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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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이제 본격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철학이론들에 대해 공부합니다. 에피쿠로스의 모든 철학이 집약된 세 편의 편지가 있는데, 이번 주에 읽은 자연학에 관해 헤로도토스에게 쓴 서신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피토클레스에게 쓴 천체현상에 관한 것, 세 번째는 메노이케우스에게 쓴 것으로 인간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헤로도토스에게 쓴 편지의 첫머리에 본인이 쓴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면밀히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철학체계 전반을 충분히 요약한 글(대요약집)’을 썼으니 그 기본원리들을 익히고 암기해 두었다가 자연학을 연구해 나갈 때 도움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철학 체계 전반의 개요와 명제들을 파악해 암기하고 있다면 세부적인 것들을 볼 때 그 기본원리에 비추어 종합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고, 연구한 것을 지속해서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더위 탓인지 64괘를 외우는 게 더디고 힘겹게 느껴지는 와중에 읽은 이 말이 외울 이유를 하나 더 갖게 합니다.
자연학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에 앞서 에피쿠로스는 먼저 ‘어떤 것을 지칭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물체의 이름은 처음부터 서로간의 약속에 의해 붙여진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에 의해 ‘차이가 반영된 각각의 느낌과 지각을 따라, 본성에 근거해 낸 소리가 공기 속으로 방출되어 형성된 것’이고, 나중에 서로의 의사전달을 덜 모호하고 더 간략하게 하고자 공동의 합의를 통해 특정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렇듯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면 말과 관련된 최초의 개념화된 심상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선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에피쿠로스에게 진리의 기준은 ‘감각, 선개념, 느낌이며 지성이 심성을 포착했을 때 생겨나는 인식’입니다. 인간의 몸과 직결된 감각과 그에 따라 느껴지는 쾌/불쾌의 감정, 그리고 ‘외부로부터 여러 차례 주어진 것에 대한 기억’인 선개념은 어떤 대상을 반복적으로 지각할 때 형성됩니다. 우리가 탐구하거나 생각하고자 한다면 증명이 필요 없는 것이 있는데 최초의 개념화된 심상이 그것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말의 용법이나 판단의 기준 등의 차이를 안 이후에 감각으로 인지되지 않는 것들, 즉 신들이나 학문적 개념들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앞의 세 가지(감각, 선개념, 느낌)를 통한 일차적 과정이 아니라 지성으로 곧바로 들어와 심상을 만들어내는 ‘인식’이라는 이차적 과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신이 곧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기준이라고 불리는 것 중 하나(인식)라는 말로도 읽힙니다.
에피쿠로스에게 우주(토 판, 이 때의 우주는 코스모스가 아닌 모든 것인 어떤 것)는 물체와 허공(비어있음)이며 우주는 무한하고, 물체들의 수와 허공의 크기에서 무한합니다. 사물들과 허공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천체들, 신들, 인간의 영혼 모두 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합성물은 물체를 가득 채운 원자들에서 생겨나고 해체되면 다시 원자로 돌아가는데 원자들은 무수히 많은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형태의 무수히 많은 사물들이 생겨나는데 중요한 것은 이 원자들이 끊임없이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운동은 곧장 아래로 떨어지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충돌에 의해 튕겨 나오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어떤 것은 서로 멀리 떨어지고 뒤엉키고 원자들 사이에 갇혀 진동하기도 하죠. 또 원자들과 허공이 이 운동의 원인이므로 이 운동은 시작점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태초에 운동이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요. 이것들이 존재하는 것의 본성을 이해하는 개요라고 에피쿠로스는 말합니다. 이외에도 ‘물체 전체의 운동은 내부 원자충돌의 외적 표현’이라는 멋진 말들이 많이 있고 이 원리를 기억해 두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지만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자연학을 공부한 이유는 주역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와 매우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주역에서 천지자연의 운동을 보고 군자가 행할 바를 모색했듯이 자연에 대한 탐구는 자연현상에 대한 세부지식을 알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이해를 통해 두려움과 불안을 벗어나기 위함이라는 거죠. 내가 물체의 일부이고, 내가 겪는 사건을 존재하는 것의 본성에 입각해 이해할 수 있다면 잘못된 표상으로 겪게 되는 불안을 다스리고 옆 사람과의 관계를 다르게 보게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자연에 대한 앎은 ‘자기 실천을 위해 철학적으로 관여적인 한에서의 자연에 대한 앎’이라고 합니다.
지난 학기 강의로 들었을 때의 에피쿠로스 보다 실제 그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니 이해가 어려운 지점들이 더 많습니다. 집단 지성으로 계속 읽어 가다보면 좀 더 이해가 수월해 지고 그걸 토대로 에피쿠로스의 쾌락을 함께 맛보기를 바래봅니다~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두려움과 불안을 벗어나 평안에 이른다는 자연철학자들의 태도를 보면서 점점 자연을 관찰한다는 게 뭘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자연을 치트키 삼지 않고 구체화 하는 게 참 익숙해지지 않네요.ㅜㅜ 3학기 에세이 홧팅할 수 있겠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