별로 나눈 비슷한 듯 다른 이야기들이 재미있네요. 조별 토론 후기입니다.
희수-태욱조
이번 시간에는 대과와 소과를 함께 읽으며 일상의 리듬과 균형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소과와 대과는 둘 다 지나침을 뜻하는 과(過)를 뜻합니다. 두 괘는 다른 괘들과 달리 소성괘의 의미에서 괘명을 따기보단 효들의 관계 자체에 기댄 것으로 보입니다. 대과는 '본말이 약하다'라는 단전의 말처럼 과도한 양으로 이루어져 있고, 소과는 음이 과도하여 가운데 양이 몰려 있지요. 새가 양 날개를 펼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소과괘의 특징입니다. 이 특징은 나는 새가 아래로 가는 것이 대길하다는 괘사와 함께 해석되기도 하지요.
두 괘의 '과(過)'는 중의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도를 넘어선 과도함,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크고 작은 것을 과도하게 쓰는 것입니다. 대과가 아주 험난한 시기를 넘어서기 위해 더 큰 과도함으로 맞서는 것이라면, 소과는 일상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쩌면 작은 것들에 더 공을 들이고 과도할 정도로 발라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예로 우리는 '큰 과도함'으로 붓다의 시대와 붓다의 깨달음(큰 것!!), 그리고 '작은 과도함'으로는 금방 잊고 마는 일상의 작은 규칙들과 그것의 의미를 깨우치는 세심함 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자세를 각 괘의 대상전에서는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无悶.)', '행과호공 상과호애 용과호검(行過乎恭, 喪過乎哀, 用過乎儉)'이라고 했고요. 문제 상황에 대해 그것을 해결하는 힘을 외부에서 찾지 않는 것, 문제 상황과 무제 해결이 분리되지 않는 것도 <주역>의 특징이라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정랑-규창조
이번 주는 과도함을 얘기하는 두 괘인 택풍대과와 뇌산소과에 대한 얘길 나눴습니다. 전자는 큰 것의 과도함을 후자는 작은 것의 과도함을 말하는데요, 그렇다면 과도함, 過란 무엇일까요. 공영달은 ‘과’는 過越(뛰어넘음)의 과를 이르니, 經過(지나감)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요, 저희는 덧붙여 이런 얘기들을 했습니다. ‘과’는 상황을 악화시키는 실천이라기보다 ‘과’한 상황에서 행해야할 실천(時中)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중용>에서는 희노애락 같은 정서를 관계 속에서 적절하게 발현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제기했고, 대과괘와 소과괘에서는 ‘중’으로부터 벗어난 정도에 따라 행해야 할 ‘과’를 규정한다고. 또 과도함이란 부정적이고 경계해야 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해왔는데, 이것은 과유불급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용을 공부하며 과도함도 부족함도 중도에 이르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자체가 좋고 나쁨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므로 과도함이 때에 따라서 형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대과와 소과괘이다. 그러므로 대과괘와 소과괘는 ‘과’의 차이만 있을 뿐 군자가 발휘해야 할 역량은 ‘중’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대과의 괘사를 보겠습니다. “들보기둥이 휘어짐이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워서 형통하다”
들보기둥이 흔들리는데, 계속해서 가는 것이 이롭다는 말이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었는데요, 주역에선 과도한데 왜 멈추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대과’라는 말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의 과도함’, 즉 소인의 지나침이 아닌 성인의 지나침으로 주로 위기상황이나 비상시에 이루어지는 공적인 과도함이기 때문이랍니다. 이를테면 금융실명제 같은. 이를 두고 단전에선 말합니다. 강함이 과도하지만 구이효와 구오효가 모두 中道를 이뤘으니, 이는 처신하는데 중도를 잃지 않은 것으로, 큰 것이 과도한 때에 중도로서 공손하고 기뻐하면서 행동하므로 일을 진행해나가면 이롭고, 형통할 수 있는 이유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못이 나무를 없애는(澤滅木) 때에 군자는 홀로 자신의 길을 가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에 은둔하여서도 근심하지 말라고(獨立不懼, 遯世无悶) 상전에선 말합니다.
