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늦장을 부리다 보니, 어느새 전날이 되었군요. 죄송합니다. ㅠㅠ 후다닥 써볼게요!
이번에는 <1982년 1월 13일 강의>를 읽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핵심은 두 가지 질문, ‘자기 배려에서 배려해야 할 자기란 무엇인가?’와 ‘배려는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하고,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인 것 같습니다. 각각의 질문을 강의 전ㆍ후반부에서 풀고 있는데요. 중간중간 ‘주체’를 ‘실체’가 아닌 관점에서 보려는 시도가 보입니다. 일단 이번 후기에서는 ‘자기 배려’를 푸코가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를 좇아가 보겠습니다.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의 출현
푸코는 지난 강의 1월 6일 강의에 이어, ‘자기 배려’가 어떤 맥락에서 출현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알키비아데스》에 따르면, 그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정치ㆍ사회적 맥락”에서 출현했습니다. 이 맥락은 세 가지 요소와 연관됩니다. 첫 번째는 ‘타인을 통치하는 것’입니다. 지난 강의를 참고하면, 알키비아데스는 타고난 특권적 신분과 소속, 권위가 그 자체로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일침 속에서 최초로 자기 배려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타인을 통치해야 함에 따라 자기 배려가 문제시”됐던 것이죠. 두 번째는 교육입니다. 당시 아테네의 교육은 스파르타나 페르시아에 비해 모자랐고, 특히 ‘성인 남성의 소년에 대한 사랑’이 문제였습니다. 성인 남성들은 소년들의 젊음이 한창일 때만 그들을 따라다녔고, 그들이 소년티를 벗기 시작할 즈음에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소년들의 배움도 완성될 수 없었죠. 세 번째는 ‘무지’입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스로 훌륭한 통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통해 본인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무지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알키비아데스》의 진본성이 의심되는 와중에도 푸코가 중심 텍스트로 활용할 수 있었던 건, 이 세 가지 요소가 소크라테스 대화편들의 친숙한 배경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전반부 강의는 세 번째 요소인 ‘무지’에 주목해서 전개됩니다. ‘무지’를 자각한 알키비아데스에게 소크라테스는 “너는 무지하다. 하지만 너는 젊기 때문에 시간이 있다. 그러나 배울 시간이 아니라 너 자신을 돌볼 시간이 있다”고 말하면서 위로하는데요. 푸코는 여기서 ‘배움’과 ‘자기 배려’, ‘수련을 의미하는 교육과 자기 수양이라 불리고 paideia라는 또 다른 형식의 수련 간의 격차, 상호 작용, 근접성 내에서 고대 세계의 철학과 영성 간의 작용과 관련된 다수의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83) 그리고 이런 식의 대화로부터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의 최초 이론이 출현했다고 보죠.
사실 자기 배려, 그러니까 “주체의 방식을 변형ㆍ변모시키면서 주체에 자격을 부여하는 실천들 없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전부터 있었던 철학적 테마입니다.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 자기 테크놀로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관념은”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에 나타나는 자기 배려는 이전의 철학적 사유과 완전히 다른 수준과 목적에서, 다른 형식과 함께 자기 테크닉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을 다시 취한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입니다.(90)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앞에서 밝혔던 두 가지 질문 ‘자기 배려에서 배려해야 할 자기란 무엇인가?’와 ‘배려는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하고,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자기는 무엇인가? 행위 주체로서의 영혼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에서 배려해야 할 ‘자기’에 대한 물음은 자기 인식(gnothi seauton)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어떤 종류의 동물에 속하고,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이 관계는 무엇이며, 재귀대명사 heauton(자기)은 무엇을 지시하며, 주체의 측면이나 대상의 측면에서 동일한 이 요소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거죠.