이번엔 소과의 괘사를 보겠습니다. “사소한 일은 할 수 있지만 큰일은 할 수 없으니, 나는 새가 소리를 남기는데 위로 향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아래로 향하는 것을 마땅히 하면 크게 길하다.” 갈매기 조나단처럼 높이 날지 말고, 아래를 향해 날라고 합니다. 이는 양이 지위를 잃고 음이 과한 때라서 좋지 않기에 위로 올라가면 이치를 거역하고 아래로 내려오면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단전에서 말합니다. 이것은 위를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마음을 다 잡는다는 얘기겠죠. 내려와서 작은 일에 힘을 쓰는 과도함이란, 때에 따라서 행한다는 것(與時行也)이 중요해 보인다며, 여튼 일상의 과도함에 대한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크든 작든 ‘과도함’, ‘過’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영주-정옥네
이번 괘는 ‘지나침, 과함’의 뜻을 가진 대과와 소과괘데요. 우리조는 왕필 공영달의 過에 해석인 (평소보다) ‘뛰어넘는다’고 하는 과월(過越)의 뜻을 실마리로 대과와 소과 이 둘의 때의 지나침, 뛰어넘음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대과괘는 음효인 초, 상효사이에 네 개의 양효들이 그 가운데에 있는데 이 모습이 마치 양 끝의 약한 본말이(두 음효) 상대적으로 중간에 있는 비대해지는 양효들을 지탱하지 못해 집의 대들보가 휘는(棟橈) ‘쇠하고 환란이 있는’ 세상으로 왕필공영달은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본말이 약하다는 것을 始終 즉, 시작과 끝이 약하다고도 풀고 있습니다. 주역의 세계에서는 동일한 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변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시의 변화처럼 시작이 있으면 펼치고, 떨쳐내고, 씨를 남기며 매듭을 짓고 나면, 봄이 되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을 하면서 시간성이라는 차이를 지니면서 생생변화하는 반복의 과정을 겪어나갑니다. 그래서 주역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지요. 영원하고 변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것도 시간의 흐름에 있다 보면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언제나 때를 잘 읽고 때가 아닐 때는 망동하지 말고 그저 때를 믿고 맘 편히 하고 있으라는 당부가 많습니다. 그런데 대과의 때에 본말이나 시종이 약하다는 것은 이런 변화의 흐름을 사유하고 읽지 못하고,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어떤 때에 머무르려고 할 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원들은 이런 대과의 때가 삶에서 어떤 때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는데요. 예를들어 무한한 성장, 발전, 진보가 계속 될 것처럼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사회 혹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도 노화나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젊어지고 아프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우리의 애씀이 모두 대과의 대들보가 휘는 흉흉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현실로 드러난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어디서 왔고, 또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시종, 본말의 추이를 사유하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 때를 대과의 때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과의 때에는 기존에 해오던 방식을 고수하면 이런 대들보의 휘어짐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기존에 힘을 쓰던 방식과 정반대의 힘을 사용해서 휘어짐을 받쳐주어야 전체적인 힘의 균형을 보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과의 효사들은 정위에 있거나 정응하는 것은 기존의 것을 고수하기만 하는 편협한 태도라고 봅니다.
이에 비해 소과의 때에는 삼사효에 두양효가 있고 그 주변에 네 음효가 놓여있는 모습으로 양효보다 음효가 많이 있고, 모양은 새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왕필이 소과의 小를 ‘모든 작은 여러 가지 작은 일’이라고 했는데요. 이처럼 소과의 때는 대과처럼 눈에 띄게 흔들리고 요동치는 때는 아닙니다. 하지만 눈에 크게 보이지 않고 별 것 아니라 여겨서 오랫동안 고치지 않는 나쁜 습관이나 태도 혹은 생각들이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거나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가 결정적일 때 삶을 거꾸러뜨리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전과 다르게 살겠다고 이렇게 와서 공부도 해보고 글도 써보고 해도 기존에 가졌던 생각의 틀이나 작은 습관들 하나 바뀌지 않음을 매번 확인합니다. 이렇듯 소과의 때는 나의 삶을 만들어 온 온갖 행동이나 사고 습관들이 매우 깊이 뿌리깊게 박혀 있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때를 뜻합니다. 그래서 소과의 때에는 나의 일상을 지배하는 소소한 습관이나 생각의 길을 바꾸고 몸에 익도록 하는 것은 쬐끔만 혹은 한 번만 해서는 안 되고 작은 일이지만 형통할 때까지 ‘지나치게’ 그리고 계속적으로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소과의 때는 큰 일이 아니라 작고 소소한 일을(可小事 不可大事) 꾸준히 해나가는 근기를 작은 것을 과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땅을 딛고 일상의 작은 습관들을 하나씩 벽돌깨기 하듯 격파하듯 해나가야지 급하고 귀찮은 마음에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흉하다고 봅니다. 즉 소과의 때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삶의 문제들을 지나칠 만큼 꾸준히 몸소 해나가는 실천의 근기를 보여주는 때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