(92) 다른 텍스트를 참고하면, 플라톤은 이를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푸코는 여기서 행위 주체로서의 영혼이 신체를 사용할 때 무분별하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남용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규칙을 따르며 일정한 태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플라톤(혹은 소크라테스)이 ‘자기 배려’라는 표현에서 heauton(자기)이 무엇인지 또 자기를 통해 지시된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Khresthai/khresis 개념을 사용할 때 그들은 영혼과 여타 세계 혹은 신체가 맺는 관계를 지칭하려 한 것이 아니라 주체를 에워싼 바, 즉 주체가 운용할 수 있는 대상, 자신이 관계를 맺는 타자, 자신의 신체,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과 관련하여 점유하는 독특한 초월적 위치를 지시하려고 했습니다. 플라톤이 배려해야 할 자기를 찾기 위해 khresis 개념을 사용했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실체로서의 영혼이 결코 아니라 주체로서의 영혼입니다. (…) 즉 자기 배려는 우리가 다수의 ‘무엇인가의 주체’인 한에서 자기 배려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기제적 행위의 주체, 타자와의 관계의 주체, 일반적 행동과 태도의 주체, 자기와의 관계에서의 주체인 한에서 자기 배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97)
따라서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자신의 몸의 쾌락을 충족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무엇인지 질문되지 않았고, ‘관계에서의 주체’를 사유하기보다 관계와 무관한 주체를 떠올린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적어도 고대 그리스에서 의사의 지식에 의존함으로써 병을 치유하는 것, 재산을 관리함으로써 부를 축적하는 것, 육체의 아름다움으로 뭇 남성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것 등은 결코 자기 배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세 가지 모델은 이후 자기 배려의 모델로 전환되기도 하는데, 그건 뒤에 있는 강의에서 자세히 살펴보죠!
배려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자기 인식(gnothi seauton)!
《알키비아데스》에 나타나는 자기 배려가 이전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지점은, 자기 배려를 자기 인식의 대원리에 종속시켰고, 자기 인식을 중심으로 모든 기술들의 총체적 재구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플라톤이 눈의 비유, 시각의 원리가 사유와 지식의 원리로 전유되는 맥락을 분석함으로써 ‘본다’는 행위가 ‘신성을 인식한다’ 혹은 ‘영혼을 인식한다’는 행위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자기 배려로서 자기 인식을 위해서는, ‘자기를 인식한다’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요. 거울로 자신을 본다거나 타인의 동공 속에 비춰진 나를 보는 것만으로는 자기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플라톤은 영혼이란 동일한 속성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타자의 눈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선은 신체적인 것, 미적인 것, 부유한 것으로부터 사유와 지식으로 방향 전환됩니다. 푸코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 나의 영혼을 인식하는 것에서 자기 배려가 시작된다고 본 것이죠.
그런데 이런 식의 새로운 유형의 자기 배려의 출현은 철학과 영성의 분리에서 비롯된 순수 인식이 발전하는 토양이 되기도 합니다. 푸코는 이를 ‘플라톤주의의 역설’이라고 말하는데요. “한편으로 플라톤주의는 신성을 자기 자신 안에서 확인하는 행위인 자기 인식에 의해서만 인식과 진실 접근을 이해하고 있ㅇㅆ다는 점에서 다양한 영성 운동의 주요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와 동시에 “마치 동일한 수준에 있는 두 사물처럼 영성과 합리성 간에 대립되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플라톤주의는 영성을 요구하지 않는 순수 인식을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환경을 제공했습니다.”(114) 그러니까 플라톤주의에는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는 힌트와 더불어 자기 배려가 거세된 자기 인식을 가능케 하는 토양이 잠재돼 있다는 거죠. 이런 이중적 역할을 이후 유럽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수행한다는데요. 유럽 문화에서 플라톤주의가 어떻게 변형됐는지를 살펴보기 전에 봐야 할 강의가 아직 많습니다. 잘 정리는 안 되지만, 재밌네요!
꼼꼼하게 써 주신 후기 잘 읽으면서 공부할게요. 자기 배려와 영성의 개념을 공부하면서 존재의 변형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발심을 내고서^^ 덕분에 그래도 단어들은 조금이나나 익숙해지는 것 같애요. 계속 차근히 따라가 보아요^^